■ 보학/성씨별관향

구 안동김씨(舊 安東金氏).

야촌(1) 2013. 7. 4. 19:53

구 안동김씨(舊 安東金氏)

 

[유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으로,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김방경의 향사는 음력 10월 9일에 한다.

 

[계 파]

김방경의 6세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다.


◇제학공파(提學公派) : 김익달(益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김사렴(士廉)
◇의익원공파(翼元公派) : 김사형(士衡) - 조선개국 1등공신. 태종때 좌정승에 올랐다.
◇군사공파(郡事公派:) : 김칠양(七陽)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김구용(九容)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 김구정(九鼎)
◇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
◇개성윤공파
◇전서공파
◇복야공파(僕射公)
◇안정공파
◇대호군공파

 

[분적]

◇수안김씨(遂安金氏))

◇해주김씨(海州金氏)

◇철원김씨(鐵原金氏)

◇사천김씨(泗川金氏)

◇영해김씨(寧海金氏)

◇대구김씨(大邱金氏)

◇보은김씨(報恩金氏)

◇청주김씨(淸州金氏

 

[집성촌]

◇경상북도 안동시 일원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일원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일원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탑촌리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일원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도덕리

 

[대표적 인물]

 

●김방경(金方慶)

1212년(강종 1)∼1300년(충렬왕 26).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성(敏成)이며 아버지는 병부상서(兵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민성이 양육했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1229년(고종 16)에 음서(蔭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 에 임명됨으로써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시중(侍中)최종준(崔宗峻)이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큰일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는데, 우창(右倉: 고려시대 국가행사에 소요되는 재화를 관리하던 관청)을 감독할 때는 재상의 청탁이라 할지라도 거절하였다. 1248년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었을 때 몽고가 침략해 오자 백성들과 함께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니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때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는 등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상장군에 오른 이후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형부상서·추밀원부사로 임명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 한 이후에도 개경 환도 문제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임연(林衍)이 김준(金俊)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한 다음 1269년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연은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였고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딪쳐 다시 원종이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김방경(金方慶)은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를 방아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고구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1270년 6월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의 임무를 맡아 삼별초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위기에서 구했다. 또한 진도(珍島)의 대안에서 토벌에 매진하였으나 무고(誣告)를 당해 개경으로 압송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참여하였다.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롭게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耽羅: 현재의 제주도)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는 책임을 맡아 1273년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의 환대를 받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 도독사(都督使)로서 도원수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는 인정 받아 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고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후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결국 백령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었는데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았다. 1281년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또 다시 실패하였다.

 

1283년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公을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한다. 시제는 음력 10월 9일이다.

 

묘소 및 재실은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능골에 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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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金 愃 또는 瑄 : 김방경의 장자로.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김흔(金 忻) : 김방경의 2자. 찬성사를 지냈다.
◇김순(金 恂): 김방경의 3자. 삼사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김윤(金 倫):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김승용(金承用) : 김선의 아들. 대제학을 지냈다.
◇김승택(金承澤) : 평장사를 지냈다.
◇김영돈(金永暾) : 유명한 무장(武將)이다.
◇김영후(金永煦) : 우정승을 지내고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김질(金礩) : 좌의정을 지냈다.
◇김수동(金壽童) : 영의정을 지냈다.
◇김찬(金 瓚) : 이조판서를 지냈다.
◇김자점(金自點) : 인조 때 영의정으로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구안동의 세는 꺾이게 되었다.
◇김제갑(金悌甲) : 원주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김시양(金時讓) : 판서를 지낸 청백리이다.
◇김휘(金 徽) : 김시양의 아들. 이조판서를 지냈다.
◇김득신(金得臣) : 숙종 때의 시인이며 참판을 지냈다.
◇김응하(金應河) :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김응해(金金應海) : 김응하의 동생. 훈련대장을 지냈다.
◇김중기(金重器) : 훈련대장을 지냈다.
◇김구(金 九) : 백범(白凡). 독립운동가, 정치가. 3.1운동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

   총장을 지냈으며, 1928년에 항국독립당을 결성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되었으며, 해방되자 임시

   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여 독립당 당수 등으로 있다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근대인물]

 

[기타]

 

[족보 발행]

◇경진보 : 1580년(조선 선조 13년)
◇기미보 : 1739년(조선 영조 15년)
◇무술보 : 1778년(조선 정조 2년)
◇을유보 : 1825년(조선 순조 25년)
◇임인보 : 1902년(조선 고종 6년)
◇을해보 : 1935년
◇기미보 : 1979년

 

[인구]

2000년 통계청 조사

◇가구수 : 132,645.

◇인구수 : 425,264명(18위) /2000년 통계청

 

[항렬표]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원(源) 영(榮)◯ ◯묵(默) 재(在)◯ ◯회(會) 태(泰)◯ ◯식(植)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용(容)◯ ◯교(敎) 종(鍾)◯ ◯우(雨) 병(秉)◯ ◯희(熙) 기(基)◯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현(鉉) 수(洙)◯ ◯동(東) 연(然)◯ ◯혁(赫) 진(鎭)◯ ◯영(泳)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근(根)◯ ◯병(炳) 효(孝)◯ ◯용(鏞) 택(澤)◯ ◯목(穆) 희(熹)◯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규(圭) 련(鍊)◯ ◯준(浚)        

 

編輯者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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