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목은 이색 가족묘역

야촌(1) 2011. 1. 16. 03:08

목은 이색선생 묘(충남 기념물 제89호)ㅣ소재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산1-1

 

 

 

 

 

 

 

↑이색선생 묘역 내의 석물들고려 후기의 문인이며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색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묘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 한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 무덤 앞에는 망주석·문인상·마상(馬像)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서 있다. 비는 단순한 형태이며 앞면에 ‘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헌서원 입구에 있는 재실

 

  ↑서원 앞에 위치한 이색선생 신도비

 

 ↑문헌서원 좌측을 지나면 목은 묘역이 멀리 보입니다.

 

↑묘역 입구에 세워진 이색의 아들 양경공 이종선(李種善) 묘갈비.

 

1368(공민왕 17)∼1438(세종 2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색(穡)의 아들로 권근(權近)의 사위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을때, 3년상의 여묘살이를 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려었다.

 

설히에 5남을 두었는데,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개(塏)는 공의 손자이고 토정(土亭) 지함(之菡)른 공의 5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산해(山海)는 공의 6대손이된다. 이 양경공의 가문에서 란산이씨를 대표하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앞의 봉분은 목은의 셋째 아들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의 묘이고, 뒤의 봉분이 이색선생 묘입니다.

  목은의 장남 문양공 이종덕(李種德)과 차남 인제공 이종학(李種學)의 묘는 이북의 경기도 장단에 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목은의 셋째 아들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의 묘입니다.

 

↑정면 가까이에서 바라본 목은의 셋째 아들 양경공(良景公) 종선(種善)의 묘입니다.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의 묘비입니다. 

 

 양경공(良景公)의 묘 문인석입니다. 

 

↑문헌서원 우측 산자락에 위치한 이색선생의 부인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묘역 후경이다.

   아래의 봉분이 부인 묘이고, 뒤의 봉분은 목은의 조부 이자성(李自成)선생의 묘이다. 

 

↑문헌서원(文獻書院) 우측 산자락으로 오르면 목은의 부인 안동권씨 묘역이 나타 납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목은의 부인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묘이고, 뒤의 봉분은 목은의 조부 이자성(李自成)선생의 묘입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목은의 부인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묘입니다.   

 

↑목은의 조부 이자성(李自成) 선생의 묘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목은의 조부 이자성(李自成) 선생의 묘입니다.

--------------------------------------------------------------------------------------------------------------------------------------

 

문헌서원(文獻書院)

 

문헌서원(文獻書院)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누각으로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當), 3칸의 목은영당(牧隱影堂),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습니다.

 

사우에는 이색, 이곡을 주벽(主壁)으로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인 진수당은 유림의 화합 및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장소로 수호사는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하며, 목은 영당에는 이색의 영정이 봉안 되어있다.

 

●소 재 지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화재지정 :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1984.05.17지정)         

  ◇목은이색영정-보물 제1215호(1995.03.10지정)                        

  ◇가정. 목은선생문집판-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77호(1978.03.31지정)

  ◇목은선생신도비-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7호(1984.05.17지정)

 

●배향인물 : 이 곡(李 穀). 이색(李穡). 이종덕(李種德). 이종학(李種學). 이자(李耔). 이개(李塏)

●창건연도: 1594년(선조 27)

●사액연도: 1611년(광해군 3)

●향 사 일: 3월, 9월 중정(中丁 

 

 

 

 

 

 

 

 

 

 

 

 

 

 

● 배향인물 소개 

 

1)주벽-이곡(李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고려말의 학자로,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증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이고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였고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이 되어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귀국하여 정당문학이 되고 후에 한산군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삼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동문선에는 100 여편의 그의 작품이 수록되 있고, 유고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 호는 목은(牧隱),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문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의 한 사람.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4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1353년(공민왕 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1367년(우왕 3)에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저서에 목은문고 목은시고(牧隱詩藁)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이종덕(李種德, 1350년(충정왕 2)-1388년(우왕 14,)

 

본관은 한산, 자는 덕성, 호는 현암(玄巖) 또는 삼당(三堂)이라고도 하였다.

이색의 장자로 문과에 장원하고 1373년(공민왕 22) 나이 24세때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그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에 이르렀다.

 

1387년(우왕 13)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1388년 이성계의 위와도 회군후 아버지 목은이 창왕을 세운일로 장형을 맞고 죽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4)이종학(李種學, 1361(공민왕 10)~1392(태조 1)

 

본관은 한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이색의 아들로 개경 한천동(寒泉洞)에서 태어났다.

1374년(공민왕 23) 14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1376년(우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 되고,. 창왕 1년 동지공사를 겸하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아버지가 탄핵을 받아 함께 파직되었다.

 

공양왕 2년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함께 청주에 투옥되었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으나 1392년 다시 함창(咸昌)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살해되었다. 저서로 인재유고(麟齋遺稿)가 있다.

 

5)이자(李耔 , 1480(성종 11)∼1533(중종 28).

 

본관은 한산,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몽옹(夢翁)․ 계옹(溪翁)이며 이색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사마시를 거쳐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아래에서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6)이개(李塏, 1417(태종 17)∼1456(세조2).

 

본관은 한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청보(淸甫)․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으로,  이색의 증손이고 조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고,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1436년(세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의 국문을 당해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나홀로테마여행.   한국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