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형조판서 이규팽 묘갈명

야촌(1) 2012. 3. 6. 17:03

형조판서 이공 묘갈명(刑曹判書李公墓碣銘)

[생졸년] 1791년(정조 15) ~ 1855년(철종 6)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순조(純祖) 정해년(1827)에 왕세자[翼宗]가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였는데, 왕세자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날마다 궁료(宮僚)1) 관원(官員)에게 나아가 종횡(縱橫)으로 강론(講論)하여 설명하였으니, 중명리정(重明麗正)의 교화(敎化)2)를 이룬 것이다.

 

세자가 궁료 관원을 논할 때면 항상 이규팽(李圭祊)의 충직(忠直)함을 일컫고, 차고 있던 장식물을 풀어서 하사하였다. 이에 연신(筵臣)3)이 하례(賀禮)하기를 “이(李) 아무개는 사람됨이 충후(忠厚)하니, 마땅히 보도(輔導: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감)하는 책무(責務)를 맡겨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이로부터 강연(講筵)4)에 참석하여 개발(開發)하고 계옥(啓沃)5)함을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상서(尙書)?를 강론할 때는 ‘깊은 연못가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듯 한다’6)는 말로써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을 진언(陳言)하기를 “민심(民心)이 위태로운 것은 물이 험한 낭떠러지에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크고 큰 기업(基業)’7)이란 말로써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역복(歷服)8)을 일으키고 바루는 도리를 권면(勸勉)하였다. 금원(禁苑:대궐 안의 후원)에 의두합(依斗閤)을 건립(建立)하였을 때 여러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하여금 「십경시(十景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유독 공(公)의 작품만 뽑아 인쇄하여 게시(揭示)하고 여러 차례 금품을 하사하였다.

 

공(公)은 벼슬이 빨리 높아지고 은택이 날로 두터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해군(海郡)9)으로 나가기를 극력 청하였다. 당시에 권신(權臣)이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굴자, 공(公)이 말하길 “소인배가 사람과 집안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것은 마치 쌓인 질병이 사람의 심장과 배를 해치는 것과 같다. 몸이 죽으면 쌓인 질병도 따라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권신이 아전 자리를 부탁하여 편지가 열두 번이나 왔는데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원망하고 관찰사를 사주하여 논평(論評)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그 권신이 과연 폐출되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을 때는, 대체(大體)를 지키고 미세한 일은 생략하였으며, 무기를 수선하고 무예(武藝)를 장려하여 변방을 견고하게 하였다. 책세(柵稅) 6만금(萬金)을 탁지(度支:財政)의 비용에 보태고 2만금으로 많은 폐단을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뒷날 사신 가는 일로 변경에 이르니, 백성들이 앞다퉈 와서 가마를 메었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을 때는, 모곡(耗穀)10)을 덧붙여 받는 폐단을 막고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데 드는 경비를 저축하였다. 또한 선비를 양성하는 데 봉급을 덜어 보태기도 하였고, 사신을 접대할 때는 규식(規式)을 따랐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서 법을 어기는 자는 죄를 주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간사한 아전들을 엄하게 다스리니, 온 고을 안이 편안하고 조용해졌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공(公)이 베푼 은혜를 주철(鑄鐵)에 기록하였다.

 

형조(刑曹)에 있을 때, 서울과 지방의 옥안(獄案:옥사를 조사한 서류)을 심리(審理)11)하였는데, “사람의 목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신중하게 잘 살피도록 하라.”고 말하여, 처음보다 죄를 가볍게 해준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관상감(觀象監)의 생도(生徒)가 증액(增額)하는 일을 지시한 줄로 잘못 알아듣고 주기(奏記)12)를 위조(僞造)했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공(公)이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실상을 캐내어 옳고 그름을 따져 판결하니, 모두가 ‘공(公)이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다’고 일컬었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평안감사(平安監司)로 나가니, 호세(豪勢)와 횡포를 부리던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국경을 넘어갔고, 교활한 아전들은 두려워 벌벌 떨며 스스로 조심하였다. 장차 소당(召棠)13)의 교화(敎化)를 보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 공(公)은 타고난 성품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였으며, 훌륭한 태도와 풍채는 남보다 뛰어났고, 엄숙하고 장중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아랫사람을 통솔하고 지도할 때에 법도가 있어 일찍이 좋은 말과 낯빛을 보인 적이 없었고, 자제(子弟)들이 옷과 띠를 갖추지 않으면 감히 공(公)을 뵙지 못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간결하고 엄중하며 과묵(寡黙)하였으나 태도는 온화하였다. 노비 같은 천한 자에게도 반드시 모두 환심을 얻었으며, 잘못이 있으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였으니, 그 포용함이 이와 같았다.

 

벼슬에 올라 30년 동안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마음을 다해 공직(公職)에 종사하였다. 두루 자세히 살필 때는 사람들이 감히 속이거나 은폐하지 못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는 일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권세(權勢)에 뜻을 빼앗기지 않고 아첨하고 좋아함에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 공(公)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절조(節操)였으나, 철종(哲宗)에게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다.

 

항상 임금에게 몸 바쳐 충성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뜻을 품었는데 경인년(순조 30년, 1830) 이후로는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서 자취를 거둔 지 거의 10여 년이 되었고 또한 공(公)이 지키는 바가 확고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점차 큰 벼슬에 등용되면서 현달(顯達)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몸을 지켜 염퇴(恬退)14)하려는 생각이 있어, 진추(鎭楸)에 집을 마련하고 친척들과 기쁘게 지내며 산수(山水)를 소요(逍遙)하여, 장차 몸을 마칠 때까지 그러할 듯이 하였다.

 

그리고 삼세대(三世代) 일곱 묘(墓)를 청안현(淸安縣) 한 지역으로 옮겨, 성묘(省墓)와 소분(掃墳)을 편하게 하고는 “취골(聚骨)”15)이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약을 거절하며 “명(命)이 길고 짧은 것은 일정한 한도가 있는 것이다.”라 하고는 박장(薄葬)으로 하여 모든 절차를 줄이고 간소하게 할 것을 훈계하고, 조금도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옛날에 ‘너그럽고 즐겁게 잘 마쳤다’는 것이 이것이다.

 

공(公)은 순조(純祖) 계미년(1823, 33세)에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전례에 따라 전적(典籍)16)이란 벼슬을 받았다. 그 뒤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이 되었으며, 어영청 종사관(御營廳從事官)에 임명되었다.

 

병술년에 지평(持平)· 문학(文學)에 제수되고 홍문록(弘文祿)17)에 뽑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그 뒤 겸필선(兼弼善)· 종부시정(宗簿寺正)· 부응교(副應敎)·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고, 상례(相禮)18)를 맡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정해년에 원자(元子)의 탄강을 진하(陳賀)할 때 차비관(差備官)으로 공로가 있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그 뒤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되고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를 겸직하였으며, 겸보덕(兼輔德)· 보덕(輔德)· 필선(弼善)에 첨서(添書)19)로 임명되었다.

 

무자년에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제수되고, 신묘년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병신년에 좌승지(左承旨)·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경자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천거되어 제수되고, 신축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소환(召還)되었다.

 

임인년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공로가 있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호·병조참판(戶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제수되었다.

 

계묘년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그 뒤 황해감사(黃海監司)에 제수되었는데 하찮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바로 잉임(仍任)되었다. 조정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전의감 제조(典醫監提調)를 지냈다.

 

기유년(1849)에 철종(哲宗)이 즉위(卽位)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으며,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를 지내고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진주변무부사(進奏辨誣副使)로 연경(燕京)에 가서 요청한 것을 허락 받고 돌아와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 대사헌(大司憲)· 지경연사(知經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에 임명되었다. 계축년에 광주유수(廣州留守)에 천거되어 제수되고, 을묘년에 옥책(玉冊)20)을 써 올리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그 뒤 이조판서(吏曹判書)의 후보자로 추천되고, 여름에 평안감사(平安監司)에 제수되었다.

 

공(公)은 자(字)가 현보(玄甫)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태사(太師)인 알평(謁平)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경주 이씨의 비조(鼻祖)이다.

 

고려조에 휘(諱) 제현(齊賢)이 있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며 호(號)는 익재(益齋)이다. 우리 조선조에 휘(諱) 원(黿)이 있는데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으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사대(四代)를 내려와 휘(諱) 시발(時發)은 오도찬획사(五道贊畫使)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호는 벽오(碧梧)이다. 이 분이 낳은 휘(諱) 경억(慶億)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호는 화곡(華谷)이다. 이분들이 바로 공(公)의 8대조(代祖)와 7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諱)가 석로(錫老)인데 감역(監役)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증조는 휘가 진원(進源)인데 감역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휘가 집두(集斗)인데, 판돈녕 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고 호는 파서(琶西)이다. 고(考)는 휘가 일영(一榮)인데 판관(判官)을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창녕 조씨(昌寧趙氏) 윤량(允亮)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증정부인(贈貞夫人)으로 파평 윤씨(坡平尹氏) 진사(進士) 면철(勉喆)의 따님이다. 또 계비는 증정부인으로 양성 이씨(陽城李氏) 응오(應五)의 따님이다.

 

공(公)은 정종(正宗) 신해년(1791)에 태어났는데 조부인(趙夫人)이 낳았다. 4세 때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담벽증(痰癖證)을 앓아 중완(中脘)에 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공(公)의 안색이 태연자약하였으므로 파서공(琶西公)이 기특하게 여겼다.

 

7세 때 윤부인(尹夫人) 상(喪)을 당하여 이부인(李夫人)에게 양육되었는데, 공(公)이 이부인에게 정성과 공경함을 지극히 갖추었다. 무진년과 계사년에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에 예를 다하였는데 몹시 슬퍼한 끝에 병이 들었으며, 기일(忌日)을 만나면 애통해 하고 사모하기를 처음 상(喪)을 당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을묘년(1855)에 별세하였는데 향년 65세였다. 청안(淸安) 시화(時化)에 있는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 숙(潚)의 따님이다.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시부모를 섬겨 지극히 공경하였다. 경술년에 출생하여 경오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公)의 묘지에 합장하였다.

 

계배(繼配:後室)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전주 최씨(全州崔氏) 재수(在洙)의 따님이다. 을축년에 출생하였으며, 근검(勤儉)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아들은 교중(敎重)인데 승지(承旨) 윤자경(尹滋畊)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교중이 일찍 세상을 떠나, 족형(族兄) 해중(海重)의 아들 용우(龍雨)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용우는 지금 정언(正言) 벼슬에 있다. 측출(側出) 아들은 효중(斅重)인데 서제(庶弟)인 규호(圭祜)의 후사가 되었다.

 

세상에서 공(公)을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세덕(世德: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미덕)을 헤아린다. 공(公)이 집안에 거처할 때는 엄숙하였고 벼슬길에 있을 때는 성실한 자세로 임했다. 몸가짐은 검약(儉約)하였고 일을 다스림은 공평(公平)하였다.

 

서쪽 변방(의주부윤 재직시)에 있을 때 8만금(萬金)을 기부한 일은 화곡공(華谷公: 李慶億)이 수백 섬[斛]의 곡식을 흩어준 일과 같고, 해군(海郡: 안악군)에서 12통의 편지를 물리친 것은 노포공(老圃公:李寅熽)이 70통의 편지를 거절한 일21)과 같으며, 궁궐을 읊은 십경시(十景詩)는 파서공(琶西公: 李集斗)이 「만천명월주인옹자서」를 써 올린 것과 유사하다. 그러니 공(公) 같은 이는 선조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했다고 이를 만하다.

 

나[李裕元]는 공(公)과 동족(同族)이다. 오래 전에 죽서(竹西)의 옛집에서 공(公)을 뵈었다. 그 때 공(公)이 새로 손자 용우(龍雨)를 얻고, 그로 하여금 나와서 나에게 절하게 하고는 그를 부탁하였다.

 

공(公)이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되었다. 용우가 공(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친족 중에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분들을 찾아가 옛일을 묻고 조사하여 손수 세 세대(世代)의 행장을 짓고,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여 오래도록 전하길 도모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公)의 아홉 세대에 대한 10편의 묘갈명을 썼다. 이는 모두 용우(龍雨)가 현명하여 가능했던 것이며, 이로써 공(公)이 앞서 우선했던 가르침을 알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은 / 東方大族。

신라에서 시작된 경주이씨 / 鷄林之李。

 

익재(益齋) 선생(先生) / 益齋先生。

재사당(再思堂) 학사(學士) / 再思學士。

벽오(碧梧)의 공훈 화곡(華谷)의 덕행 / 梧勳華德。

공(公)이 그 아름다움 이어받았네 / 公趾厥美。

 

문과(文科)에 급제하여22) 호명(呼名)되고 / 黃甲唱名。

계미년에 벼슬길이 비로소 열렸네 / 肇闢維癸。

 

서연(書筵)에서 왕세자를 보익(補益)함에 / 冑筵裨益。

오직 공(公)만을 의지하였고 / 惟公是倚。

 

옥사(獄事)를 마땅하게 처리함엔 / 廷尉允當。

오직 공(公)만을 기다렸다네 / 惟公是竢。

 

서쪽 백성을 네 번 다스렸고23) / 四治西民。

남쪽 군영을 한 번 맡아 다스렸네.24) / 一掌南壘。

 

이름은 이조(吏曹)에 남아 있고 / 銓部名留。

베푼 은혜는 철필(鐵筆)로 기록되었네. / 鐵筆惠紀。

 

네 조정에서 은혜롭게 대우하여 / 四朝恩遇。

청색 인끈 보라색 인끈을 차게 되었네.25) / 紆靑拖紫。

 

공(公)의 마음은 더욱 벼슬에서 물러나 / 公心愈退。

시종(始終) 몸을 잘 지키려 하였네. / 克守終始。

 

괴극(槐棘)25)을 활보(闊步)하고 / 大步槐棘。

패옥(佩玉) 울리며 검리(釼履)26)함이 / 鳴珮釼履。

거의 있을 만하였는데 / 庶幾有之。

 

어찌하여 운수가 막혔는가 / 胡運之否。

진추(鎭楸) 동쪽의 산수(山水)는 / 鎭東泉石。

공(公)이 터를 개척한 곳 / 公之拓址。

 

청안 북면의 좋은 언덕은 / 淸北吉岡。

공(公)이 복을 기르는 곳 / 公之毓祉。

 

남은 복을 남겨 주어 / 留餘以遺。

어진 손자가 있다네. / 有肖孫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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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궁료(宮僚) : 시강원(侍講院)에 속한 보덕(輔德) 이하의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2)중명리정(重明麗正)의 교화(敎化) : 중명리정(重明麗正)은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단전(彖傳)의 “거듭 밝

   음으로 바름[正]에 붙어서 천하를 교화하여 이룬다.(重明, 以麗乎正, 乃化成天下.)”는 말을 줄인 것이다. ‘중명

   (重明)’은 왕세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므로 왕세자가 중정(中正)에 처해 천하를 교화하여 문채 나고 밝

   은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3)연신(筵臣) : 임금에게 경전(經傳)을 강(講)하는 벼슬아치.

 

4)강연(講筵) : 임금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일. 여기서는 대리청정하는 왕세자[翼宗]에게 경서를 강론함을 가리킨

    다.

 

5)계옥(啓沃) : 사심(私心)없이 충성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뢰어 성심껏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6)「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얇은 얼음을 밟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라고 하였다. 여기서 연빙(淵冰)이란 말이 나왔는바, 연빙은 위험

     한 경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상서(尙書)」. 「주서(周書)」「대고(大誥)」에 “나 소자는 깊은 못의 물을 건너

     는 것처럼 근심한다.[予惟小子, 若涉淵水.]는 말도 있다.

 

7)크고 큰 기업(基業) : 「상서(尙書)」.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아! 하늘의 밝은 명(命)이 두려운 이유는 그

   것이 우리의 크고 큰 기업(基業)을 돕기 때문이다.[嗚呼! 天明畏, 弼我丕丕基.]”라고 하였다.

 

8)역복(曆服) : 구원(久遠)한 사업이라는 뜻으로 ‘왕위(王位)’를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에 “끝없이

    큰 역복을 이어받았다.[嗣無疆大歷服]"고 하였다.

 

9)해군(海郡) : 바닷가에 있는 고을[郡]로 황해도에 있는 고을을 가리킨다. 뒤에 언급되듯이 공(公)은 황해도 안악

    군에 군수로 나간 적이 있다.

 

10)모곡(耗穀) : 각 고을의 창고에 저장한 양곡(糧穀)을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 뒤 받아들일 때에

      말이 축나거나 창고에서 자연 손실될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

 

11)심리(審理) :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임금의 명령으로 재심(再審)함.

 

12)주기(奏記) : 문서(文書)를 기록해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일.

 

13)소당(召棠)의 교화(敎化) : 어진 관리로서 아름다운 정사를 펼쳐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주(周) 나

      라 때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甘棠)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고 한다.(「사기

     (史記)」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참조).

 

14)염퇴(恬退) :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

 

15)취골(聚骨) : 한 가족의 무덤을 한 군데의 산에 모아 장사(葬事)함.

 

16)전적(典籍) : 성균관에 속하여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6품 벼슬.

 

17)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와 수찬(修撰)을 선거 임명하던 기록.

 

18)상례(相禮) : 조회(朝會)와 의례(儀禮)를 관장하는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종3품 벼슬.

 

19)첨서(添書) : 첨서낙점(添書落點)과 같다. 즉 관직을 임명할 때 왕이 삼망(三望) 이외의 사람을 첨가 기입하여

      그 이름 위에 점을 찍어 재결하는 것을 말한다.

 

20)옥책(玉冊) : 제왕이나 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

 

21)李裕元, ?嘉梧藁略? 17冊, 墓誌, 「校理贈吏曹判書李公墓誌」에, “(노포공이) 병인년(숙종 12, 1686)에 용인

      현령에 제수되었는데, 토호(土豪) 중에 성(姓)이 윤씨(尹氏)인 자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일로 소송을 제기

      하고, 많은 재신(宰臣)들과 결탁하여 72통의 편지를 얻어 잘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공(公)은 의연(毅然)히 돌아보지 않고, 그를 매질하여 돌려보냈다.[丙寅, 除龍仁縣令. 有土豪尹姓者訟

   非理, 多結卿宰, 得七十二簡而囑之. 公毅然不顧, 榜遣之.]”고 하였다.

 

22)원문의 황갑(黃甲)은 황색 종이에 쓴 과거 갑과(甲科) 급제자의 명단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는 것을 가리킨

      다.

 

23)서쪽 백성을 네 번 다스렸고 : 공(公)이 안악군수·의주부윤·황해감사·평안감사에 제수되어, 네번이나 서쪽 지

      방 백성들을 다스렸던 일을 말한다.

 

24)남쪽 군영을 한 번 맡아 다스렸네 : 남쪽 군영이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던 군영(軍營)인 수어청(守禦廳)을

      가리킨다. 즉 공(公)이 철종 4년(1853)에 광주유수(廣州留守)에 제수되어 남한산성에 있던 수어청의 으뜸 벼

      슬인 수어사(守禦使)의 책임을 맡았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5)청색 인끈 보라색 인끈을 차게 되었네 : 청색과 보라색 인끈을 늘어뜨린 고관(高官)이 되었음을 뜻한다. 즉 한

      (漢) 나라 때 공후(公侯)는 보라색 인끈을 차고 구경(九卿)은 청색 인끈을 찼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6)괴극(槐棘) :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 주(周) 나라 때 조정에 세 그루의 회나무[槐]를 심고 삼공(三公)이

      여기를 향하여 마주 앉고 또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棘]를 심고 구경(九卿)이 그 앞에 앉았다.

 

27)검리(劍履) : 허리에 칼을 그대로 차고 신발을 벗지 않고서 조회한다는 말로 임금의 특별한 은총을 뜻한다. ?사

      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이에 소하(蕭何)의 공을 첫째로 삼아 검리를 그대로 띠고 전폐(殿

      陛)에 오르게 하였다.[于是乃令蕭何第一 賜帶劍履上殿]”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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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刑曹判書李公墓碣銘 - 李裕元 撰

 

純祖丁亥。王世子代理。睿學高明。日進宮僚官。講說縱橫。成重明麗正之化。世子論宮官。常稱李圭祊之忠直。解睿佩賜之。筵臣賀曰。李某爲人忠厚。宜任輔導之責。公自是侍講筵。開發啓沃爲任。講尙書。以若臨淵氷。陳恐懼之意曰。民情之嵒儉。如水之易於阽溺。又以丕丕基。勉敬天愛民歷服興弼之道。禁苑建依斗閤。使諸春坊製進十景詩。獨選公作刊揭。賜與便蕃。公懼官太驟恩日隆。力求出海郡。時柄臣恃寵自恣。公曰。小人之禍人家國。如積聚之病害人心腹。身若歿則積隨銷矣。聽者色變。及其囑吏窠。折簡十二而終不聽。由是大啣之。嗾道臣論評。未幾柄臣果敗。守龍灣。持大軆畧細微。繕戎械奬武藝。以固邊圉。柵稅六萬金。補度支經用。二萬金矯捄衆瘼。後以使事到境。大小民爭來擔轎。按海臬。杜加耗之弊。貯支勅之需。養士而有捐俸。接使而有䂓橅。罪兵梱之不法者。覈奸吏之射利者。闔境寧謐。民鑄鐵紀惠。在秋曹。審理京外獄曰。人命之肯綮也。克愼克察。多所平反。時雲監生。誤聽指使以增額事。僞造奏記。事覺。公當覈實之。鉤情剖斷。咸稱公執法不撓也。承命關西。豪橫望風越境。猾胥震慴自戢。將見召棠之化。竟終於任所。嗚呼。公姿性剛毅。風儀儁偉。儼然有不可犯之象。御下有度。未甞假以辭色。子弟不衣帶不敢見。與人接。簡默而氣和。雖輿儓之賤。必盡得歡心。有過使自新。其包容如此。立朝三十年。歷試外內。殫心奉公。周察則人莫敢欺蔽。剸理則事不踰繩尺。不爲權勢所奪。阿好所移。卽公細節。而受翼廟特達之知。常懷致澤之志。庚寅以後。無意於世。斂迹榮塗。殆十年餘。亦公所守之確。而晩有大用之漸。以至崇顯。猶有奉身恬退之思。置廬鎭楸。怡悅親戚。逍遙乎泉石間。若將終身。遷三世七墓於淸安縣一局內。俾便省掃。曰聚骨也。病革。揮藥餌曰。脩短有限。戒薄葬。凡節從省簡。少無怛化色。古之寬樂令終者是也。公純祖癸未。魁庭試文科。例付典籍。拜正言。文臣兼宣傳官。辟御營從事官。丙戌。拜持平,文學。選弘文錄。拜校理,兼弼善,宗簿寺正,副應敎,知製敎。爲相禮者屢。丁亥。元子誕降陳賀。以差備官陞通政。拜同副左副右承旨。兼司饔院副提調,兼輔德,輔德,弼善。添書也。戊子。拜安岳郡守。辛卯。拜刑曹參議。丙申。拜左承旨,敦寧府都正。己亥。拜大司成。庚子。薦拜義州府尹。辛丑。以吏曹參議召還。壬寅。以禮房勞陞嘉善。拜戶兵曹參判,同義禁副捴管,冬至副使。癸卯。拜同知敦寧府經筵春秋舘事,都承旨,黃海監司。因微事坐罷旋仍。入爲同知中樞,左尹,典醫監提調。己酉。哲廟御極。拜吏禮曹參判,同成均平市署提調。陞嘉義。冬以進奏辨誣副使赴燕。竣請還。加資憲階。拜判尹,刑曹判書,大司憲,知經筵春秋,都捴管。差籌司堂上。癸丑。薦拜廣州留守。乙卯。書進玉冊。陞正憲。通擬東銓。夏薦拜平安監司。公字玄甫。慶州之李。肇自赫居世太師謁平。其鼻祖也。麗朝有諱齊賢門下侍中。謚文忠號益齋。我朝有諱黿禮曹佐郞。號再思堂。四傳有諱時發五道贊畫使。謚忠翼號碧梧。生諱慶億左議政。號華谷。寔公八世七世祖也。高祖諱錫老監役。贈吏曹判書。曾祖諱進源監役。贈左贊成。祖諱集斗判敦寧。號琶西。考諱一榮判官。贈吏曹判書。妣贈貞夫人昌寧曺氏允亮女。繼妣贈貞夫人坡平尹氏。進士勉喆女。繼妣贈貞夫人陽城李氏應五女。公生於正宗辛亥。曺夫人出也。四歲而母夫人見背。甞患痰癖。受鍼中脘。神色自若。琶西公奇之。七歲遭尹夫人憂。受養於李夫人。誠敬備至。戊辰,癸巳。丁內外憂。執喪盡禮。哀毁成疾。遇忌日。痛慕若喪之初。乙卯卒。享年六十五。葬淸安時化艮坐原。配贈貞夫人安東權氏潚女。賢有婦德。事尊章極敬。庚戌生。庚午卒。祔公墓。繼配貞夫人全州崔氏在洙女。乙丑生。勤儉自持。治家有法。有一男敎重娶承旨尹滋畊女。蚤歾。取族兄海重子龍雨爲嗣。今正言。側出男斅重爲庶弟圭祜後。世之論公者。必先數世德。公處家以嚴。居官以誠。持身也儉約。理事也公平。西陲捐八萬金。有似乎華谷公數百斛之散。海郡却十二簡。有似乎老圃公七十牘之麾。宮閤十景詩。有似乎琶西公萬川之書。若公可謂善繼述者矣。裕元於公同族也。昔年謁公於竹西舊宅。時公新得孫龍雨。使出拜余而托之。公歿後十四年。龍雨遵公遺志。稽之宗黨耆碩。手撰三世狀。乞銘以圖壽傳。余曾爲公九世十銘矣。此皆龍雨賢而能之。有以知公以豫爲先之敎也。銘曰。

東方大族。鷄林之李。益齋先生。再思學士。梧勳華德。公趾厥美。黃甲唱名。肇闢維癸。胄筵裨益。惟公是倚。廷尉允當。惟公是竢。四治西民。一堂南壘。銓部名留。鐵筆惠紀。四朝恩遇。紆靑拖紫。公心愈退。克守終始。大步槐棘。鳴珮釰履。庶幾有之。胡運之否。鎭東泉石。公之拓址。淸北吉岡。公之毓祉。留餘以遺。有肖孫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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