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역대 대통령 자료

박정희 대통령 일기

야촌(1) 2011. 6. 12. 02:00

1954년 6월 14일

 

일전에 다고마에서 보낸 편지가 영수의 손에 들어갔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번잡한 서울 한 모퉁이에서 내가 돌아올 날만을 고대하고 있을 영수!

 

인천부두에서 기다릴 영수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아빠 오셨네”하고 웃으면서 나를 반겨 맞아 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도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맑은 마음의 우물이 샘솟는 나의 집이거늘 없는 것이 무엇이랴!.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 우리 가정을 지켜 줄 것이다. 불원 우리가정에는 새로운 회보가 기다리고 있다.

 

남아일까 여아일까. 무엇이든 관계할 것이 없다.

다만 영수와 내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할 뿐. 이것만이 우리들이 할 일.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남아일 때는 태평양 상에서 본 구름과 같은 기운을 상징시켜 운(雲)자를 넣을까. 시운(時運), 수운(秀雲), 일운(一雲), 일운(逸雲), 일훈(一薰),.... “여아 일때는 근숙(槿淑), 운숙(雲淑), 근정(槿貞), 근랑(槿嫏), 운희(雲姬),.... 영수와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결정권은 영수에게 일임하자.

 

1972년 3월 24일(月) (새마을 운동)

 

自助.自立.協同새마을 정신이란 自助하는 정신이다. 자조하는 정신이란 남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살아가겠다는 자주독립의 정신이다.설령 남이 나를 도우려 하더라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것은 거부한다.

 

설령 남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내 힘으로 할 수 없을까 하는것을 한번 더 생각해 본다.

남이 나를 도와주더라도 나의 힘이 부족한것만 도움을 받고 그 이상은 사양한다.

 

필요이상의 도움을 받은 것은 나 스스로를 그만큼 나태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의존심을 배태(胚胎) 케하는 좋치못한 습성을 기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나 한 사람의 힘이란 적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힘을 다 발휘하여 꾸준히 노력할 때는 무관한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조정신이 없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가진 참다운 힘을 인식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조정신은 자기자신을 최대한으로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다.

자주정신(自主精神)은 무엇이냐스스로 돕고 스스로 일어서겠다는 정신은 동일하다.

 

비유를 한다면 예컨데 길을 가다가 넘어졌다.

남이 일으켜 주지 않더라도 기어코 자기 혼자 힘으로 일어서 보겠다고 가진 애를 다 써 본다.

 

이것이 자조정신이다. 다음에는 간신이 일어섰다.혼자 걷자니 힘이 부족하고 다리가 아프다.

그러나 끝까지 남의 부축을 받지않고 혼자의 힘으로 걸어본다. 이것이 자주정신이다.

 

협동(協同)은 자조정신이 강한 사람들끼리만 이루어 질 수 있는 행동이다.나 개인의 문제, 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 혼자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나를 더 확대하여 우리마을 우리고장을 남의 도움없이, 우리마을 사람들끼리 노력하여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 하는 자조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모이면 여기에 협동이 필요한 것을 알게된다.

 

나 혼자로서는 안된다. 마을 사람이 모두 힘을 합해야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협동심이 생기게 된다.

즉, 협동심이란 자조정신의 결합체이다.자조정신이 확대되고 승화되면 협동심으로 발로한다.

이 정신은 자주경제, 자주국방과 적결된다.이것이 참다운 주체의식이 근간이 된 자주독립의 정신이다.

 

1972년 4월 22일(土) 쾌청 (새마을 운동에 관하여)

 

재작년(1970) 가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작년(1971) 중에는 2차 선거로 인하여 다소 퇴조하는 경향이 보이드니 제2차년도인 금년도에 들어서면서 부터 전국 농촌에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두메산골에서도 외로운 낙도에서도 국도연도에서도 도시 변두리에서도 문자 그대로 우후죽순 격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국도연변보다는 구석진 산골부락에서, 더 열의와 의욕이 왕성한 것같다.

 

가난을 하나의 숙명처럼 생각하고 침체와 체념과 나태와 무기력에 삶의 의욕조차 찾아볼 수 없는 농촌 구석 구석에서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아니, 누가 하라고 강요한다면 할 맛이 없다는 듯이 이제부터 내 힘으로 내가 일어서보겠다고 일어서고 있다.

 

우리 역사를 오천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오천년 민족사중에 왕조가 바뀌고 역성혁명이 일어나고 외적의 침략을 오백여회나 겪으면서도 민족이 스스로 눈을 뜨고 스스로 깨달아서 이웃과 협조하고 남녀 노소가 다 함께 뜻을 같이하여 민족중흥을 위한 대 약진운동을 전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라고 생각한다.

저 의욕에 넘치는 사랑하는 동포들의 희망에 부푼 눈동자와 부지런한 모습을 보라.

 

전민족이 대동단결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이 절호의 천시(天時)를, 민심을 놓쳐서는 안된다.

위대한 새 역사를 창조하고 보람찬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다같이 이 대열에 앞장 설것을 다짐하자.

 

1974년 9월 30일 (육영수 여사 묘소를 다녀와서)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소!. 잘 있었는냐는 인사 한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와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고이 잠드오, 도 찾아오고 또 찾아 올 테니. 그럼 안녕.

 

1974년 10월 23일(토) 강설(첫눈) 종일 흐림

7시 45분 포드 대통령이 이한 인사차 청와대 내방.키신저 장관과 같이 잠시 담소 후 김포로 향발. 연도에 이른 아침인데도 학생 시민이 많이 나와서 열렬히 환송하다.

 

8시 조금 지나 포드 대통령 비행기 이륙.돌아오는 길에 동작동에 들러 아내 유택을 찾다.

그저께 제막한 비석이 퍽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서 있고 비문도 단정하고 맵시 있게 부각되어 있다.

 

애쓰신 분들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드린다.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

 

당신이 여기에 잠들어 風雨星霜(풍우성상) 춘하추동가고 오고, 오고 가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모를리가 있으랴. 당신이 사랑하는 이 조국과 이 겨레의 삶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 보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오.

 

아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애쓰던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저 깜박거리는 네온 불빛이 동작동에서도 보이겠지.

 

1975년 4월 30일(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 수 삼십만명. 이제 그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 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목숨도 불위하겠다는 결심과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해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5년 3월 27일(목) 맑음

전남 나주군 노안면 유송리 현애원 음성나환자촌 주민들이 아내가 생전에 두 번이나 방문하여 격려해 주고 지원해 준 데 감사하여 주민들끼리 돈 11만 5천원을 모아 육여사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한 내용과 사진을 보내왔다.

 

비문에는 「고 육영수 여사님의 크신 사랑 앞에?, 사랑의 등불로 우리에게 어둔 길을 밝혀주시던 고 육영수 여사님은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여기 천병(天病)을 겪고도 햇빛보다는 그늘에서 삶을 영위하는 현애원에까지 자애로운 선물과 희망의 씨앗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이로 하여금 자활과 애국애족을 배웠으며 사랑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두 차례나 벽지인 이곳을 찾아오시어 남이 꺼려하는 손을 어루만지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기에 우리는 그이가 뿌리신 거룩한 씨앗을 키우려 합니다. 생존시에 은덕비를 세우려던 것이 추모비로 바뀌어진 것을 참으로 가슴 아프게 여기면서 조그만 정성을 새겨 고 육영수 여사님의 명복을 삼가비옵니다.」라고 씌어져 있다고 한다.

 

사랑이란 참으로 고귀하고도 소중한 것이다. 참으로 인류애, 동포애, 조국애는 삼세(三世)에 걸쳐서 영원히 빛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비문을 아내 영전에 바쳐 그대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따뜻한 동포애와 참된 사랑의 뜻을 길이길이 이 땅 위에 키우고 가꾸고자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신의 뜻을 받들어 사랑을 인간사회에 심고 펴고 가꾸기 위해 온 것이다.

부모형제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동포의 사랑, 나라를 사랑하는 조국애, 그리고 전 인류에게 공헌하기 위한 인류애, 이것을 위해서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모와 처자의 사랑도 모르고 이웃과 동포애도 모르고 조국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참뜻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류사회의 모든 도덕과 윤리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을 터득하고 성실히 실천하고 노력하다가 간다면 참으로 보람된 인생일 것이다. 아내는 이것을 실천하였다. 그것을 실천하려고 자기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가 갔다. 그대는 보람있는 삶을 살다 갔고 영생(永生)하리라.

 

1975넌 3월 9일(일) 비

 

하루종일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다. 서재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니 구 어린이회관이 안개 속에 우뚝 솟아 보인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즐기고 놀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회관을 건립하겠다고 늘 벼르던 아내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 저 회관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자주 가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어린이 지도를 위해 또는 경로잔치를 베풀고 노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건물이 너무 높고 광장이 없는 것이 흠이라 해서 작년 초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기로 작정, 목하 공사중이다.

 

금년 8월 15일에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촉진중이다. 전국 도(道)마다 회관을 하나씩 건립하자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재작년에는 부산에 어린이 회관을 세우는 데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작년 9월 5일에 준공을 하게 되어 행사에 참석한다고 자신의 휘호를 저도(猪島) 휴양중에 정성들여 썼다.

 

<웃고 뛰놀고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써놓고 나에게 "내일의 푸른 꿈을 키우자"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 휘호가 아내의 절필(絶筆)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가도 아내가 그처럼 사랑하던 이 나라의 어린이들은 착하고 슬기롭게 자라서 길이길이 이 나라를 지키리라.1

 

1975년 6월 25일(수) 흐름

 

1950년 6월 25일(일) 새벽4시. 1백 55마일 38선 전선에서 북한 공산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개시, 민족사상 가장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었다. 불의의 기습공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침징후를 약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작전판단서는 전쟁이 발발 후 포로와 적 문서에 의하여 또는 귀순자들의 제보에 의하여 너무나 정확하게도 적중하였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그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시대에 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정세는 흡사 6.25 전후와 비슷하다.

우리 세대에 또 다시 이러한 과오를 범한다면 후손들에게 영원히 죄를 짓고 조상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전국민이 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총력안보 태세를 철통같이 다져서 추호의 허(虛)도 없이 조국을 수호하는 데 심혈을 경주해야 할 때다.

 

1950년 6월 25일에 나는 고향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1명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서 보낸 긴급전보였다.

"금조 미명(未明)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는 적과 교전 중, 급히 귀경"의 내용이었다.

 

새벽 4시에 38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 동네에서는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리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집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2 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하다.

경부선 상행 열차에 병력을 만재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북행열차를 탔으나 군 병력 전송 관계로 도중 도중이나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 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불안에 싸여 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 내에 있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 주야를 꼬박 새운 작전국 정보국 장병들은 잠을 자지 못하여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왕좌왕 전화 통화 관계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고 소란하기만 했다.

 

1975년 8월 1일(금) 소나기

 

여천(麗川)공업단지 방문.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여천단지 방문, 호남정유에서 오찬. 메탄올 공장, 칠비(七肥), 삼일만 부두공사 시찰.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공사의 하나인 중화학 공업단지, 여천단지의 공사가 그 동안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고 특히 석유파동 이후에는 설상가상격으로 애로가 겹쳤으나 그래도 예정 공정대로 착착 추진이 되고 있는 것을 보고 기쁘기 한량없다.

 

관계 책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다. 메탄올 공장이 금년 말에 완공되고, 칠비가 1977년 3월에 준공되고 삼일만 항만시설이 또 완공되고 석유화학 공장들이 1978년경에 완공이 되었을 때를 예상해 보면서 부풀은 희망과 자신감을 가득 간직하고 저도(猪島)로 돌아왔다.

 

남해고속도로의 쾌적한 기분은 배할 데 없고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교통사정이 극히 불량하던 이 고장에 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연도(年度) 농촌의 모습도 일신하였고 연도 농촌이 기름져 보였다.

 

1963년 봄, 호우와 홍수로 보리농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적이 있었다. <적미병>이라는 맥류(麥類)에 걸린 병충해였다.

 

당시 이 지방을 지날 때(아마도 진양 부근이라고 기억된다) 어느 농가에 들었더니 노인 농부가 썩은 보리이삭을 만지면서 "우리는 이제 무엇을 먹고 산답니까?" 하고 눈물이 글썽한 것을 보고 나는 "홍수 피해 복구에 농민들이 협력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정부가 여러분을 돌봐드릴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오" 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몹시도 나는 마음이 괴롭고 가슴이 아팠었다. 1962년에는 큰 한해(旱害)로 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는데 다음해 63년 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또 농민들이 큰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나는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연도 농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기도 했다.

 

1975년 8월 15일(금) 소나기

 

가세월이라더니 벌써 아내가 간 지 1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과연 유수와 같아 빠르도다.

작년 이날,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이날. 작년 이날 09:45경 아랫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 그날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1년 남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야(野)에 묻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번이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과 실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내와 인내로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되찾기에 안간힘을 다 섰다.

 

그럴때마다 아내 영정앞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했다. 아내는 언제나 나에게 격려와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

아내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가 다 펴지 못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의를 박차고 일어서야 했었다.

 

고인의 그 지성을 받들고 그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더욱 분발할 것을 몇번이고 다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오늘도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아내의 산소를 참배하는 행렬이 이른 새벽부터 종일 계속되었다.

15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팔순의 노인, 몸이 불편한 상이군인, 맹인, 불구자, 가정주부, 학생, 시골서 원로에 올라온 각계 국민, 외국 인사등 8월의 태양이 쪼이다가 소낙비가 쏟아지기도 했는데 질서정연하게 순박한 참배객의 행렬이 끊일 줄을 모른다.

 

저녁 TV에서 이 광경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고인의 평소 몸에 밴 인간성과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겸손한 사랑의 열매가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박은 유덕의 소치일 것이다.

 

1975년 8월 19일(화) 일기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날씨다. 그러나 낮에는 섭씨 33.4도를 오르내리는 노염이 기세를 부린다.

작년 8월 19일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유택으로 떠나 보내고 마지막 작별을 하던 날이다.

 

벌써 1년이 갔구나. 정든 청와대를 마지막 떠나며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한번 뒤돌아 보지도 않고. 청와대 정문에서 당신을 마지막 떠나보내고 꽃수레가 현무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중앙청으로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머금던 그날. 그 생각이 새롭기만 하구나.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이라는 무상의 도리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하랴.

오늘도 저 남산 중허리에 우뚝 솟은 구 '어린이회관'을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당신의 그 단아한고 다정스럽던 모습을, 그림자를 그려보며 언제까지나 서 있다오.

 

구름 한점 없는 저녁 하늘에는 7월 31일(음) 티없이 맑고 밝은 달이 둥실떠서 장안을 비치고 있다.

봄이오면 어김없이 찾아

 

1975년 8월 27일(수) 맑음

 

미국 국방장관 슐레진저 씨 내방(11시). 오후 2시 30분까지 오찬을 같이 하면서 한반도의 제반 정세와 한미 공동관심사에 관하여 격의 없는 의견교환을 했다. 한국정부의 자주국방 결의와 노력에 대하여 슐레진저 장관은 매우 기뻐하면서 미국정부는 한국의 방위을 위하여 최대의 지원을 하겠다는 포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자립경제(自立經濟),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완성이 내가 기여하고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자조자(自助者)는 천조(天助)라고 하였다. 우리 국민의 염원은 하늘도 기필코 도와주리라.

지하의 아내도 우리를 반드시 도우리라.

 

1975년 9월 2일(목)

 

영동고속도로 개통 1주년, 오전 10시 장성호(長城湖) 댐 준공식에 참석하고 준공비 제막식 통수식도 동시에 거행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종합개발사업의 제 1 단계 사업인 장성 담양 광주 나주 4개 댐이 오늘 준공됨으로써 여기에 담수된 2억 6천만 톤의 저수는 하류 1시 6개 군에 몽리(蒙利)를 하게 되고 3만 5천 정보가 한ㆍ수해로부터 벗어나는 전천후 농토가 되는 것이다.

 

이 지방 농민들의 천년의 한을 풀어주는 대역사가 1973년 4월에 착공하여 우리 기술진에 의해서 7백 3십억이란 방대한 예산으로 완성된 데 대하여 무한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1981년까지 제 2 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영산강 하구언이 완성되고 3ㆍ4단계 사업(1995년 완료)까지 완료하면 영산강 유역은 천재(天災) 없고 기름진 옥토가 조성될 것이다.

 

헬기로 여타 3개 댐은 공중시찰을 하고 영산강 하구 나불도에 착륙, 방조제 공사 예정지점을 시찰하고 광주비행장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들고 전용기편으로 귀경하다. 금일은 1년 전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태백산맥을 뚫고 국토를 동서로 관통하여 국민들이 모두 쾌재를 불렀던 감격적인 날이었다.

 

2백 90억이 소요된 고속도로이지만 1년 동안에 실질적으로 2백 90억원의 이익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초기에는 주로 승용차가 많이 통행을 하고 화물자동차는 25%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화물차가 50%를 넘는 다고 하니 명실상부한 산업도로가 된 셈이다.

 

동해안의 풍부한 자원, 설악산을 비롯한 명승 고적,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고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1975년 9월 21일 일기

 

활짝 개인 가을 날씨다. 고향에 성묘차 출발(11시) 추풍령 휴식소에서 점심을 들고 상모로 가서 선영에 참배하다. 상모 마을사람들이 길에 나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상모 옛집에 들러서 잠시 쉬었다.

 

어머님이 심어서 고이 가꾸신 감나무가 6·25 전화로 나무의 일부가 타서 전상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이 나무에 열린 감을 따서 잘 저장하여 두었다가 내가 휴가로 집에 돌아가면 먹으라고 주시던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집 뒤안에 돌아가보니탱자나무는 옛날보다도 더 번성하여 완전히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으며 기타는 모든 모습이 많이 변형하고 변모하였으나 어린시절의 옛 추억과 아버지 어머님 생각이 끝없이 추억을 더듬으면서 과거로 달리기만 한다.

 

연도의 농촌은 전날 비바람에 일부 도복된 벼가 눈에 뜨이기는 했으나 대풍을 이루어 보기에 흐뭇하다.

귀로에 추풍령서 저녁식사를 하고 추석달을 바라보면서 귀경하다.

 

오곡백과가 풍성하니 올해도 대풍일세 선영에 참배하여 국태민안 기원하니 추석달 높이 떠서 이 강산을 편조하더라 옛동산에 올라서니 추객이 아득하네 흘러간 옛추억은 여기저기 남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낯선 사람들 뿐이더라.

 

1975년 10월 3일(금) 맑음

 

단기 4038년 개천절이다. 단군 성조(聖祖)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신 지 4038년.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민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지난 4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생을 영위하면서 가꾸고 건설하고 키워왔다.

 

영고성쇠(榮枯盛衰), 민족이 걸어온 역정에는 허다한 굴곡과 기복도 있었으나 한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아 연면히 조국의 수호와 민족의 발전을 위한 민족의 전진은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올바른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입각하여 배달민족이 걸어온 전통(傳統)과 정통(正統)을 우리들이 계승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하여 온 겨레가 가일층 분발하고 정진해야 하겠다.

 

1975년 12월 12일(결혼 25주년 일에)

 

오늘이 아내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다.아내가 있었다면 은혼식을 올리고 축배를 올렸을 터인데.....

1950년 12월 12일 대구시 모 교회에서 일가 친척.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식을 거행하고, 아내와 백년 해로를 맹세하였다.

 

24년만에 아내는 먼저 가고 말았다. 남들은 은혼식 금혼식을 올리며, 일생의 반려로 자손들의 축복을 받으며 노후를 즐기는데 아내와 나와의 사이는 어찌 24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25년 전 오늘의, 그 착하고 수줍어 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제 2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내와는 유(幽)와 명(明)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과시(果是) 무상하도다.

 

1976년 1월 20일(금)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 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 4천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 7천원 정도라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 원이 된다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재 물가표준으로 배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4,5년 내에 그러한 수준까지 향상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976넌 5월 7일(금) 맑음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출발 강릉행. 대관령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 정각 오죽헌(五竹軒)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오죽헌 중수공사는 약 2 개월 만에 규모 있고 아담하게 잘 시공이 되고 조경도 잘 가꾸어졌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참배하고 우리의 위대한 조상으로 올바르게 소개하고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 조국을 위해서 여하히 봉사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손쉬운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마음의 다짐을 하자는 것이 이 오죽헌을 정화하는 참뜻이 될 것이다.

 

1976년 5월 16일(일) 흐름

 

5.16혁명 15주년 기념일이다. 15년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도강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기식(氣息) 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결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방송을 통해서 혁명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훼예포폄(毁譽褒貶)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 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 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 25일(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1976년 10월 17일(목) 맑음

 

어제 10월 6일 오후 3시 태국에서 무혈 쿠데타가 발생, 197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서 군정이 붕괴되고 그 후 불안과 혼미를 거듭하면서 민정의 출범을 보았으나 결국은 민정이 붕괴되고 다시 군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활착(活着)을 하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지난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증한 셈이다. 그 나라의 실정을 무시한 형식만의 모방은 십중팔구 실패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뼈저린 체험을 했고 또 다른 나라의 예를 수없이 보아왔다.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나라에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유신체제는 이러한 귀중한 교훈에서 우러나 <한국적 민주주의> 라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1976년 10월 13일(수) 맑음

 

10시 40분 기동차 편으로 서울역발. 영산강 유역개발 제 1 단계사업 준공식 참석차 광주로 향발. 오후 4시역 광주 도착. 기차편으로 공주행은 오래간만이다. 연도 농촌의 모습이 수 년 전에 비하여 괄목할 만큼 변모한 모습이 눈에 띈다.

 

새마을운동의 실적이 농촌 방방곡곡에 나타나고 있고 풍요에 넘실거리는 가을의 평화는 아름답기만 하다.

광주시내 모습도 1년여만에 보는 눈에는 깨끗하고 알뜰하게 다듬고 가꾸어진 모습 역연하다.

 

시민들이 내 고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가 구석구석에 보여 기쁘기 한이 없다.

도착 후 목욕을 하고 고건(高建) 지사를 대동하고 무등산 너머에 있는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사당, 충장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다.

 

1976년 10월 17일(일) 흐림

 

10월 유신 4주년이 된다. 유신 4년 동안에 우리 나라는 과거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피땀흘려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 동나 73년 말부터는 유류파동으로 시작된 국제경제의 일대 불황이 있었다.

1975년 초에는 인도지나 반도의 비극이 있었다. 북괴의 남침땅굴 발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8.18판문점 만행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고 주변정세의 격변과 북한 침략집단의 집요한 도발과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안보태세를 훨씬 더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의 방위산업도 괄목할 만큼 발전 성장하였다.

우리의 경제발전은 국제사회에서 경이의 대상이 되고 개발도상국 중의 모범국가로서 선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대 자각과 단결과 땀흘려 일한 노력의 대가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이 건설의, 성장의 결과는 값진 것이고 보람있는 것이다.

 

하늘은 한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개척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경주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는 것으로 우리는 믿어야 한다.

 

농촌사회에서 5천년의 유산인 가난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가고 새로운 생기 약동하는 농촌 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것은 새마을운동의 성과이다. 농민들이 의지와 의욕과 노력의 대가가 농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0월 유신은 구국의 결단이었다. 우리 국민 전체의 결단이었다. 새 역사의 출범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데에서 새 역사가 하루하루 창조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야 한다. 밝은 내일은 반드시 도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1977년 1월 12일

 

밤뉴스 시간에 어제 취임한 미국의 새 대통령의 의기양양하고 즐거워하는 표정과, 임기를 마치고 시골에 돌아와서 골프를 치며 유유자적하는 포드 전 대통령의 표정을 찍은 TV화면이 나왔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포드 전 대통령이 훨씬 행복하게 보이고 인생의 전유(全有)를 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번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인생에서는 오히려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1977넌 3월 7일(월)

 

날씨가 완전히 풀려서 봄날씨다. 역시 경칩이 지나니 추위는 물러가는 모양. 밤 10시 10분 KBS에서 육영수 여사 전기 낭독을 침대에서 듣다. 1974년 5월 14일, 한국자연보호협회 회원들이 청와대에 찾아와서 아내에게 동 협회 총재를 맡아 달라고 청하던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후 4시경 식당에 회원들을 초대, 다과를 대접. 나의 집무실에 아내가 와서 잠깐 나와 회원들을 격려해 달라고 하여 따라나가 인사를 하고 잠시 동안 환담을 나누는 당시의 이야기다. 엊그제 같은 이야기다.

 

아내가 타계하기 꼭 3개월 전의 이야기다.

아내는 남달리 자연을 좋아하고 아꼈다.

 

"이 다음에 이 자리 그만두거든 시골에 가서 조그만 집 하나 짓고 살아요,

그리곤 그 뒷산에는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그런 곳에서 살아요."

아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아내는 그것이 소원이었다.

 

그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이는 갔다. 지금도 지방에 다니다가 나무 있고 바위 있는 아담한 산이 있으면 나는 유심히 그 산을 보게 된다. 그이가 저런 곳에서 살기를 원했는데 하고. 그러나 이제는 누구와 같이 그런 곳에 가서 조용히 살까. 아내는 또 우리 나라 재래식 한옥을 좋아하였다.

 

지방에 차로 같이 다니다가 재래식 기와집 반듯한 집을 보면 "저 집 참 좋지요!

저런 집 하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하고 처녀시절 옥천 친정집에 살던 때 이야기도 자주 하였다.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달빛을 바라보면 시골의 풍경을 늘 그리워하였다.

그런 생활을 노후의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는 먼저 갔다.

 

1977년 4월 13일(수) 맑음

 

창원(昌原)공단 시찰. 1년 만에 둘러보는 창원공단의 발전된 모습은 장하기만 하다.

대우실업, 통일산업, 기아산업을 오전중에 시찰하고 한국종합특수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한국특수강, 제일정밀, 대한중기를 시찰, 우리의 방위산업이 1년 동안에 놀라우리 만큼 발전되었고 기업인, 종업원들이 열성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족감을 금할 수 없다.

 

1978년까지 기간부문이 완료되고 양산체제(量産體制)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연초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발표한 것을 예정보다도 훨씬 앞질러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산업전사들의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그 땀진 얼굴, 기름진 작업복들이었지만 그다지도 값지고 거룩하게만 느껴져서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1977년 4월 19일(화) 맑음

 

오후 7시 30분경 영등포구에 있는 청소년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상황을 시찰하다.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영등포 여자상업고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 32개교를 구로공단 최명헌 이사장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직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여학생 남학생 다들 머리를 학생형으로 단정하게 다듬고 산뜻한 교복으로 앉아서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귀엽고 대견하다기보다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는 가정이 빈곤하다는 죄 하나만으로 남과 같이 그렇게 원하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고등학교학생복으로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부럽다기보다 나는 왜 학교를 못가느냐 하고 자기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도 하고 부모와 가정을 원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도 한스럽던 일이 이제 소원이 성취되었다.

 

야간이나 주간이나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그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고 또 보람을 느낀다고 하는 말을 듣고 흐뭇하기만 하다.

 

이 학생과 교사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다.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마음속에서 기원하였다.

 

1977년 4월 28일(목) 흐린 후 맑음(충무공 탄신일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32주 탄신일이다. 11시 현충사 제례행사에 참석하다. "국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굽어살피시사 이 조국 이 겨레의 앞날을 밝게 비춰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장군의 영전에 머리 숙여 기원하다.

 

오후에는 예산군 신아면 용궁리를 방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의 고택 복원공사를 둘러보고 인근에서 모여든 주민들과 담화도 나누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나의 손을 잡고 "만수무강하십시오. 늙지 마세요." 하고 울먹이는 표정을 보고 순박하고도 가식 없는 시골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에 크게 감동을 느낀다.

 

이 착하고 어진 국민들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고온천에 들러서 온욕을 하고 일박. 연도의 농촌풍경이 퍽 아름답고 비닐하우스가 온 들을 덮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1977년 4월 29일(금) 맑음(윤봉길 의사 의거일에)

 

10시에 예산군 덕산 윤봉길 의사 45주기 의거일 제례에 참석. 윤 의사의 유족 장남 종씨를 만나서 유족들의 안부와 생계 형편을 물어 보았다.

 

윤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 보다. 약관(弱冠) 20여 세에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대륙에 건너가서 조국광복과 민족정기를 위하여 폭탄을 품고 사지에 뛰어 들어간 의기. 그때가 1932년, 의사의 춘추 이제 겨우 25세.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의 정기가 사라져가고 있을 때에 겨레의 가슴속에 다시금 횃불을 켜준 의열의 쾌거를 강행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충의(忠義)는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민족의 얼이 맥맥이 살아 길이 이 조국 이 겨레를 수호하리라.

재천(在天)의 영(靈)이 굽어살피시와 이 조국 이 겨레를 길이 빛나게 하여 주소서.

 

1977년 6월 7일(화) 맑음

 

6월 5일자 미국의 유력지 <뉴욕 타임즈>지에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군의 가자회견 내용이 보도, 보도내용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김은 10월 유신 후 73년 초에 가족과 같이 미국으로 떠났다. 떠난 후 얼마 지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10월 유신 후 유정회 국회의원에서 탈락된 데 불만을 품고 떠났다고 알고 있다.

 

8대 국회때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으나 임기 중 절반은 해외에 나가 있었다. 당의 승인도 허가도 없이 나다녔다. 1기 유정회에서 탈락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후 방미하는 인편에 귀국할 것을 여러 번 종용했으나 출판관계 일이 끝나면 돌아온다고 연락을 해 왔다.

 

최근에도 귀국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왔으므로 돌아올 것을 종용한 바 있고 거의 귀국을 결심하고 있지 않았나 했으나 또다시 누군가의 유혹으로 변심한 듯하다. 김에게 6년이나 중앙정보부장이란 중책을 맡겼던 나의 부덕으로 돌릴 도리밖에 없다.

 

나 개인에 대한 배신은 좋으나 조국에 배신과 반역을 하다니 괘씸하다기보다 참으로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앞선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살다가 이 땅에 묻혀서 이 땅의 흙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났더라도 이 땅의 주인은 될 수 없고 우리와 같은 겨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977년 10월 17일(월)

 

10월 유신 5주년 5년 전, 1972년 10월 17일 역사적인 10월 유신이 내외에 선포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시작되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면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 나가면서, 평화적인 통일의 기반을 조성해 나가겠다는 민족의 결단이었다.

 

5년간에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주, 자립, 자위라는 정신적 기조 위에 근면, 자조, 협동을 행동강령으로, 불사조와 같이 고난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거양할 수 있었다. 남들은 이것을 기적이니 한국의 신화니 하고 찬양을 하지만 이것은 결코 기적도 신화도 아니다.

 

겨레의 피와 땀으로써 이룩된 결정(結晶)이요 대가(代價)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강국으로 곧 등장하게 될 것이다. 5천년 역사에 빛나는 영광의 세대를 창조하고야 말 것이다. 동포들이여! 내일의 이 영광을 쟁취하기 위하여 조금도 늦추지 말고 더욱 분발하고 매진하자.

 

1977년 10월 28일(금) 맑음

 

강화도 내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이 완공되어 금일 14시 강화교 입구에 이는 갑곳돈대에서 테이프를 끊으면서 준공식을 올렸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용두돈대, 강화읍 내에 있는 서문, 구연무장 북문, 삼랑성문, 고려궁지 등이 보수 또는 중건되어 옛 조상들의 호국의 거룩한 얼을 기리며 성대히 준공을 보았다.

 

작년 3월 1일 강화도를 방문, 옛 사적지 보존이 지극히 부실함을 보고 보수를 지시, 작년 8월에 착공, 만 1년 2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이곳은 우리의 후세에게 호국정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서 이곳의 유적지를 잘 관리보존하기 위하여 22억원의 예산으로 공사가 끝났다. 금일 강화도민들은 완전히 축제분위기다.

 

김포ㆍ강화의 들에는 추수한 볏단이 온 들에 쌓여 있어 풍요하게만 보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내 나라를 지키는 데는 내 힘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명심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77년 12월 22일(목)

 

음력 11월 12일 동지(冬至), 백 억불 수출의 날. 백 억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천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천여만 불이었다. 그후 1964년 11월말에 1억불이 달성되었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 억불 목표를 달성했다.

그 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 억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억불에서 백 억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모든 여건이 우리가 더 불리한 여건 속에 이룩한 성과라는 데서 우리는 크게 자부를 느낀다. 1981년에 가면 2백 억불을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6백 억불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무서운 저력이 이제야 폭발적으로 발산될 때가 왔다.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분발해야 한다.

오늘 이 날은 우리 한국경제사상 길이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수행에 있어서도 길이 부각될 이정표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백 억불,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굳게 다짐하자.

 

1978년 1월 18일(수) 눈

 

1978년도 연두기자 회견을 10시 정각 중앙청 회의실에서 가졌다.

목감기가 아직 완전 회복되지 않아서 음성이 약간 탁하고 맑지 못하였으나 강행을 하다.

 

2시간 50분이 걸렸다. 희망과 자신과 의욕에 가득 찬 새해다.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그날이 눈앞에 다가선 것 같다.

 

국제정치의 격랑속에서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 긴박한 한반도 정세. 나날이 각박해 가는 세계경제의 추세.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는 속담처럼 제각기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의리도 신의고 없는 냉혹한 작금의 국제정세. 오직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힘뿐이다. 힘, 힘이 없고 힘을 기르는 데 힘쓰지 않는 민족은 살아남을 땅이 없다. 이것은 진리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곁에 있다. 먼 곳에서 구하려 하지 말자. 오천년 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겨레.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민족의 이상을 간직하고 착하고 어질게 살려고 자자손손 가꾸어 왔는데, 한 번도 남을 해치거나 악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항시 외적의 침입을 받고 어깨 펴고 살지도 못했거늘 가난과 침체와 무기력과 쇠잔의 역사를 걸어왔건만. 이제 우리에게도 어두운, 지루한 밤은 가고 밝은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밝아온 새 아침에 지금 살고 있다. 이 밝은 새날은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웅비를 기약 받은 새 역사의 출발점이다. 금년은 그 중의 한 해다. 물질문명의 풍요와 발맞추어서 정신문화에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전통문화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전통문화 속에 조상들의 얼과 슬기가 맥박치는 문화적인 자주성도 정립해 나가야 하겠다.

 

풍요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모든 혜택이 균점이 되게끔 정책방향을 지향해 나가야 하겠고 도의(道義)와 인정이 충만한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사회다.

 

1978넌 4월 10일 일기

 

화창한 봄날이다. 후정의 목련이 활짝 피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 청초한 흰 꽃송이 그윽한 향기도 예와 다름없다.

저꽃이 피면 "어쩌면 저렇게도 희고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하고 좋아하던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이 불현듯

 

1978년 4월 21일(금) 맑음

 

서울 파리간을 취항하는 대한항공기(707호기)가 21일 파리 오를리 공항을 떠나 서울로 운행하던 중 소련령 무르만스크 부근에서 야간 동토(凍土) 호수 위에 불시착을 했다는 소식이 미국 방공망 레이다에 포착되어 통보되어 왔다.

 

아직까지는 사고의 원인도 알 수 없고 승무원과 승객들의 안부도 알 수 없다. 소련과는 국교가 없는 관계로 미국 등 우방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밖에는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없어 초조한 마음으로 외신 등 그 밖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다.

 

1978년 4월 24일(월) 맑음

 

18시경 KAL기가 사고난 KAL기의 승객 승무원을 태우고 김포에 착륙했다.

사망자 1명의 유해가 먼저 내리고 부상자와 일반승객이 가족 친지 기타 모든 국민들의 영접을 받으며 귀국하다.

 

사망자와 그 유가족에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과 조의를 표하며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기원할 뿐이다. 승객들이 김포 비행장에 내리자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 승무원들의 침착하고도 여유 있는 긴급조치와 한국인 승객들이 일사불란하면서도 침착하게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는 행동을 한데 대한 칭찬의 소리가 대단하다.

 

역시 그 동안 소리 없이 심어진 한국인이라는 높은 긍지와 총화의 힘으로 다져진 단결심이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이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각자가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양과 훈련이 쌓아진 데 서 우러난 결과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특히 그 비행기는 태극기가 붙어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여객기이고 그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전원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데서 더욱더 자제심과 책임감이 생긴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영국인 승객 한 사람은 호수 위에 불시착을 하는데 활주로에 내리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뒤에 동체로써 착륙했다는 것을 알고 신기에 가까운 조종기술에 감탄했다고 술회를 하고 있었다.

 

1978년 4월 25일(화) 맑음

 

불시착을 했던 대한항공기가 돌아와서 어젯밤부터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체험담을 종합해 본 결과 사고의 원인은 역시 계기의 고장이 틀림없는 듯하다. 기계라는 것은 언제가 고장이 나는 것인데 고장이 났을 때의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는지가 문제다.

 

앞으로 조사위원회의 조사와 억류되어 있는 승무원들이 송환 후의 더욱 구체적인 조사결과를 기다려 봐야만 판명이 될 것 같다. 원인 여하튼 1백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여객기에 대하여 소련공군의 총격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마땅히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수백년 전 우리 나라의 신라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인명존중을 최대의 가치로 규정하고 살생은 필히 유택(有擇)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가치관이다. 인명을 경시하는 문명은 진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1978년 5월 16일(화) 맑음

 

5.16혁명 제17주년이다. 오전 10시 반 민족상 수상자 12명에 대한 수상식이 있었다.

오후 6시 반부터는 5.16민족상 이사 42명과 같이 만찬을 들면서 지나간 17년간의 회고담을 나누었다.

돌이켜 보면 지나 17년간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숙명처럼 생각하며 체념 속에 살아 온 가난한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버리고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아 볼 수는 없는 것인지,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었는데 이제 잘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고 얼마 안 가서 남부럽지 않은 잘사는 나라가 될 자신이 생겼다.

 

그 동안 많은 비판의 소리도 들었고 비난의 소리도 수없이 들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의 시책에 협조해 주었고 지지해 주었다. 특

 

히 제 2 의 5.16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0월 유신은 능력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제도였다고 확신한다. 10월 유신 이후 지난 6년 동안 우리 국력의 신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이대로 추진된다면 1980년대 중반에 우리는 대국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 체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탄불기(可歎不起) 다만 결과를 가지고 후세에 평가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1978년 9월 23일(토)

 

오후에 도봉산 입구에 가서 자연보호운동(自然保護運動)을 하다.

주민들과 같이 어울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에 들어가 쓰레기를 주우면서 주민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

 

1978년 12월 22일(금)

 

오후 1시 의령읍에서 충익공 곽재우(郭再祐)장군 유적 정화 준공식을 거행. 임진왜란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 도처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국난극복에 헌신한 구국의 영웅을 오늘 그 사우를 건립하고 영령을 모셔 그 분의 애국충성을 기리게 되었으니 감회무량하다. 오후에 귀경해 개각단행 발표함.

 

1979년 5월 16일

 

5.16혁명 제 18 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 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좌시만을 할 수 없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이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클어지고 부패부정 무질서 부조리 정체 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 당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구 정치인들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구악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며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외세를 빌려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 17일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로써 제 5 대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니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1,2,3차 5개년 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 만큼 크게 신장되었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이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이니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신들의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19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 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 작업이 열매를 맺으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총화로써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1979년 5월 12일(토) 맑음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 박사가 내방하여 장시간 환담하고 오찬을 같이하다. 키신저 박사의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은 오늘의 세계에서 최고 수준급의 인사라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 특히 한반도 정세에 관한 깊은 이해와 대단한 판단 및 평가에도 감명을 받았다.

 

5월 7일자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지 보도에 한국기사, 조지어 앤 게이어 씨가 쓴 칼럼에 "한국의 현 정치체제는 켄센서스 소사이어티로 급속히 발전해 가고 있다. 정치발전 속에서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장 소득분배가 잘된 나라다. 직접적인 정치분야를 빼고는 모든 분야에 자유가 만개한 나라" 운운. 미국 언론인 중에도 이제 사물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 생기는구나 하고 혼자 고소(苦笑)하다.

 

1979년 10월 17일(박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일기)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박정희 대통령 인터넷 기념관 (http://www.516.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