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천태만상 족보위조

야촌(1) 2013. 3. 15. 22:20

[역사추적] 천태만상 족보위조

"대한민국 양반님들, 당신의 족보는 진짜입니까?"

 

대부분의 한국인은 족보를 '모신다'. 17세기만 해도 극소수 양반들이 족보를 가졌는데, 그럼 그동안 양반가문만 엄청나게 번성했나? 18세기 인쇄술 발달과 신분상승을 위한 하층민달의 '반란'으로 시작된 족보위조. 현대 한국인의 족보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백승종 서강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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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표씨(이하 가명)는 제법 잘 나가는 건설회사 사장이다. 남도의 어느 시골 중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그는 일찌감치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6·25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도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그는 인고의 세월을 딛고 1970년대 중반에는 이미 국내 중소 건설업계에서 이름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런 이사장에게 뜻밖의 고민이 생겼다. 87년 가을 그의 맏아들 승복의 혼사와 관련해 벌어진 일이다. 집안에 재력이 있는데다 미국 명문대 박사학위를 가진 장남의 배필감을 구하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매쟁이를 놓아 최종으로 낙점된 후보는 국내 명문여대를 나온 김수선이라는 아가씨였다. 

 

며느리감인 김수선은 충청도에서 대대로 세(勢)를 누려온 이른바 명문 양반가의 후손이라고 했다. 10대조의 위패가 어느 서원에 배향돼 있고, 13대조는 문묘(文廟)에 모셔진 대단한 집안이라고 했다. 이사장은 키가 헌칠하고 귀티가 흐르는 김수선의 겉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양반가라고 하는 그녀의 출신이 썩 마음에 끌렸다.

 

그런데 한학(漢學)에 밝은 김수선의 큰아버지가 장차 조카사위가 될 이승복의 집안을 캐묻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때까지도 이종표씨에게는 족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종표씨의 호적에는 본관이 경상도의 큰 고을 어디로 적혀 있다.

 

그곳 이씨라면 이 나라에서는 몇째 안 가는 대성(大姓)이다. 1985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이종표씨와 본관을 같이하는 이씨는 100만명 가량 된다. 그러나 호적과 족보는 다르다.

 

족보라고 하면 본관(本貫)을 공유하는 한 집안(리니지·lineage)의 맨 처음 조상인 시조(始祖)로부터 시작해, 그 자손들의 이름과 호(號), 출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 벼슬이나 과거 시험을 비롯한 특별한 경력, 배우자의 가계에 대한 기록 및 묘지 위치 등이 세대(世代) 순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족보는 직계와 방계의 여러 조상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유달리 강한 유교사회인 한국에서는 신성시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듣기로 이종표씨의 할아버지는 마을 심부름꾼이었다.

 

동사(洞使) 또는 동노(洞奴)라고도 불리던 이씨의 할아버지 이쇠동은 마을의 애경사(哀慶事)가 있을 때면 차일을 치고 자리를 까는 일이나, 흉하거나 길한 소식을 온 마을에 바삐 알리고 다니는 일을 했다. 이를테면 마을이 공동으로 부리는 한낱 종에 불과한 신분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웬만한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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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사와 ‘족보전문가’

 

이씨 집안의 ‘화려한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양반 김씨들에게 적당한 답을 주기가 아주 어려운 일로만 생각돼 이씨는 매우 낙심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조상의 내력 때문에 고민하던 이씨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가 나타났다. 수년 전부터 친분을 나눠오던 박노덕 형사였다. 그는 박형사가 어느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조상의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내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박형사의 말에 따르면,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古書室)에는 일제 때 전국 각지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족보들이 거의 빠짐없이 비치돼 있는데, 그곳에 ‘족보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남의 족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대여섯 명의 고정 열람객이 바로 족보전문가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 족보들을 소재로 삼아 조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뿌리를 이어주는 사업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박형사가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것도 이씨처럼 변변치 않은 조상내력을 밝혀보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박형사의 본관은 밀양. 호남평야에서 어렵게 농투성이로만 살아온 박형사 집안에는 시조(始祖)로 믿어지고 있는 신라의 첫째 왕 박혁거세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가승(家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직계 조상의 이름과 그 배우자가 속한 씨족의 이름, 그리고 제삿날만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 고등학교 국사 책에 나오는 유명한 박씨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본래 박 형사는 족보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 40이 다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핏줄의식을 점차 느끼게 됐다. 비록 쥐꼬리만한 권력이지만 때로는 남을 윽박지를 만한 위치에 있다 보니, “종씨(宗氏)인 것 같은데 항렬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종종 있었다. 형과 그의 이름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덕 덕(德)자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굳이 항렬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었다.

 

우물쭈물 얼버무리다가 때로는 그냥 종씨가 되기도 하고 아저씨, 조카, 형님, 또는 동생으로 그때 그때를 넘기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언젠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굳어지고 있었다. 박형사는 자신의 호적이 밀양 박씨, 즉 박혁거세 왕의 후손이 틀림없으므로 그 뼈대 있는 내력을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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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전문 출판사의 ‘작품’

 

그러던 중에 처가의 대부로부터 국립중앙도서관에 족보전문가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경주 정씨로 신라의 전설적인 육촌장의 후예임을 고집하는 대부는 종중(宗中) 일에 열심인 사람인데, 경주 정씨 족보를 열람하러 중앙도서관에 들렀다가 이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박형사는 그때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인 20만원을 들고 가서 고서실에 상주하는 족보 전문가를 만나 통사정을 했다. 가문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박형사의 열의가 고서실의 심모라는 전문가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모양이다. 드디어 심씨의 주선으로 대전의 족보 전문 출판사가 1987년 봄에 발간한 밀양박씨의 어느 파보에는 박씨 일가가 모두 실리게 됐다. 

 

족보전문가 심씨가 여러 날을 두고 연구를 거듭해 찾아낸 바로는 박씨 등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밀양 박씨 집안의 한 가지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심씨는 박형사의 고향을 포함한 전라도 일원의 밀양 박씨가 수록된 최근의 한 족보를 뒤져서 19세기 말쯤에 자손이 끊어진 한 가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였고, 바로 그 박씨의 후손으로 박형사의 할아버지를 이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심씨가 서둘러 적당히 꾸며댔기 때문에, 박형사의 할아버지 박문규는 족보상 어머니가 되는 김한순씨가 50세가 되던 해에 낳은 것이 되었다. 19세기만 해도 여자들의 폐경기는 40세 전후였으니, 쉰 살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박형사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찾아냈다는 그 조상들의 이름이 자기가 시골에서 ‘발굴해온’ 가승의 여러 할아버지 이름과 일치하지 않은 사실도 발견했다. 박씨의 할아버지까지는 이름이 같은데 그 윗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들 뿐이었다. 조금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무슨 대단한 문제랴 싶어 덮어두었다.

 

출판된 족보를 놓고 본다면, 박씨의 7대조는 경상도 현감이었고 15대조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박씨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부야 그 전문가들이 책임질 일이지만 하여튼 용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이사장은 박형사의 족보찾기 내력을 들은 며칠 후 박형사에게 두툼한 돈봉투를 내밀며 비밀리에 족보 전문가를 찾아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사장의 부탁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이사장의 가계는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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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조부, 일약 대학자로

 

15세기의 한 유명한 정승이 이사장의 조상이요, 판서만도 네댓 명을 배출한 그야말로 누대명문 (累代名門)의 후손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이씨는 이렇게 탄생한 족보를 양반 김씨들에게 내밀었고, 그들은 탄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양가의 축복 속에 이승복과 김수선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이사장은 벼슬과 문명(文名)으로 번쩍이는 족보에 자신과 일가 친척의 이름이 등재되고 나자 족보의 매력에 흠뻑 젖어버렸다. 조선 제일의 음택(陰宅)으로 소문난 경기도 용인의 한쪽 모퉁이를 사들여서 그 옛날 마을의 종이던 할아버지 묘를 옮겼다.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증조와 고조의 묘도 전문가를 동원하여 고향 부근 산야(山野)에서 발견하는 데 성공해 역시 이장(移葬)했다.

 

화강암을 많이 써서 웅장하고 격조 있게 다듬어 올린 조상의 묘에는 비석과 상석을 비롯한 석물(石物)도 골고루 챙겼다.

유명한 한학자와 서예가를 동원하여 무덤가에 새로 세운 이쇠동의 비석에는 그가 마을의 종임을 표시하는 내용은 없었다.

 

글월 문(文)자, 빛날 형(泂)자 이문형이 그의 이름이며, 쇠동은 소싯적에 쓰던 이름에 불과하다고 했다. 비문을 지은 이는 쇠동 아니, 문형이 일찍이 출세의 뜻을 버린 무명의 대학자인 동시에 효행이 탁월하였던 일세(一世)의 참된 스승이라고 마구 극찬하였다.

 

어느덧 이사장은 자기가 정말 명문의 후손이라고 믿게 됐다. 처음에는 약간 머쓱한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해마다 가을이면 대종중에서 지내는 시향(時享)에도 참여했다. 문중에서도 선영(先塋)을 위하는 정성이 극진할 뿐만 아니라, 장학금을 조성한다,

 

문중 회관을 새로 짓는다 하는 일에 열심인 이사장을 보배로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이사장은 자연스레 문중 임원을 맡게 되었으며, 문중의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사장은 문중의 숙원사업으로 전국에 흩어져 사는 종인(宗人)들에게 나누어 줄 월간지를 발간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미 유명한 성씨들 가운데는 월간지나 격주간으로 나오는 신문까지 펴내는 경우가 많으며, 조상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이름이 높았던 조상을 기념하여 무슨 무슨 학회를 창립한 예도 있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할 수야 없겠지만, 이사장은 이름없이 죽은 대학자 이문형의 뜻을 그리는 유허비(遺墟碑)만이라도 고향 마을 어귀에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시기상조일 수도 있겠기에, 이 다음에 눈을 감으면서 맏아들 승복에게 부탁하면 어떨지를 곰곰이 검토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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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역사 선생님의 의문

 

또 다른 경우를 보자. 제주도 구좌읍의 한 중학교에서 역사과목을 담당하는 최윤정 선생은 93년 2학년 네 학급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 항목에는 조상의 내력에 관한 것도 들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설문대상 234명 가운데 무응답자 21명을 제외한 213명 중 198명, 그러니까 85%의 학생들이 자기 집 또는 큰집에 족보가 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자신이 양반의 후예라 믿고 있었다. 최선생은 흔한 서원(書院)이니 사우(祠宇)와 같은 유교 문화의 표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중산간 지역의 평범한 농촌 지역 학생들이 다들 양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선생의 상식으로는 일반 농민은 그 출신이 대체로 평민이어야만 했다.

 

더욱 믿기 어려운 사실은 고씨, 양씨 및 부씨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자신의 조상이 15~18세기에 본토에서 제주도로 흘러 들어왔다고 대답한 점이었다. 그런가 하면 제주의 세 성씨 경우에는 그들 조상이 고려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사실상 탐라의 지배자들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최선생이 알기로 조선시대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로의 이주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물론 법을 어기고 생활 여건이 좀더 나은 본토로 도주한 이들도 얼마간은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제주도로 유배된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줄곧 있어 왔다는 점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제주도 주민의 반수 이상이 유배객(流配客) 또는 이주민의 후손일 수는 없다.

 

 최선생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학생들의 응답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의 특이한 사투리나 육지와 뚜렷이 구별되는 생활습관을 보더라도 도민의 절대 다수는, 최소한 수백 년 동안 그 섬 안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보아야 옳다는 것이 최선생의 소견이었다. 

 

그해 여름 방학 때였다. 대학시절 친구이자 강원도 홍천의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민선희 선생이 최선생을 찾아왔다. 그들은 삼성혈이며, 성읍의 민속마을, 그리고 성산 일출봉을 비롯한 관광명소를 두루 구경했다. 그런데 민선생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담임을 맡고 있는 홍천의 고등학생 대부분도 집안에 족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학생들도 역시 자신을 양반의 후예라 믿고 있는데, 아득한 조상의 출신지는 충청, 경상 및 전라도가 절대 다수를 점한다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강원도 홍천이 본관인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최선생과 민선생은 마주보고 웃어버렸다.

 

강원도 홍천에는 본디 홍천 사람은 없고 이곳 저곳에서 흘러들어온 양반의 후예만이 가득하고, 제주도에는 탐라의 왕과 귀족의 후손만 있을 뿐 피지배자의 자손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게 도무지 허탈한 이야기였다.

 

홍천이 무슨 특별한 곳이라고 그 많은 양반들이 몰려들어 농부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제주도의 평민과 노비들은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역사책에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몽땅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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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족보는 가짜다

 

최선생과 민선생이 풀지 못한 숙제에 주목하는 역사 연구가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정답이 결코 없는 난제는 아니다. 조선시대에 국가 또는 각 고을에서 펴냈던 일종의 인문지리지라 할 수 있는 읍지(邑誌), 여러 집안의 족보,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자료를 검토해보면, 최선생들이 던진 의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고이고이 모시고 있는 족보의 대부분은 가짜라는 것이다. 이사장이나 박형사의 경우에서 본 것같이 최근에 위조된 족보도 많지만, 18세기부터 쉴새없이 위조되어온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양반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족보를 오동나무 상자와 같은 특별한 함(函)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한다.

 

그들은 족보의 내용을 숙지하는 것을 후손의 당연한 의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 같은 것도 못마땅하게 여긴다. 앞에 거론한 이사장의 사돈인 김씨들만 하더라도, 족보란 ‘모시는’ 것이지, 감히 여느 책자나 집기처럼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신성한 족보인 까닭에 그 내용, 특히 가계의 계승에 관한 기록 가운데는 어떠한 거짓도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한국인의 신념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신성한 문서로까지 간주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사실과 다르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허다하게 발견되는 것이 바로 족보다.

 

사실만을 기록한 족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허위 사실이 특히 많이 발견되는 것은 20세기에 발간된 족보들이다.

그들 족보에는 조상들이 역임한 적이 없는 화려한 관직을 적어 놓거나, 문과(文科)나 생원진사시 (生員進士試)를 비롯한 각종의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고 거짓으로 기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사장의 족보에도 가짜 문과 급제자가 여러 명 들어 있으며, 박형사의 족보에도 가짜 진사가 두 명이나 된다.

그런 허위 사실은 족보의 기재 사항을 믿을 만한 합격자 명부인 ‘문과방목’과 ‘생원진사방목’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들과 혈연관계가 없는 집안에 억지로 계보를 연결시킨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앞의 경우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인데, 특히 20세기에 이렇게 가계를 위조한 족보가 많이 출간됐다.

 

그러면 그와 같은 엉터리 족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나온 수만 권이나 되는 족보의 내용을 일일이 검토할 수 없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족보에는 가계를 위조하여 끼어든 가짜 친족이 적게는 수천명, 많게는 수만명 이상 수록돼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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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대부분은 족보 없는 평·천민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까지도 한국인 대다수는 족보에 입록되지 못하였으나,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은 역사적 왜곡이 없이는 양립하기 어렵다.

 

현재 전하고 있는 16~17세기의 호적을 검토해보면, 그 당시에는 성씨를 사용하지 못한 노비들이 전체 인구의 30~40%나 되었다. 이들 노비는 물론이고, 그보다 상위 계층이자 인구의 40~50%를 차지하던 평민들도 당시에는 족보와 거리가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다소 충격일지도 모르겠으나, 역사상 평민들이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12세기부터다. 14~15세기에 이르러서야 성씨 사용이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성씨를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평민들의 이름이 양반들이 편찬하는 족보에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향리(鄕吏)와 같은 중간 지배층마저 당시에 편찬된 족보에서는 완전히 배제됐다.

 

요컨대 17세기까지 한국에서는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양반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권력과 특권의 상징물인 족보 또한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경제적 독립성을 유지하며 살았던 외거노비(外居奴婢)들과 평민들은 조상의 계보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3년마다 국가의 명령으로 정리되었던 호적에 신고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배우자의 아버지 등 이른바 사조(四祖)의 이름을 모두 댈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노비들 가운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대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다.

 

양반과는 달리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조상이 없기 마련이었던 노비나 평민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그들이 계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다. 더욱이 그들 노비와 평민의 조상이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는 기생이나 백정과 같이 이른바 천한 직업에 종사했거나, 노비와 결혼한 경우 또는 범죄자로 아예 낙인이 찍혀버린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처지에 있던 이들이라면 뻔히 알고 있던 조상의 내력조차 일부러 숨기려 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노비는 없으며, 이사장의 예에서 보았듯이 천한 사람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1985년 경제기획원이 실시한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총인구는 4030만으로 약 250개의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전체 인구 가운데서 54%에 해당하는 2191만명이 김(金), 이(李), 박(朴), 최(崔) 및 정(鄭)씨에 집중돼 있다.

 

그중 김씨는 879만명(전체 인구의 22%)이나 되며, 이씨는 599만명(15%)이다. 그런가 하면 박씨는 344만명(9%), 최씨는 191만명(5%),정씨는 178만명(4%)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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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이후 양반만 번성했다?

 

현재 한국의 성씨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되는 점은, 성씨가 같으면 과거 어느 시기엔가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박형사가 만났던 여러 박씨가 종씨(宗氏)라고 말하였던 점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다른 보기를 또 하나 들면 이렇다. 1985년 현재 신라의 전설적인 인물인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임을 주장하고 있는 김씨는 적어도 400만명이나 된다. 이들은 본관이 서로 다른 57개 집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들 가운데서도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직계 후손인 경주 김씨는, 구성원 수가 무려 152만명이나 된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17세기까지도 한국인의 절대 다수는 족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해서 현대 한국사회에는 귀족의 후손들만 남게 되었을까? 일종의 세습 귀족이었던 양반들은 경제적인 여건이 비교적 우월하였기 때문에 남달리 많은 후손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인가?

 

물론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였던 양반들이라면 그들의 인구 증가율은 다른 계층에 비하여 우세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현대 서부유럽에는 귀족의 후손이 전체 인구의 3% 미만이다. 유럽이라고 해서 귀족의 인구 증가율이 특별히 낮았을 이유도 없었을 테지만, 한국의 양반이 폭발적으로 자연 증가하였을 리도 없다.

 

또 설령 양반 인구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 시대 양반사회에도 경제적인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18세기 이후 이른바 ‘잔반(殘班)’으로 불리던 몰락 양반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사실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초기 단계에는 비교적 높았을 법한 양반의 인구 증가율도 수백 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현대 한국인의 대다수는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의 내용과는 달리 노비와 평민의 후손임이 틀림없다.

 

이에 대하여 훨씬 직접적인 예가 있다. 17세기 말 경상도 지역에 살았던 어떤 노비의 후손들은 현재 남원 K씨의 족보에 편입되어 있으며, 그 지역에서도 양반의 후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호남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던 여러 향리 집안의 후손들도 제각기 전국적으로 유명한 씨족의 족보에 실려 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백낙신 일가는 OO 백씨 중에서도 가장 명망이 있는 어느 파(派)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제주도 대정의 평민이었던 송씨 가운데는 본관을 바꾸어 마침내 △△ 송씨 족보에 수록된 경우가 있다.

 

따지고 보면, 위조 족보의 유행은 오랜 시일에 걸쳐서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고 방법 또한 다각도로 개발되어 온 것이었다. 그러면 역사상 누가, 언제, 그리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족보를 위조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 기록이 1764년 11월 12일자(양력) 실록 기사다.

 

“임금이 낮에 경연을 가졌다. 그때 사헌부 집의 유수가 아뢰었다. ‘역관(譯官) 김경희가 자기 마음대로 활자를 만들어서 비치해 둔 다음, 다른 사람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군역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을 꾀어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조에 명령하셔서 엄중 조사하여 무거운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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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낳은 18세기 신종 사업

 

위조 족보가 처음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18세기 후반의 기록으로, 위의 기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족보를 위조한 장본인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64년,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김경희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이 점은 박형사와 이사장이 문중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족보에 합법적으로 삽입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둘째, 중인 김경희가 여러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쇄시설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17세기까지만 하여도 인쇄시설은 공공단체나 사찰에만 비치되었던 데에 비하여, 18세기에는 김경희와 같은 중인도 개인적으로 인쇄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주목된다. 책자의 발간과 같은 문화 사업이 비단 양반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인과 평민을 상대로 한 보편적인 업종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설 인쇄소를 운영하던 김경희의 고객은 이른바 ‘군역을 모면하려던 시골 사람들’이었다. 요컨대, 양반들에 의한 활자매체의 독점적 성격이 해소되면서, 양반들의 특권을 상징해오던 족보에 대한 하층민의 도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위의 문맥만으로는 시골의 군정들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료들을 분석할 때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들, 즉 여러 양반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고’라고 한 부분은 김경희의 족보 위조 사업이 양반들과의 뒷거래를 기반으로 성립됐음을 암시한다. 양반들과 김경희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김경희의 족보 위조 절차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경희는 사업상 다량의 양반 족보를 갖추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의 족보 발간은 요즘과 같이 인쇄소에 맡겨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중에서 인쇄시설을 확보하여 한정된 부수만 간행했다. 족보의 간행과 배포는 문중 책임자들이 전적으로 도맡았다. 족보의 여벌이 공공연하게 외부인에게 판매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김경희는 어떻게 하여 다수의 양반 족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그들의 족보를 사들이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족보 간행 책임자인 문중 대표들에게 뇌물을 주고 여벌로 족보를 더 찍게 한 다음 비밀리에 건네 받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김경희의 사업은 양반들과의 불법적인 족보 거래를 전제로 했다.

 

확보된 여러 족보를 고객에게 선보이면서 김경희는 그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선택 과정에는 고객의 성씨와 본관이 일치하는 족보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백낙신 등이 이를 증명한다. 선택이 끝난 다음 고객의 이름이 들어갈 지면을 확정하고 그 부분에 어울리게 가계 기록을 위조해 별도의 종이에 활자로 인쇄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족보를 해체하여 원래의 지면을 빼내고, 그 대신 위조한 별지를 그 자리에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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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군역 면제 수단

 

넷째, 족보를 위조했던 평민들은 그를 통하여 양반의 권위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실질적인 혜택도 추구했다. 즉 족보 위조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부과된 군역(軍役)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당시의 관례로는 족보를 신분 증명서로 제시할 경우, 군역에서 면제될 수가 있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족보의 위조 행위가 그와 같은 실질적인 목적을 띤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전통이 지닌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위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족보를 위조하게 되는 구체적인 동기가 다름아닌 당사자들의 군역 면제에 있었다는 점은 실록의 다른 기사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1787년 6월12일 당시 사간이었던 이사렴이 국왕 정조에게 아뢴 현안 가운데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간사한 백성들이 유명한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軍役)의 면제를 도모하는 자가 곳곳마다 있습니다. 청컨대 이를 엄하게 금지시키십시오.”

 

그 밖에도 1791년 2월24일 백성 박필관이 신문고를 울리고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고발하였을 때에도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박필관의 진언은 족보의 위조 행위가 평민들은 물론이고, 노비들에게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었던 사정을 알려 주고 있다.

 

군역의 대상에서 처음부터 면제되었던 노비들이 위조 족보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 위조 족보의 주된 목적을 군역의 탈피에서만 찾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18세기 이후에는 굳이 족보를 증빙서류로 제출하지 않더라도, 공명첩을 통하여 이름만의 벼슬을 사거나, 유생을 가장하여 유학(幼學)이라고 일컫는 방법, 또는 합격이 수월하였던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등의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도 범법 행위가 발각되기만 하면 엄히 단죄될 족보 위조에 집착하는 평민과 노비가 많았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하층민들이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족보를 소지하려 하였다는 증거이다. 양반을 사고 팔았다는 우화를 전하고 있는 박지원의 ‘양반전(兩班傳)’이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풍자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러한 세태는 1788년 2월28일 김광악이라는 중견 관리가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에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사헌부 헌납 김광악이 상소하였다. ‘신에게 하찮으나마 소견이 있기에 외람되이 10조목으로 아룁니다. … 셋째는 신분질서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비천한 사람까지 외람한 호칭과 사치스러운 복식을 꼭 존귀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본뜹니다. 심지어 양반의 족보까지 돈을 주고서 첨간(添刊·자기들의 이름을 덧붙여서 발행함)하고 관직의 계급까지 뇌물을 주고서 임명장을 빌립니다.

 

해서 백성들의 생업이 궁핍해지고 군사의 액수(額數)가 줄어드는 것이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엄하게 법령을 세워 발각되는 대로 엄히 다스리소서. … 일곱째는 재판을 간단 명료하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가장 의혹스러운 것이 바로 묘지에 관한 소송입니다. 주객(主客)의 신분이 비록 다르지만 강약의 형세는 도리어 판이합니다.

 

양반이나 세력자들은 반드시 승소(勝訴)하기를 힘쓰고, 여항(閭巷)의 서민들은 죽고 살기로 덤비기 때문에 법관(法官)이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장(訴狀)이 날로 쌓여 조사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

 

열째는 평민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님의 은혜를 믿고 오만한 버릇을 키워왔기 때문에, 사부(士夫)를 구타하고 모욕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지방관을 모욕하기를 예사로 압니다. 조금만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려움 없이 징을 두드려 말을 아뢰고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요행을 바라는 자가 열에 항상 여덟 아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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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번 평민들의 마지막 장신구

 

김광악의 상소는 위조 족보에 관한 문제들을 풀어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인용문의 요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족보를 위조하거나 관직 임명장을 돈을 주고 샀다는 이른바 ‘비천한 사람들’이 기존 신분 질서를 위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광악의 주장은 단순히 떠도는 소문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임의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실례에 근거한 진술이었다. 임의철 등은 위조 족보를 이용하여 군역을 피하려 했던 점에서 앞에서 살핀 ‘시골 사람들’(1764년의 실록 기사)과 같은 존재이다. 양반의 족보를 돈 주고 살 만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세력이 약해진 양반들까지 무조건 공손히 떠받들 만큼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둘째, 그런 점에서 임의철과 같은 평민들이야말로 위의 상소문에 나와 있는 불손한 사람들이었다. 묘지 등에 관한 소송을 통하여 양반의 권위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양반을 모욕하고 구타할 수도 있는 그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소송이나 상언(上言)에 관한 대목이다.

 

지체를 자랑하는 유식한 양반들 중에서 ‘비천한 사람들’의 소송 사건에 대필(大筆)을 일삼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골의 양반들이나 어딘가 큰 약점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지방관을 고발하였던 백성들의 문서는 다름아니라 그들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문서였다고 보게 된다.

 

셋째, 격식을 갖추어서 양반들을 공격하는 문서를 관청에 제출할 정도라면, 이들 하층민은 이미 양반들의 행동 양식이나 언어 및 사고 방식에 상당히 익숙해진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김광악이 위에서 처벌 대상으로 삼았던 ‘비천한 사람들’, 즉 양반들의 호칭이나 복장을 그대로 본떴다는 이들이 주목된다.

 

호칭과 복장을 모방하였다는 말은 그들 평민들의 생활 습관이 양반과 서로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예의범절과 언어 및 주거 습관에 있어서 기존 양반 문화를 공유하는 평민들이 상당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컨대, 18세기 후반에는 경제력과 문화적인 역량면에서 양반에 버금가는 평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복잡한 유교 예법을 몸에 익혔으며, 독서 경험도 쌓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법률을 비롯하여 행정 관행을 숙지하였으며, 자신의 의사를 한문으로 표현할 줄도 알았다. 그리하여 양반들을 상대로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그동안 양반들의 신분적 절대 우위를 상징해 온 족보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출생이 그들에게 씌운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했던 것이라 풀이된다.

 

그러니까 위조 족보의 구매자, 즉 김경희의 고객들은 만만한 시골의 평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양반 신분을 증명하는 족보만 빼놓고는 어느 모로 보나 웬만한 양반에 못지않은 실력자들이었다. 사정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위조 족보를 금지하려는 조선 왕조와 양반들의 노력은 실효를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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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타협, 별보와 별파

 

위조 족보의 유행을 도저히 막지 못하게 되자 양반들은 드디어 족보 편찬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시도했다. 문중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도 족보에 실어주되 명칭상 구별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가계와 연결 관계가 불분명한 사람들을 이른바 별보(別譜) 또는 별파(別派)라는 명칭 아래 족보에 격리 수용하기로 한 방침은, 양반들로서는 사실상 숙고 끝에 마련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기보다는, 이미 현실적으로 상당한 경제 및 문화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새로운 사회 세력의 족보에 대한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가 없어서 고안한 일종의 타협책이었다. 이 별보니 별파니 하는 명칭은 18세기 말부터 일부 족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양반들의 족보 가운데서도 특히 유력한 씨족이 출간하는 족보일수록 별보 또는 별파가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왕에 족보에 실리려면 아무래도 세력가들이 펴내는 족보에 속하기를 바랐던 사람이 많았을 것은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19세기 굴지의 세도 가문으로 인식되었던 모 성씨의 경우를 중심으로 하여, 별보와 별파가 가계의 위조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1760년에 편찬된 이 성씨의 족보 30권 가운데서 계보를 기록한 부분은 모두 28책이었다. 그런데 그중 제28책에는 17개파가 별보 형식으로 수록돼 있다. 그러니까 이 족보에 기재된 전체 인원의 4%는 사실상 이 성씨와 혈연 관계임을 입증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혈연 관계를 증명하는 구체적인 문서가 없는 이들이 족보에 실리게 되었던 것은, 물론 당사자들이 이 성씨의 후예라고 극구 주장하면서 수록을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이 성씨가 본격적인 세도가문으로 성장한 것은 19세기 전반이었다. 이 시기에 간행된 그 집안 족보에는 별파와 별보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1826년에 편찬된 족보는 모두 35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계보를 기록한 것은 33권이다. 그런데 여기서 32~33권은 모두 별보로 전체 분량의 6%나 되었다.

 

그런가 하면 1900년에 간행된 80권짜리 족보에서는 계보를 수록한 것이 78권인데, 그 가운데서 별보는 1권으로 줄었다. 19세기까지 별보에 수록되었던 인원의 대부분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본래의 여러 파(派)들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19세기까지도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위 씨족에 정식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별보와 별파가 가계 위조의 합법적인 수단으로 변모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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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누구나 양반이 됐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사항은 1900년의 위 성씨의 족보는 그보다 74년 전에 출판된 족보에 비하여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같은 기간에 구성 인원이 3배 가량 증가했다는 말이 된다. 18세기까지 생존하였던 조상에 대한 분량은 1826년 족보의 40% 정도이며, 그 분량은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같은 기간 전국의 인구 증가율은 20% 내외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족보에 새로 수록된 인원의 최고 80~90%에 해당하는 3만~4만명은 가계를 위조하여 이 성씨 집안으로 행세하게 된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것은 물론 이 성씨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한국의 유명 성씨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던 것이다. 더욱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 동안 족보에서 배제됐던 황해도 재령 이북의 북한 지역과 제주를 비롯한 도서 지방 거주자들에게도 점차 족보가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20세기 후반에는 한국 사람이면 사실상 누구나 호적에 적힌 본관과 성씨를 근거로 삼아서 해당 문중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이사장과 박형사를 비롯한 많은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한편 19세기까지 서울의 양반들이 간행한 족보는 신빙성이 대단히 높다고 보는 일부 견해가 있다.

 

그에 따르면 씨족 내부에는 위조를 상호 감시하는 여러 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고의적인 허위 기사는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별보에 수록된 인원들은 불행히도 중간에 계보를 잃기는 하였지만 해당 문중의 구성원이 틀림없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친족관계야말로 개인의 신분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양반들에게는 조상의 계보보다 소중한 지식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보학(譜學) 또는 족보에 대한 지식이 양반의 필수 교양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양반으로서 자신이 속한 계파를 모르게 됐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요컨대 별보에 기록된 사람 대부분은 해당 씨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해당 족보에 기록되기 위하여 증빙자료로 제시한 문서는 대부분 호적이었는데, 바로 거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얼른 생각하면 호적은 공문서니 그 기록을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경상도 노비들의 경우만 하더라도 18세기에 처음으로 K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을 당시에는 김해를 본관으로 했으나 곧이어서 남원으로 바꾸었다. 알다시피 남원 K씨 가운데는 유명한 인물이 많다. 그런 반면 김해 K씨란 이름조차 생소하다. 그런데 17~19세기의 호적을 뒤적여 보면 이와 같은 예는 흔히 발견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른바 양반들의 족보에 별보나 별파로 기재되었다가 나중에 흡수 통합되었던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해당 씨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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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 바로잡기는 어찌할꼬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족보 위조행위는 그 나름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 시기에 등장하였던 신흥세력과 짝을 이루었다. 그들이 족보를 위조하는 손쉬운 방법은 이른바 중인 김경희가 사용하였던 ‘첨간(添刊)’과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위조 족보의 만연에 겁을 낸 양반들은 별보와 별파라는 격리 장치를 고안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양반의 족보에 완전히 흡수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너무나 컸고,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 압력으로 인식된 결과 별보와 별파는 결국 위조 족보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좀 우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명문 양반 집안임을 주장한 이사장의 사돈집, 즉 김씨들도 사실은 19세기 말에 별파로 족보에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만일 이사장이 아들 승복의 결혼 전에 이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는 굳이 엉터리 족보에 집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양반의 족보에 들어가기 위한 가계 위조 행위는 20세기 전반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족보는 공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사적인 문서로만 간주되었기 때문에 조작이 더욱 용이해졌다.

 

당시 전국 각지에는 가문의 계승 관계를 위조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으며, 이를 보다 못한 식자(識者)들은 족보의 위조 행위를 이기심에 가득 찬 패륜적(悖倫的) 행위라고 비판했다.

 

20세기 초 호남지방에서 증산교(甑山敎)를 개창하여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강일순(姜一淳, 1871~1909년) 같은 이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엄중한 충고나 질책도 어떻게 해서든지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자 하는 시대적 풍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20세기 후반까지도 족보 만들기 열풍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형사네, 경상도의 노비 일가들이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족보에 끼이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염원은 최선생과 민선생 같은 역사학도들에게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역사상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족보로 표현된 허위의식의 해독이 심각하다 하겠다.

 

그러면 18세기 이후 한국에서 간행된 족보는 모두 거짓으로 가득 찬, 믿을 수 없는 기록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족보 가운데는 진실된 부분도 없지 않다. 물론 족보에서 진실과 거짓을 뚜렷이 구별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족보를 자료로 이용하는 연구자가 다른 역사 자료들과 조심성 있게 비교한다면, 풀어내지 못할 문제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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