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잘못 알고 있는 청운교. 백운교

야촌(1) 2013. 3. 30. 02:37

■청운교 백운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토함산(吐含山) 줄기를 잘라 남향으로 높은 석단(石壇)을 만들고 이 석단 위에 조성한 절이 불국사이다.

이 석단 전면(前面)의 동,서쪽 두 군데에 석계(石階)를 가설하여 불국토(佛國土)에 오르도록 하였다.

 

불국사의 특징은 바로 불국세계와 중생세계를 나누어 놓은 대석단에 있다.

대석단은 전체적으로 보아 2단 구조로 석단의 아래는 중생의 세계요 석단의 위는 불국의 세계이며 이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백운 청운라는 다리와 연화 칠보라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이 석단에서 동쪽에 있는 자하문으로 오르는 석계단이 국보 23호인 백운교 청운교이고, 서쪽 안양문으로 오르는 석계단이 연화교 칠보교이다

 

● 청운교 백운교의 이름을 바꾸어 알고 있다.

 

 

↑얼마전(2011년)까지 세워져 있었던 안내판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쪽에 있는 2단의 석계단 중에서 밑의 것을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을 백운교(白雲橋)라고 알고 있다.

학자들이 쓴 가이드북에도 그렇게 소개돼 있다.

 

문화재 해설사들도 청운은 푸른 구름이라 젊음을 뜻하며 백운은 늙음을 뜻하여 점차 늙어서 극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청운교-백운교- 자하문>의 순서라고 이야기 한다. 심지어 얼마전까지는 백운교 청운교 앞 안내판에도 그렇게 적혀있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러나 이는 잘못 알고 있는 사실로 아랫쪽이 백운교, 윗쪽이 청운교이다.

 

 

 

불국사의 역사를 기록한 18세기말의 ‘불국사 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엔 돌계단다리와 자하문의 순서를 <자하문-청운교-백운교>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세기 조선 유학자 박종(朴琮)도 기행문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위의 돌계단 다리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라고 적었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불국사를 정비했을 때의 설계도에도 윗쪽이 청운교, 아랫쪽이 백운교라고 적혀 있다

숭례문을 복원한 대목수 신영훈님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올라가는 순서를 중시하나 옛사람들은 대문을 나선 뒤의 순서를 중요시 하였으므로 따라서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문을 들어가는 시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옛 사람들은 문을 나가기 위한 시설로 여겼다.” 고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청이나 불국사의 안내판에 '아래를 17계단의 청운교, 위를 16계단의 백운교'라고 소개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지금은 수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수정된 문화재청의 설명문중 일부분이다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8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생략)

 

그러나 수정된 설명문에도 틀린 부분이 있어 정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각도가 30°인 백운교 ↑각도를 45°로 줄여본 모습

 

1.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라고 적어 놓았는데 45°가 아닌 30°가 맞는 표현이다

2. '18단의 청운교'가 아니고 '16단의 청운교'이며 '16단의 백운교'가 아니고 '18단의 백운교'이다.

    계단의 수를 바꾸어 적었다. 뿐만 아니라 근거가 없는 거슬리는 표현도 보인다.

 

 

<청운교를 푸른 청년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귀절

이 있는데 이는 학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추상적인 표현일뿐이다.

 

그럼, 그 옆 안양문 앞의 국보 22호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는 어떠한가. 불국사 안내판 등은 모두 아래쪽이 연화교, 위쪽이 칠보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는 옳다. ‘불국사 고금창기’에 안양문-칠보교-연화교 순으로 적혀 있고 실제로 아래쪽 계단에는 계단마다 큼직한 연닢이 조각되어 있어 연화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백운교는 높이 3.82m·너비 5.11m이며, 청운교는 높이 3.15m·너비 5.09m이다.

 

● 청운교 백운교의 계단 수는 33개가 아닌 34개이다.

 

 

↑아래 백운교 18계단, 위 청운교가 16계단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아래로는 청년의 모습을 상징하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을 빗댄 16단의 백운교가 있어 이는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은 모두 33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함을 표현한 것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또 어떤 설명에는 백운교(白雲橋)는 18계단이고 청운교(靑雲橋) 15계단이라고 하여 역시 33계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의 숫자는 이와 다르다. 아래 백운교는 18계단, 위의 청운교는 16계단 해서 모두 34계단이다.

 

그럼 왜 34계단이 33계단이라는 숫자로 바뀌었을까?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지만 경전에 나오는 33 도리천 이야기를 적용시켜 설명하다보니 생겨난 숫자가 아닐까?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수미산의 정상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 각각 8개의 하늘이 있고 중앙에 제석천이라는 1개의 하늘이 있어 모두 33개의 하늘을 도리천이라고 한다.

 

가운데 하늘의 제석천왕은 인간세상의 죄와 복을 다스리며 도리천에 머물면서 사천왕들로부터 죄와 복에 대해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33이란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불국의 나라 불국사를 설명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리천 이야기가 나오고 33이란 숫자가 백운교 청운교 34계단 숫자와 비슷하니 하나를 줄여 스토리텔링화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짜피 계단에 올라가서 하나하나 세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백운교 청운교의 구조에 대하여 몇가지 알아보자

 

●백운교 홍예는 이중구조

 

 

↑백운교의 홍예

 

청운․백운교의 층층다리 받침대와 벽석과의 사이에 통로가 열려 있고 통로 상부에 홍예(虹霓․아치)를 틀어 마감하였다.

청운교와 벽석 사이의 통로와 홍예는 좁고 백운교와 벽석 사이에 열린 통로와 홍예는 넓은 편이다.

 

이들 홍예 구조법은 석빙고(石氷庫)의 천장구조와 유사한데 골격이 되는 홍예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 있는 홍예와는 달리 불국사 백운교의 홍예는 아주 독특한 모습이다.

 

불국사 홍예는 전 세계에 둘도 없는 2중구조로 된 홍예이다. 자세하게 보면 작은 돌을 다듬어 “속틀홍예종석”을 만들고 그 위에 3개의 돌로 구성된 “겉틀홍예종석”을 만들어 덮었다.

 

 

↑이중 구조의 홍예 - 겉틀은 불국사의 홍예에만 있는 특별한 구조이다.

 

석빙고 모양의 홍예를 속틀이라 하고 마구리에 해당하는 속틀 외곽에 또 하나의 홍예석이 보이는 것을 겉틀이라고 하는데 속틀은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완성시킨 것인데 비하여 겉틀은 좌우로 한 돌씩을 반달같이 다듬어 틀어 올린 간결한 구조로 속틀과 겉틀, 이렇게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홍예는 불국사 외에는 없는 것으로 <불국사형 홍예>라고 규정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창의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속틀 홍예는 여느 홍예에서 처럼 작은 돌 여러 개를 반원(半圓)의 둥근 선에 따라 축조하였다.

 

이때 홍예 돌은 위쪽이 넓고 아래가 좁다. 그래야 바깥 지름의 넓은 선과 안쪽 지름의 좁은 선을 일치시킬 수 있게 되며 위가 넓고 밑이 좁은 역사다리 꼴의 예종석(虹霓宗石)이라는 마룻돌을 정상부에 꽂아 넣음으로써 아치는 무너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불변하지 않는 기법이다

 

백운교의 홍예 바깥쪽에 또 하나의 홍예, 즉 겉틀홍예의 정상부에도 홍예종석이 있다. 여기의 홍예종석은 속틀의 홍예종석과는 반대로 밑 부분이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중의 홍예를 만들므로 해서 상부의 무게를 분산시켜 견고성을 높이고 지진 등으로 인한 흔들림에 더욱 신

축성을 발휘하여 내구성을 높이며 미적 장식성을 가미한 독특한 구조물인 것이다.

 

홍예다리 중앙에 걸리는 힘은 “겉틀홍예종석”의 “마름모꼴모양의 종석”을 통해 속틀홍예종석으로 분산되고, 다리

양쪽에 걸리는 힘은 겉틀홍예종석의 “좌우종석”으로 분산됨으로서 홍예다리 전체로는 항상 일정한 힘을 받게 된다.

이처럼 2중구조로서 홍예다리에 걸리는 힘을 분산시켜 천년 세월을 견뎌 온 비결(秘訣)이기도 한 것이다.

 

●피타고라스 정의가 내포된 백운교 청운교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청의 설명문이다. 그러나 백운 청운교의 경사(기울기)는 45°가 아닌 30°이다.

 

 

↑백운교의 각도

 

내각의 합이 180도이고 변의 길이 3:4:5의 비율이 가장 안정적인 삼각형, 이것이 피타고라스의 정의이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을 a 와 b, 빗변을 c라 할 때 a2+b2=c2이다. 백운교의 비 3 : 4 : 5에

서도32+42=52 인 관계가 성립한다.

 

백운교, 청운교를 옆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모양이고 높이와 폭과 계단의 길이를 간단한 비로 나타내면 약 3 : 4 : 5가

되며 내각의 합이 180도이다. 이는 피타고라스 정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 시대에 어떻게 「피타고라스정의」를 알았을까?

 

당시에는 인도와는 물론 “피타고라스”가 살았던 희랍과의 교류가 있었고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 '피타고라스 정의'가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깨치고 터득한

지혜일 수도 있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나오기 5백년전 중국의 수학책 '주비산경(周脾算經)'에는 <구(勾-넓적다리)를 3, 고(股-정강이)

를 4라고 할때 현(弦-넓적다리와 정강이를 직각으로 했을 때 엉덩이 아래 부분에서 발뒤꿈치까지)은 5가 된다>고 "

구고현(勾股弦)의 정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직각삼각형에서는 밑변이 ‘구’, 높이가 ‘고’, 빗변이 ‘현’이 된다.

이것은 피타고라스 정의와 같은 것으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수많은 증명 중 가장 간결하고 우아한 증명의 하

나로 알려져 있다.

 

“구고현(勾股弦)”은 우리의 신체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신체구조에서 무릎을 90도로 구부리면 발뒤꿈치-

무릎-엉치뼈로 만들어지는 직삼각형이 3:4:5의 비례가 된다. 이처럼 돌계단 하나에도 인체구조와 수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눈썹지붕(눈썹돌)의 역할은?

 

 

↑동그라미 속의 지붕처럼 생긴 돌이 눈썹지붕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연결하는 홍예의 좌우 모서리는 곡선(曲線)과 직선(直線)이 만나는 곳이어서 깔끔하게 마무리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곳이다. 홍예틀 위로 처마곡선까지 날씬하게 생긴 눈썹지붕이 올라앉았다.

 

눈썹지붕은 홍예석(虹霓石) 위에 설치한 첨차석(檐遮石)으로 선반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로 지붕을 선반널처럼

올려놓은 것이다.

 

지붕의 유연한 곡선까지를 함축시켜서 멋이 잔뜩한 지붕형의 받침대인데, 그렇게 얇고 날씬하게 만들면서도 눈썹

지붕 위로 돌난간의 앉은뱅이 난간 동자를 자신 있게 올려 세우고 둥근 동난대를 건너질렀다.

 

이런 눈썹지붕은 이곳 말고도 청운교와 자하문 석대의 벽석과 연결되는 부분의 좌우에도 만들어져 있다.

자하문에서 내려다보면, 맞배지붕의 빗물 흐르는 지붕 골의 물매곡선을 보는 듯이 위로부터 흘러내리던 선이 앞에

서 약간 들리면서 곡선을 형성하였는데, 탑의 지붕이나 기단 갑석에서와 같은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홍예 위의 눈썹지붕 ↑자하문 아래의 눈썹지붕

 

이 눈썹지붕(눈썹돌)의 역할은 무엇일까?

마치 맞배지붕이 연상되는 눈썹지붕은 낙숫물이 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유연한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하문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을 하면서 팔작기와지붕이 되었지만 신라시대라면 맞배지붕의 구조일 가능성

이 높다.

 

이 자하문 지붕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리면 기왓골에 모여 떨어지는 물줄기는 무겁다.

오랜 세월 한 자리에 낙숫물이 떨어지다보면 땅이 패이게 된다. 또한 집중되는 낙숫물이 벽석 발 밑을 파헤치거나 물이 스며들면 침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눈썹지붕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하문 추녀에서 눈썹지붕 위로 떨어진 낙숫물은 사방으로 튀어 흩어지므로 땅바닥이 패어지는 것을 방지하게 되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미적구성으로 승화시킨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