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 성균관대사성, 홍문관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석표(李錫杓)
선생의 乙丑 1745년(영조 21) 간찰 1점. <크기> 54cm × 32.5cm
● 이석표(李錫杓) - 32世
1704(숙종 30)~1751(영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운원(運元), 호는 남록(南麓). 경억(慶億)의 증손으로, 祖父는 大提學 인엽(寅燁)이고, 아버지는 하곤(夏坤)이며, 어머니는 송상기(宋相琦)의 딸이다.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학문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평판이 자자하였으며, 1729년(영조 5) 25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733년 29세에 알성문과에도 장원급제하였다.
하여 6품직에 바로 올라 성균관 전적이 된 이래 사간원정언ㆍ사헌부지평 등 양사의 관직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입이 무거워 한때 그의 재주를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1735년(영조 11)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8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시폐(時弊)를 직서하였으며 그 과정에 영의정 김흥경(金興慶)도 논척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조는 직서하는 자를 우대한다 하여 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하고 말을 내어주는 특혜를 베풀었으나 실제로는 좌천이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영의정이 귀향하여 버리고 대사헌ㆍ대사간이 갈리는 등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의 변호로 다시 내직에 보임되었으나 강직한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이조정랑ㆍ홍문관교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서 성균관대사성ㆍ홍문관부제학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전라도관찰사를 끝으로 일생을 마쳤다. 시문집으로『잡저문고(雜著文藁)』 6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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