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송처사이공묘갈명 병서
(隱松處士李公墓碣銘幷書)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지가 폐색(閉塞)하면 어진사람이 숨는다 하였고,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겨울이 차가운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아니함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두 말씀이 대개 서로 발전시키는 것으로 선비가 쇠퇴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처신하려면 당연히 취하여 본 받을 바이다.
이공(公)의 휘(諱)는 영우(英雨)이시고 자(字)는 문칙(文則)으로 평생에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호(號)를 은송(隱松)이라 하셨으니 대개 뜻이 향하는 것을 알겠도다.
공(公)은 경주이씨(慶州李氏)요.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선생 제현(齊賢)의 후손이시다. 조선조(朝鮮朝)에 예조좌랑(禮曹佐郞) 재사당(再思堂) 원(黿)께서는 김점필재(金佔畢齋) 선생의 제자(第子)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하셨고, 충익공(忠翼公) 벽오(碧梧) 시발(時發)께서는 선조대왕(宣祖大王)때 명신(名臣)이시다.
이 분이 증 예조참의 행 남포현감 휘 경선(慶善)을 낳으시니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여 정문(旌門)과 증직(贈職)을 내리는 은전이 있었으니 이 분이 공의 구대조(九代祖)이시다. 진사공([進士公) 죽창(竹窓) 성일(聖一)에 이르러 비로소 고령(高靈)으로 오셔서 이로부터 고령사람이 되었다.
육대(六代)를 전하여 증조는 복영(復榮)이시고 조고 규남(圭南)께서는 태영(泰榮)의 외아들로 백부(伯父)에게 입계(入繼)하여 그분의 차자(次子) 종기(鍾基)가 돌아와 본 생가(生家)의 제사를 받들게 되니 바로 공(公)의 선고(先考)이시고 선비(先妣)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치관(致寬)의 따님이시다.
공(公) 께서는 영리한 자질과 독실한 뜻이 있어 어릴적 부터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를 많이 보고 더욱 주역의 이치에 깊었으며, 또한 지리와 점술의 학설도 연구하여 그 오묘한 것을 많이 얻으셨다.
말년에는 세상이 크게 변함을 보고는 양전(陽田)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중가곡(中佳谷) 깊은 곳으로 들어와 한집을 지어 숨어서 수양하는 곳을 삼았으며, 문을 닫고 종적을 숨겨 상수(象數>만물의 형상과 수확)의 오묘한 이치를 고요히 연구하며 발자취가 산밖에 나가는 것이 드무니 이것이 은송(隱松)이라는 현판을 쓴 이유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가운데 쌓여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공의 성품이 순박하고 너그러워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과 선대를 받들고 일가를 사랑하는 사업이 가히 기록할만한 것이 많았다. 평생에 저술한 것은 수습하지 아니하여 가정에 전하는 것은 약간 뿐이라 한다. 철종 계축(1853년)년에 출생하여 회갑년(回甲年) 삼월 이십일에 별세하시니 중가곡(中佳谷) 안산(案山) 곤좌(坤坐) 언덕에 안장되셨다.
배위(配位)는 성산전씨(星山全氏) 석일(錫一)의 따님으로 공(公)보다 일 년 앞에 출생하여 구년 먼저 별세(1905년) 하시니 따로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忠淸南道 錦山郡 濟原面 川內三里) 진좌(辰坐) 언덕에 안장되셨다.
사남(四男)을 두셨으니 상영(相永). 상렬(相烈). 상목(相穆). 상길(相吉)이요. 손남(孫男)은 장방(長房-큰아들)에 종희(宗熙). 완희(完熙). 근희(根熙)이고, 이방(二房-둘째아들)에 경희(敬熙)이고, 삼방(三房)에 양희(陽熙)이고, 사방(四房)에 태희(台熙). 재희(載熙). 수희(秀熙). 월희(月熙)이며, 손녀와 또 이하는 아울러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公)이 별세한 후 육십 여년에 그 손자 완희(完熙)가 행장(行狀)을 안고 와서 공의 묘소에 내가 비문(碑文) 짓기를 청하거늘 내가 늙고 혼미하였다고 사양하니 요청함이 더욱 간절하여 그만두지 못하고 이에 명(銘)하노니,
입을 다무는 것이 죄가 없다는 것은 주역에 나타나고,
시들지 않는 절개는 홀로 소나무를 창찬 하였으니
공(公)이 은송(隱松)이라고 호(號)를 하여 뜻을 의탁하고
종적(蹤迹)을 같이 하신 것은 그 길이 무엇을 연유하셨는가!?
주역(周易)을 읽는 공이시다.
학문(學文)은 비록 전함이 없으나 자취는 오히려 따를 만 하도다.
가곡(佳谷)에 묘소가 있으니 영원히 높으리라.
단기 4312년(1979) 기미(己未) 4월 일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짓고,
진양(晉陽) 하병우(河柄祐) 글을 쓰다.
{증손서)
原文草稿[秋淵先生文集 第四十券]
◇추연(秋淵)선생 호는 화산(花山)이라고도 함
秋淵文集(權龍鉉 著)/秋淵文集 第40卷(草稿)
↑은송정(隱松亭=은송처사 재실)
●은송정 운(隱松亭韻)
지은이 : 장손 종희(長孫 宗熙)
사모하던 나머지 은송정을 늦게 지어 / 慕餘晩築隱松亭(모여만축은송정)
우리조부 평생에 글 읽어 시경을 좋아하셨다 / 我祖平生好讀經(아조평생호독경)
백수로는 초야에 의지함이 무방하고 / 白首無放依草野(백수무방의초야)
청운(벼슬길)은 이미 사절하여, 조정과는 멀 도다 / 靑雲已謝遠朝廷(청운이사원조정)
낙동강이 앞에 있어 띠와 같이 둘렀고 / 當前洛水回如帶(당전락수회여대)
가야산이 뒤에 있어 병풍처럼 섯도다 / 在後伽山立似屛(재후가산립사병)
부귀와 흥망사를 어찌 관계 하리오 / 何關富貴興亡事(하관부귀흥망사)
티끌에 오염 없이 홀로 깨어 계셨네 / 不染世塵獨了醒(불염세진독료성)
불초한 손자 종희는 느껴 읊다 / 不肖孫宗熙感吟(불초손종희감음)
↑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 산69-1(안산)
↑은송 처사 묘비(墓碑)
●배위 성산전씨 묘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忠淸南道 錦山郡 濟原面 川內三里) 진좌(辰坐)
↑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 앞에 보이는 다리가 제원교이다.
↑위의 사진은 2013. 03. 27(수) 필자가 성묘차 촬영한 것임.
성묘는 서울에서 필자 내외와 동생 그리고 대구에서 필자의 중씨와 제종제(再從弟)인 재곤 父子가 현지에서 만나 함께 참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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