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이상설선생 아직도 국적회복 안되" - 경인방송

야촌(1) 2013. 4. 30. 08:00

경인방송 FM 90.7MHz

 

■ 아침 시사프로그램 ‘상쾌한 아침, 원기범입니다’

◈방송일시 : 2013. 04. 30(화) 오전 7시 32~42분 전화연결

◈출 연 자 : 이재훈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기획이사님

◈방송주제 : 96주기 이상설선생, 아직도 국적 회복 안돼

◈방송내용 : 방송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오프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낯선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지사가 조국으로 아직도 못 돌아오고 있다면 여러분들 미

드시겠습니까?

실재로 이런 일이 있습니다. 고(故) 이상설선생의 얘기입니다.

올해 96주기를 맞은 이상설선생의 국적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직계가족만 국적 회복을 신청할 수 있다는 법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자 행정편의적인 법 해석 아닙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오늘 2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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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용>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폭로한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인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이 서거 100년이 다 되도록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훈 행정의 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상설기념사업회의 이재훈 기획이사와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원기범>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이재훈>예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원기범>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이 사실이지요?

 

◆이재훈>예 예.

 

◇원기범>참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몹시 부끄러운데, 지난 22일이 보재 이상설선생의 96주기였다고 들

                   었습니다. 이선생과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가요?

 

◆이재훈>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민족의 선구자 보재 이상설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3.1독립운동

                   과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진대, 그 어른의 유업이 너무 과소평가되는 오늘날

                   역사인식이 너무 안타가워서 1971년부터 임의단체로 활동해오던 선생의기념사업회가 2000년 사단법

                   인으로 전환하면서 본인이 기념사업회 일에 나름 되로 소명의식을 갖고 참여해오고 있습니다만. 역부족

                  입니다.

 

◇원기범>96주기 추모행사는 가지셨습니까?

 

◆이재훈>예 보재선생의 생가와 사당이 있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유영훈 진천군수를 비롯한

                   유관기관단체장과. 주민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재교 진천유도회장의 집례로 제1부 제례와 2부기

                   념식순으로 엄수되었습니다.

 

◇원기범>네, 조금전에 설명해 주셨습니다만 이상설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이 있었기에 3.1운동으로 이어지고, 그것

                  이 민족의 독립에 기쁨 까지 맛보게 되는 아주 교두보 역할을 하셨다 설명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민족운동

                  을 어떻게 전개하셨는지 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재훈>예 선생께서 36세 때인 1905년 11월 17일 날,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거 강제 체결되자 이에 국권

                  회복운동을 결심하고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길에 오른 후에 1907년 6월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헤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서 일본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미국과 유럽각

                  국을 순방하면서 독립외교활동전개하고, 미주지역에 해외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1909년 다시 러

                 시아로 돌아와 최초의 한인독립군기지건설,  군사학교 설립, 신한혁명단을 조직 결성해서 독립운동을 전

                 개하셨고, 1914년에는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된 모든 동지들을 모아 망국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광복군정부를 수립 정통령에 선임되었고, 그때 선생께서는 고종황제를 모시고 와서 입헌군주국을 선포하

                 려 기도하였으나 1917년 3월 2일 48세의 나이로 러시아연해주에서 병사함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

                한 체 돌아가신 비운의 독립운동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원기범>그렇군요.

                   그때 병사하지 않았다면 우리 근대사는 어떻게 바겼을지 모르겠네요.

 

◆이재훈>그렇다고 봅니다.

 

◇원기범>예 짧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만 을사조약 강제체결 후에 같은 상소를 다섯 번이나 또 올리시는 그런 기개

                   도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 모습들도 우리가 좀 살펴볼 수가 있는데 러시아에서 이제 병사하셨고,

                  그런데 오늘 모시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좀 살펴봐야 되겠는데, 지금 보재 이상설선생께서 러시아에서 돌

                  아가셨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이 없다. 이런 보도가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재훈>예 예.

 

◇원기범>아! 그리고 지금 까지 국적회복이 안되고 있다는 얘긴데. 이유가 뭡니까?

 

◆이재훈>예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일로, 일본은 그해(7월 20일) 고종을 강

                   제 폐위시키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상설선생은 궐석재판으로 사형에 처하고, 부사인 이준, 이위종

                   선생은 종신형으로 처함으로서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러시아로 망명길에 올랐지요.

 

                  그 후 가족도 없이 단신으로 11년간이나 자기 몸은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독립운동에 몸을 불태우시다 결

                  국 건강이 쇠약해져서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봅니다.

 

◇원기범>네, 그러게요. 그 이유도 좀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 지금 까지 국적회복이 안되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뭡

                   니까?

 

◆이재훈>우리나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1960년 1월 1일. 우리나라 호적법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당시 생존

                    자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외망명 독립운동가 약 천여명이 국적회복을 못하고 있다가 이에 무국

                   적논란이 일어나자 정부가(국가보훈처) 2008년 12월에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등록 창설을 주요 골자

                   로 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국회의 심의에 따라서 신채호선생 등, 다수의 독립 유공자

                  분들이 국적을 회복하였으나 이 법 또한 직계비속이 신청해야한다는 비비점이 있었던 것이지요.

 

◇원기범>직계비속이 신청을 해야 된다. 그럼 이상설선생 같은 경우는 직계비속이 없는 상황인가요?

 

◆이재훈>예 그렇습니다.

 

◇원기범>그러다보니까 신청을 못했고, 자격이 안대는....그러다보니까 또 국적회복이 아직도 안대있는 그런 상황

                   인데, 아 이것참 옆에서 보고 계신분들은 상당히 속이 좀 타시겠네요.

 

◆이재훈>그렇습니다.

 

◇원기범>예 이런 경우가 보재선생 외에도 또 계실까요?.

 

◆이재훈>예 제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봅니다.

 

 

◇원기범>그러니깐 가족들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계셨던 분들은 다 비슷한 상황일텐데, 그렇다면 이 관련규정을

                   좀 개정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재훈>예 그렇습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 말씀은 “직계비속이 없는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도 국적 회복이 가

                   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법안 절차가 복잡하고 선례가 없어 어려움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

                   다.

 

                   어찌되었던 간에 이런 일은 개인이나 민간단체에 맡겨둘 것이 아니고 국가가 정부입법으로 나서서 처리

                   해주셔야 순국선열의 선양을 국가가 잘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기범>예 관련해서 정부나 뭐 국회에 좀 호소를 해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이재훈>예 관계당국에 몇 번 말씀을 드렸지요. 지방자치단체 가서도 말씀을 드렸고,

 

◇원기범>예 얘기가 잘 안되었든 모양이군요.

 

◆이재훈>그른가봅니다. 예.

 

◇원기범>예 국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 추모사업을 하시니까 거기 따른 어려움도 좀 있으시겠어요.

 

◆이재훈>예 그렇습니다.

 

◇원기범>좀 설명 좀 더해주시지요.

 

◆이재훈>말씀 다 드릴 수 없습니다만, 세세한 참 방송으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그런 사항들이 있습니다.

 

◇원기범>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참 이 나라를 위해서 몸 받쳐 시간 받쳐 가진 것, 다 내놓고 희생하신 분들이신데,

                   이분들이 아직도 국적회복을  못하고 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관계당국은 이런 점들을 직접 파악을

                   해서 적절한 조치를 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말씀 고맙습니다.

 

◆이재훈>예 감사합니다.

 

◇원기범>네. 헤이그 밀사 주역이셨지요. 보재 이상설선생의 서거 100년이 다 되도록 대한민국국적회복을 못하

                   고 있다는 딱한 소식, 부끄러운 소식을 정리해드렸습니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이재훈 기획이사와 말

                   씀 나눴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