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2010. 09. 23 강준식
박정희 흉내 낸 ‘총의 권력’…일등 ‘경제대통령’ 이었다?
후계자 노태우에 뒤통수 맞고 백담사行
전두환은 어떤 인물이었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반복한다는 헤겔의 생각에“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라는 생각을 덧붙인 것은 칼 마르크스였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그가 다룬 당통→코시디에르, 로베스피에르→루이 블랑을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으로 슬쩍 둔갑시켜본 것은 나뿐이었을까?
박정희에게는 우국지사적인 풍취가 있었다. 거사의 배경에 사회 혼란이라는 상황적 명분과 가난을 퇴치하겠다는 근대화의 신념이 일정 부분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5·16은 무혈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집권과정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만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힘으로만 밀어붙였다.
유혈의 폭력정치에 대한 명분으로 그가 내세운 것은 안정과 질서였는데, 이는 유신시대를 막 벗어난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논리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10월 8일 전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61회 전국체육대회개막식에서
전북도민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TV ‘땡전뉴스’에 등장하던 그의 표정은 근엄하고 무서웠지만 국민의 눈에는 박정희를 교본으로 삼아 움직이던 그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farcical) 존재로 보였다. 이를테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보위로, 정치활동정화법은 정치활동규제법으로, 언론규제는 언론통폐합으로, 국토건설단은 삼청교육대로 이름만 바꿔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래서 5공은 마치 3공의 질 나쁜 모조품처럼 보였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박정희의 경제제일주의를 답습한 그가 실천과정에서 박정희도 누르지 못한 고질적 인플레이션을 보기 좋게 잡고 그 기조 위에 두 자릿수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만성적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려 놓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안정과 성장과 흑자의 3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전두환에 대해 그의 성공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박정희시대도 빛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만약 전두환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들은 보다 일찍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경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 학자도 있다.(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 2006) ‘빈탕’이라 박정희를 흉내 낼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가져왔었다는 전두환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전두환과 IQ 측정기
만년적자였던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리고 한때 위험수위에 육박했던 외채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85년부터 3년간 계속된 신풍(神風)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러 하락, 원유 하락, 국제금리 하락의 ‘3저현상’이 바로 그 신풍이었다. 이 바람을 타고 수출경쟁력의 날개를 얻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상품들이 해외 시장으로 벌떼처럼 몰려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 전두환은 “요새 무식한 사람들이 기름값 내리고 국제금리 내리고 ‘3저현상’ 때문에 자동적으로 경제가 잘되는 거지, 정책을 잘 써서 잘되느냐고 얘기해요. 그럼 일본 경제가 잘되나? 미국이 잘되나? 동남아, 구라파가 잘되나?”(김성익, <전두환육성증언>, 1992) 하고 반문하면서 ‘3저현상’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자기가 미리 기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대목이다.
당시 세간에선 그를 ‘무식한 돌머리’라고 했었다. 그래서 미국에 간 그가 IQ측정기에 머리를 집어넣었더니 “돌 넣고 장난하지 마시오”라는 경고음이 나왔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널리 유행했다.
이처럼 시중에 ‘돌머리’ 유머가 돌면서 전두환의 ‘머리 나쁨’은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었지만, 당시 일선에서 뛰었던 한 언론인은 그 풍문을 부인하면서 실제로 “전두환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직관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증언했다.(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2008)
기억력에 대해서는 전두환 자신도 “내가 기억력은 괜찮은 것 같아. 내가 중대장 할 때 1주일 만에 180명의 이름을 다 외웠더니 모두 놀랐어”라고 자랑한 일이 있다.(<전두환육성증언>)
이 점은 가령 그의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학적부의 성행개평(性行槪評)란에 적은 “주의력, 기억력, 이해력이 풍부하며 책임감이 왕성함”(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 1981)이라는 메모에서도 입증된다.
5공시대에 그를 만났던 한 유력 일간지의 사주는 “전두환 대통령은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회고했다.(방우영,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2010) 또 <워싱턴포스트>지의 한국특파원이었던 돈 오버도퍼는 워커 주한미대사의 말을 인용해 전두환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약삭빠르고 타산적이며 정략적인 사람의 하나”였다고 평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1998)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과거 육사생도 시절 모습.
그는 결코 ‘돌머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5공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이종률(李鍾律)은 “군인들을 깔봐선 안돼요.
장군이 되려면 수천 명 되는 군인들을 다스리는 리더십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함성득, <한국의 대통령과 권력>, 2000)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실제 공부기간으로 따져 봐도 군인 정치가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박사 과정을 밟았던 이승만은 예외 케이스지만 그 밖에는 대개 대학 졸업까지의 16년간이 민간 정치인이 받은 학교 교육의 전부다. 그러나 전두환의 경우는 육사 졸업(16년) 후에도 육군고급부관학교(5개월)→미국특수전학교(5개월)→미국육군보병학교(6개월)→육군보병학교(4개월)→육군대학(8개월) 등을 거치면서 민간 정치인보다 3년 정도를 더 공부했다.
여기에다 군인 정치가는 임관 직후부터 부하를 다루는 용인술을 체득하게 되고, 소대장→중대장→대대장→연대장→여단장→사단장을 거치면서 점차 규모가 커진 조직을 관리하는 경험을 쌓게 된다.
이러한 군에서의 경험이 통치기술로 이어졌던 것인데, 이 통치기술은 우리가 뒤에 겪는 민간 대통령들, 그중에서도 특히 야당 출신이 가장 취약점을 보인 부분이기도 했다.
세칭 ‘정치 9단’이라던 그들에게 대권을 맡겨 보니 군 출신보다 용인술도 떨어지고, 조직 관리도 신통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몸담아온 야당 조직은 체계적 조직이라기보다 일종의 바람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두환의 경우는 정치적 경험은 없어도 군 조직을 통해 용인술과 리더십을 착실히 몸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 “나는 지금도 전두환 대통령의 용인술을 생각하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회고한 측근의 기록도 있다.(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2005)
전두환과 리더십
1931년 경남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全相禹)와 어머니 김점문(金點文)의 6남4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난 전두환은 어릴 때부터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성격, 어머니로부터 받은 억센 기질과 함께 나이 들어 학교를 다닌 점도 그의 ‘골목대장’ 역할에 한몫했던 것 같다.
8살 나던 해 그는 일본인 순사부장을 벼랑으로 밀어버리고 만주로 달아난 아버지를 뒤쫓아 삼촌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9살 되던 해 호란(呼蘭)소학교에 처음 입학했으나 1년 뒤에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고국에 돌아와야 했다.
대구 외곽의 허름한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10살 난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느라고 학교에는 다니지도 못했다.
“돈이 없어 나는 처음에 학교에도 못 갔다.
보통 아이들보다 2∼3년 늦게 그것도 정식학교는 자리가 차서 금강학원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내가 1학년을 만주에서 다녔으므로 2학년에 들어갔다가 공부를 잘해서 곧 4학년으로 월반했다.
4학년 2학기 때 희도(喜道)소학교 5학년에 시험을 쳐서 진학했다. 소학교는 정식으로 2년밖에 못다닌 셈이다.”(김성익, <전두환대통령 약전>)
그렇게 하여 만 16세에 소학교를 졸업했으니 동급생보다 서너 살은 나이가 더 많았고, 그 덕택에 그는 동급생이면서도 그들의 리더 노릇을 자연스레 할 수 있었다.
소학교를 나온 뒤 6년제 대구공립공업중학교(대구공고) 기계과에 진학한 그는 신문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을 했던 때문인지 학업성적은 보통이었지만 스포츠에 자신이 있었다. 특히 축구부를 이끌면서 동급생 사이에서 두목 기질의 편린을 보였다.
육사에 들어간 뒤에도 축구부 주장으로 교우의 폭을 넓히며 동료들을 리드해 나갔다.
골키퍼였던 그의 활약에 힘입어 육사는 전국대학 축구대회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훗날 대통령이 된 그는 “골키퍼는 할 게 못 됩니다.
다른 사람은 백 번 실수하다가도 한 번 골을 넣으면 스타가 되는데 키퍼는 백 번 잘하다가도 한번 실수하면 욕을 먹어요”(<전두환육성증언>)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는 광은 나지 않으면서 책임은 무거운 골키퍼의 역할이 구성원 전체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리더의 몫이란 것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훗날 그는 “나는 부하들에게 100% 충성한다.
그러나 나는 부하들이 50%만 충성하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요약한 일이 있다.(최진, <대통령리더십 총론>, 2007)
그가 속한 육사 11기(정규 1기) 가운데 성망이 높았던 생도가 2명 있었다.
그 하나는 입교 이래 죽 1등을 해온 김성진(金聖鎭)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한 책임감, 타고난 친화력 그리고 체력에 바탕을 둔 근면성 등으로 주목을 받은 전두환이었다. 학업 성적은 중간 이하였는데도 동료들 사이에서 성망이 높았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적인 폭이 넓었다는 것을 뜻한다.
골키퍼로서 팀워크를 중시하던 그가 육사 졸업앨범에 남긴 ‘멸사돌진(滅私突進)’의 사자성어는 사전에도 없는 그가 만든 성어였던 것 같다. ‘멸사’는 리더로서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뜻이고, ‘돌진’은 “내가 비록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군대생활에서는 기필코 으뜸가는 장교가 되겠다”고 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는 선두주자→리더의 뜻이었던 것 같다.
전두환과 5.16
소위로 임관한 후 최전방의 21사단과 25사단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마친 전두환은 1958년 말 한국에서 처음 창설된 김포 제1공수특전대로 발령받아 교육장교로 근무하고 있을 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식을 서둔 것은 이화여대 의예과에 다니던 신부 쪽이었다. 육사 시절 그는 육사 참모장이었던 이규동(李圭東)의 집에 드나들다가 여중 2년생이던 그 집의 딸(李順子)을 만났는데 이 여중생이 자라면서 두 사람이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8년의 나이 차가 있었는데도 신부쪽에서 서둘러 결혼 택일을 받아온 것은 신부 할머니가 어떤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신랑 사주팔자가 ‘만인을 구할 훌륭한 인물(대통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천금성)
결혼 후 전두환은 예정되어 있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뱀을 잡아 먹으며 생존하는 레인저(ranger) 훈련을 받은 뒤 귀국, ROTC 교관으로 서울대 문리대에 파견 나가 있다가 5·16을 맞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월남에서 백마부대 29연대장을 하던
시절 예하기지를 방문해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5월 17일 아침 그는 육군본부로 찾아가 거사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과 면담을 청하고, 5·16의 주체가 숙군 대상자였던 장도영(張都暎)이 아니라 젊은 장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박정희임을 안 뒤 육사 생도들의 5·16지지 시가행진을 제안했다.
5월 18일 아침 전두환의 설득을 받은 육사 생도 800여명이 동대문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벌인 시가행진은 그때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국민과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공로 때문이었는지 박정희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있었다고 전두환은 회고했다.
“장도영 사건이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보고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냐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 해라고 해. 아닙니다...
...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박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전두환육성증언>)
박정희의 신임을 얻은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이 된 것을 필두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과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으로 일선에 나갔다가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경복궁 주둔)으로 청와대에 다시 돌아왔다. 이 무렵의 전두환을 당시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호걸형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 중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웠고,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가장 의존하는 지휘관이라고들 했다. 김신조 등 북한 기습조 31명이 세검정까지 진출해 청와대가 위협을 받을 때 전두환 대대장은 박격포를 세검정 사거리에 발사했고, 조명탄 덕에 북한기습조가 놀라 전부 흩어졌다.
이후 공비들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김용운, <일요신문>, 2010년 6월 18일) 이 일로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1969년 4월 14일, 전두환 중령은 육사11기 이후의 동창회인 북극성회(北極星會) 회장에 선출됨으로써 리더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그는 동기생 156명 가운데 첫 번째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육사를 졸업할 때 선두주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는 1970년 4월 22일 모교인 육사를 방문하고 “본관은 재학 중 성적이 중간에도 못 미쳤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본관은 1등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1등의 파이널은 비단 육사를 졸업할 때의 그 순간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본관은 1등을 위해 육사에 입교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끊임없이 공부해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이제 본관은 우리 동기생들을 앞질러 1등을한 것입니다”(천금성)라고 연설하여 후배 생도들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려온 그는 이 무렵 육사11기 이후의 장교와 생도들 사이에서 명실상부한 리더로 부상해 있었다.
전두환과 청와대
1973년 ‘윤필용(尹必鏞)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모반 혐의로 수십 명 연행되었다.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이 무렵 제1공수특전단 단장이 되어 있던 전두환 또한 화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윤필용이 후원해주던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호실장 박종규가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사람의 운이란 묘한 것이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남으로해서 그는 오히려 손영길(孫永吉) 대령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하나회의 1인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실각했더라면 3년 뒤 청와대로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경호실 근무였다. 이로써 그는 1961년 민원비서관, 1967년 수경사 제30대대장에 이어 세 번째로 청와대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의 경호실장은 차지철(車智澈)이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피스톨 박(박종규)’보다 한 술 더 떠 방 한쪽에 ‘각하가 곧 국가다’라는 표어를 써 붙이고 각하를 경호한다는 명분 아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신설한 차장 자리를 차관급으로 격상시킨 인물이다.
그는 ‘대통령경호위원회’라는 희한한 기구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장·국방장관·내무장관·검찰총장·치안본부장·육해공군참모총장을 위원으로 두고 그 자신이 위원장 자리에 앉음으로써 사실상의 권력 2인자로 군림하는 야릇한 수완을 발휘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전두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속성과 메커니즘을 터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군인이 권부 주변을 맴돌면 정치군인이 되기 쉽다.
그는 차지철 밑의 차장을 보좌하는 차장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상관인 차지철을 존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적고, 육사가 아닌 광주포병학교 출인의 그를 깔보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차지철이 원래 내 밑에 있었어. 그 사람이 육사12기 시험에 떨어지고 그 다음에 포병학교를 가서 포관이 된 사람이지. 자존심이 강해. 나와 함께 미국에 갔는데 그 사람이 미국 사람과 싸움을 해서 퇴교를 당하게 돼 있었어…….차 대위가 외국인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것이라고 내가 변호를 해서 결국 용서를 받았어. 그 사람이 육사12기 시험에 떨어진 것을 스스로 비밀에 부쳤는데 육사 출신을 매우 싫어했어.”(<전두환육성증언>
↑방미 중인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워싱턴 방문을 위해
앤드루 공군기지에 도착,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그는 차지철과 사이가 나빴다. 그 때문이었는지 경호실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일선으로 나갔다.
제1사단장시절에 국민의 관심사였던 북한의 남침 땅굴 탐색작업에 나섰다.
그는 땅굴로 의심되는 지역에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침식하며 부하들을 독려하는 열의를 보인 끝에 1978년 10월 17일 마침내 땅굴을 발견했다. 이 공로로 그는 5·16민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시 청와대 주변으로 끌어들였다. 마침 보안사령관이 공석이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金桂元)은 차지철을 견제할 보안사령관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이 전두환을 추천하자 김계원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전두환이를 보안사령관에 앉히면 각하의 신임이 두터우니 차지철이와 김재규 (金載圭)가 지금처럼 알력 다툼을 할 수는 없을 거야. 전두환이가 바로 묘책이고 적임자로군!” 하고 대통령에게천거했다.(송우, <노재현이 전두환을 잡지 않은 이유>)
이렇게 하여 전두환은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보안사가 계엄하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해 여름까지 강구된 것이 합동수사본부 설치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 하면서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월간조선>,1988년 5월호)
10·26 뒤에 등장하는 합동수사본부가 그해 여름부터 검토되고 있었다는 점이 묘하다.
전두환과 10.26
이 대목에서 나는 지난날 서양사 시간에 들었던 로마제국의 멸망사가 문득 떠올랐다.
로마제국은 말기에 게르만 용병들을 썼다. 그들은 처음에 정치가 무엇인지, 통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굉장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궁궐을 지키면서 가만히 보니 로마 황제가 행사하는 힘의 원천이 다름아닌 자기들 게르만 용병에게 있는 것이었다. 그 점을 알게 되자 게르만 용병 출신의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를 밀어내고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전두환에게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싶다.
물론 그는 누구처럼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한 적은 없다.
그 자신도 훗날 민복기(閔復基)·박일경(朴一慶)과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나는 꿈에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어요”라고 실토한 일이 있다.(<전두환육성증언>)
적어도 10·26 전까지는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밤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이 확인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는 곧장 합동수사본부부터 차렸다.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보안사가 그해 여름 강구해두었던 방안 그대로였다.
그리고 10월 27일 아침, 중앙정보부차장·검찰총장·치안본부장 등 정보수사기관의 장을 전부 보안사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보안사에 들어올 때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위병들로부터 삼엄한 몸수색을 받았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합동수사본부장 밑의 서열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윽고 회의가 시작되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의 업무한계는 중앙정보부·검찰·군검찰·경찰·헌병·보안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는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각 권력기관을 합동수사본부 밑에 간단히 배속시켜 버렸다.
그 뒤 각 기관장은 전두환이 보안사의 법무참모를 시켜 하달하는 업무지침을 전달받음으로써 얼결에 전두환의 수하가 되고 말았다. 이 기민하고 능숙한 솜씨에 보안사 직원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권부에서 세 번이나 일한 전두환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특히 ‘대통령경호위원회’라는 희한한 기구를설치함으로써 제2인자의 자리를 가볍게 차지했던 차지철의 솜씨도 목격한 터였다. 이 점에서 그는 정치군인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에 대한 수사는 그 자신의 더 큰 목표를 위한 하나의 좋은 구실일 뿐이었다.
그는 새 국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崔圭夏)는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였다. 따라서 그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권력의 중심은 자기에게 기울게 되어 있었다.
그가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에게 5·16을 연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이 시점부터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겐 군부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사조직이 있었다.
1962년 친목을 목적으로 육사11기 졸업생 가운데 영남출신의 우수한 장교들로 결성한 ‘하나회(一心會)’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모임은 뒤에 박정희의 친위그룹으로 발전하면서 ‘일심(一心)’이란 휘호와 군도 그리고 특별진급이라는 대통령의 특별배려를 받으며 성장해온 조직이었다.
이에 따라 한때 하나회 회장이었던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나 그 고문이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은 하나회의 리더 격인 전두환에게 풍부한 활동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전두환은 이 자금을 혼자 착복하지 않고 다시 회원들에게 통크게 배분했다.(池東旭, <韓國大統領列傳>, 東京, 2002)
이런 태도가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함께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
게다가 하나회의 주요 멤버들은 서로 기맥을 통해 대통령경호실과 군부 내의 요직을 서로 돌아가며 맡고 있었다.
전두환은 이들 하나회 회원과 공수특전단장 시대의 특전사 인맥을 집결시켰다.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한 판 붙기 위함이었다.
전두환과 12.12사태
승산은 있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된 자를 밝힌다는 명분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청와대비 서실장 김계원을 체포한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에게도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키는 등 수사망을 좁혀 들어 갔다.
권력을 한몸에 지니고 있던 정승화로서는 전두환의 이런 건방진 태도가 불쾌했다.
그래서 노재현 국방장관과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동해방위사령관에 전속시킬 생각임을 알렸다.
이것이 실수였다. 인사는 언제나 전격적으로 단행해야 뒤탈이 없다.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추천했던 노재현은 다음 날 국방차관 김용휴(金容烋)와 내무 장관 김종환(金鍾煥)을 만난 자리에서 정승화가 골프장에서 한 말을 들려주었는데, 이 말이 곧장 전두환에게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제보자는 국방차관 김용휴였다고 한다.(송우)
이에 전두환은 즉시 보안사와 하나회 그리고 특전사의 인맥을 동원하여 정승화의 시해사건 연루설을 군 내부에 퍼뜨렸다. 명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육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위로는 소장에서부터 밑으로는 소위에 이르기까지 정규 육사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었는데, 이들은 바로 그 정규 육사가 시작된 11기의 대표적 존재였던 전두환을 지지했다.
당시 주한미대사 윌리엄 H 글라이스틴에 따르면 미국도 전두환 세력에 대한 군의 확고한 지지에 놀랐다고 한다. 마침내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쯤 전두환을 필두로 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비상계엄하였음에도 자신들의 부대를 벗어나 ‘생일집 잔치'라는 암호명에 따라 경복궁 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했다.
이들은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수도권 지역의 무장병력 6000여 명을 동원해 육군본부·국방부·수경사·특전사 등을 점거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이 보낸 약 80명의 수사본부 병력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덮쳤다.
이 시각 공관에서 저녁을 먹은 뒤 TV 뉴스를 보고 있던 정승화는 갑자기 들이닥친 보안사의 두 대령(許三守·禹慶允)에 의해 양팔을 붙들렸다.
“공관에서 경호실 요원 복장을 한 자가 내 가슴에 총구를 갖다 대고 가자고 할 때 ‘이게 뭔가 심상치 않구나.
단단히 나를 의심하고 조사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끌려간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내가 그들이 그런 소리를 할 때 ‘쿠데타’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얼마든지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나는 부하들을 너무 믿었고, 군 조직을 너무 믿었다.”(정승화,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1987)
그날 정승화가 보안사 서빙고 지하실로 연행되던 시각에 전두환은 20여 명의 경호병을 데리고 삼청동 공관으로 대통령 최규하를 찾아가 정승화의 체포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국방장관의 허가부터 받아 오라”며 버텼으나 이미 정승화는 체포된 뒤였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글라이스틴은 다음 날 아침 밴스 미 국무장관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이것은 사실 상의 쿠데타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고 있습니다. 민간 합헌정부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징후는 군의 중추기관들이 일단의 ‘야심적인 젊은’ 장교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장악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글라이스틴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1979년 12월 13일)
그러나 전두환은 12월 14일 글라이스틴과 만났을 때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나 혁명으로 평가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정승화를 체포한 것은 단지 박대통령 암살의 수사 때문이지 개인적 야망이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내 생각이나 우리가 입수한 정보와는 완전히 상충되었다”고 글라이스틴은 회고했다.(Gleysteen,, 2000)그건 쿠데타였다. 그날 국가의 모든 권력이 전두환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미국
글라이스틴이 1980년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의 제목은 <얽힌 것은 많고 영향력은 적고(Massive Entanglement,Marginal Influence)>다.
이 제목은 당시 그와 미국 정부가 취했던 대한정책의 입장을 정확히 반영한 것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민주화의 길을 걸을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 정치가 뒷걸음질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12·12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12월 15일자의 AP통신은 서울발 기사에서 “12일 밤 일어난 군부 내의 숙청에서 한국의 매파 장군들은 서울 시내에 한국군 중 가장 정예부대인 제9사단과 다수의 탱크를 동원했는데, 이 같은 한국 군부의 행동은 주한 미군수뇌부에 사전통고나 승인 없이 취해진 것으로서 주한미군 수뇌를 격노케 했다”고 전한 다음 미 군사 소식통을 인용하여 “한국군의 출동은 적어도 군대의 윤리와 군인으로서의 예절을 깬 것이며, 지휘명령 절차의 일반적 기준과 크게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당시 주한미군과 주한미대사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가 지시하여 허화평이 올린 <5·16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5·16 때도 군부 거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주한미군과 주한미대사관은 AFKN 라디오로 반대 성명을 방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5·16 세력에 대한 미국의 승인이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이 같은 멘트 또한 허화평 등이 연구해서 올린 <5·16교본>에 들어 있었던 대사다.
전두환이 돌아간 뒤 글라이스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보낸 김종필의 대사 기록을 찾아냈는데 전두환의 말과 김종필의 말이 놀랍게 일치했다고 미국의 한 한국학 교수가 지적했다.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을 찾아온 김종필은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록은 매그루더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마크 피터슨, <신동아> 1989년 5월호)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신군부가 5·16의 선례를 깊이 연구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만큼 전두환은 이 거사의 결론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엔 민간 정부의 지지와 민주화의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론 아무 편도 들지 않으면서 내부 싸움의 추이를 지켜보다 이긴 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이 안전하고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이 일시 역쿠데타를 수행할 대체세력을 찾았던 것처럼 말했지만, 만일 그랬다면 그건 새로운 세력을 길들이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냉전시대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안보였고, 그 점에서 군사정권은 미국이 가장 안도할 수 있는 세력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글라이스틴이 선택한 <얽힌 것은 많고 영향력은 적고>라는 회고록의 제목은 실상을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광주민주화운동 후 야기된 한국인의 반미감정에 대해 ‘영향력이 적어 미국으로서도 어쩔 수없었다’는 일종의 해명성 제목이었다고 할수 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 민중 쪽이었다.
<5·16교본>에 민중에 대한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5·16 당시 민중은 군사세력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80년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전두환과 서울의 봄
당시 국민적 열망은 민주화였다. 유신시대를 막 벗어난 민중과 유신정권하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여왔던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은 유신체제의 붕괴로 그들의 염원인 민주화를 기대했으나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가 역사의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린 것이 아닌가 하여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그러나 톱니바퀴가 역회전한 것은 아니었다. 회전의 타성이 멈추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만 톱니바퀴가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들 했는데 군부독재시대가 끝나고 민주정치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으로 실제 이 표현(ソウルの春)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일본 매스컴이었다고 한다.(鳥羽欽一郞, <これからの韓國>, 東京, 1984) 당시 보안사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던 한국 언론으로서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을지훈련 나흘째인 1985년 8월 22일 서울광화문
일대에서 실시된 공중 강습대비 훈련상황을 약 20분간 점검했다.
서울의 봄을 주도한 것은 야당과 재야세력과 학생이었다.
<5·16교본>에 없는 이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다음 대책을 강구하느라고 아직 수면위로 부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군부의 리더인 전두환의 모습이 표면에 떠오른 것은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겸직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이 베일을 벗자 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4월 15일자 <뉴욕타임스>는 장문의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정보부장직은 보통 민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 장군의 임명 소식은 한국 국민에게 놀라움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서울의 봄’을 끝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안보카드를 꺼냈다. 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온 전통적 수법이었다.
그래서 전두환이 부장으로 취임한 중앙정보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를 ‘북괴남침설’과 연계된 소요로 몰기 위해 이 사실을 언론에 일제히 발표했으나미 국무부가 성명을 통해 “한국에 대한 어떤 유의 공격도 임박해 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고 중앙정보부의 ‘북괴남침설’을 전면적으로 부인해 버렸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도 당시의 육군본부 또한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중앙정보부의 첩보는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두환을 면담한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도 “전두환 씨가 국내 정세를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북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경향신문>, 2010년 5월12일)
이처럼 국가 위기 조장의 구실로 삼으려던 ‘북괴남침설’ 미국 정부에 의해 전면 부정되자 신군부는 다른 방식으로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핵심은 김대중(金大中)이었다.
신군부는 대권 경쟁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3김(金鍾泌·金泳三·金大中) 가운데서도 김대중을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했는데, 이 시기 한국특파원이었던 한 일본 기자는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자유의 몸이 된 김대중 씨의 경우 그 활동은 특히 활발했다. ‘크리스천 민주주의자’로 내외에 널리 알려진 명성을 배경으로 그는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신민당 총재의 자리를 김영삼 씨로부터 거부당하자 신민당의 조직을 깨가면서 그의 천재적인 대중 선동력과 조직력으로 널리 대중 사이에 파고들어갔다.
반체제적인 발언으로 격정적인 행동파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의 그의 평판도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하여 김대중 씨는 큰 세력으로 급속히 성장해 가고 있었다.”(鳥羽欽一郞)
5월 1일 신군부 주도의 계엄사는 전군지휘관회의를 개최하고, “법치주의의 원칙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5월 10일을 기해 가두시위를 단행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신군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병력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8군사령관에게 알렸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5월 7일 국무장관에게 “한국군이 우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다음의 병력 이동을 미군사령관에게 알려왔습니다…….
요청이 있을 시 유엔군사령관은 병력 이동을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타전했다.(이흥환,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 2002, 재인용)
결국 미국은 5·17정변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열흘 전쯤에 신군부의 병력 이동을 사실상 승인한 셈이었다.
전두환과 광주 민주화운동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고 대형화되자 5월 17일 저녁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계엄군이 움직였다. 그들은 눈엣가시였던 김영삼·김종필·김대중 3김을 가택연금 또는 구속하는 동시에 재야인사 및 학생 600여명을 전격 연행했다.
그리고 그날 자정을 기해 계엄령 전국 확대를 선포하면서 탱크로 무장한 군병력을 주요 도시에 투입했다.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국회도 봉쇄되었다. 5·17정변은 서울에서 일어났는데 불꽃은 묘하게도 다음 날 광주에서 튀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촉발 원인 중 하나가 호남 출신의 대권 유력 후보였던 김대중의 체포 소식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군중은 ‘전두환을 죽여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필립 퐁스 기자, <신동아> 1989년 5월호) 분노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곧 전면적인 봉기로 확대 되었다. 시민들은 도주한 경찰을 대신해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1980년 6월 2일)
이처럼 광주가 시민군에 장악되는 사태로 발전하자 신군부는 진압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때 미국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는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승인한 것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미국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할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가 합법적으로 집권하고 장기적으로 폭넓은 국민 지지를 확보하며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 1980년 8월 8일자)이라고 답한 그해 8월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는 ‘광주사태’의 진압이 미국의 용인과 지원 아래 단행됐다는 정보를 흘렸다.(池東旭)진압의 결과는 참혹했다. 9일간에 걸친 광주민주화운동은 사망자 163명, 행불자 166명, 부상자 3139명의 처절한 흔적을 남겼다. “한국에 영원한 상처를 남긴 사건”이라고 글라이스틴이 정의한 광주 진압의 책임은 대체 누구에게 있었던 것일까?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은 12·12, 5·18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盧泰愚)에게는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하지만 발포명령자와 지휘권 2원화의 문제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2007년 7월 24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두환 각하:난동시에 군인 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라고 명기된 문서를 발견, 전두환이 군 수뇌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밝혀냈다.
물론 발포명령자를 명기한 문서를 찾아내지는 못했고, 전두환 등 관련자가 진술을 기피하는 바람에 실체는 규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의 리더십이 공격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사태가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유혈사태는 계속 그의 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두환과 국보위
12·12로 실권을 잡았고 5·17의 2단계 조치로 그 실권을 제도화한 것이 광주 진압 직후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 책위원회(국보위)였다. 명목상의 국보위 위원장은 대통령 최규하였지만 실권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에게 있었다.
국회는 형식상 그대로 두었으나 문을 닫아 버렸고, 국무회의는 국보위의 결정을 추인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은물론 국방장관, 국무총리, 대통령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였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죽을 것이 살고 살 것이 죽었다. 광주 진압의 여진이 가라앉지도 않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발족한 이 국보위는 허화평이 보고한 <5·16교본>에 따라 1961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를 흉내 낸 기구였다.
이것뿐 아니라 신군부가 취한 행동은 1961년의 쿠데타 시나리오를 전부 덧쓴 것이었다. 국보위에서 설치하기로 결의한 삼청교육대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또한 5·16의 국토건설단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그가 활용한 <5·16교본>의 결정판은 대통령 최규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 달라고 요구한 일이었다. 이는 지난날 박정희가 미국 방문을 앞두고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 달라고 요청했던 사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 직후 전두환은 압력을 넣어 최규하를 자진 사퇴시키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9%의 득표율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삼청동 교육공무원 연수원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을
갖고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박충훈 국무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광주의 유혈사태와 삼청교육대 등의 무자비한 폭압정치를 본 시민들은 이 시기 전두환 정부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저 무서움에 치를 떨면서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5공의 신헌법 확정과 함께 국보위를 해체하고 대신 국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설치했다.여기에서 1980년 11월 3일 정치풍토쇄신법이라는 것을 제정했는데, 이는 18년 전 탄생한 정치활동정화법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이 법이 제정된 직후 835명의 정치활동 규제대상자가 발표되었고, 2주 후 ‘구 시대 정치인’ 567명의 정치활동 금지대상자가 발표됐다. 여기에는 이미 그해 8월 13일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영삼, 그해 9월 11일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법으로 ‘구 시대 정치인’을 강제은퇴시킨 이유는 새로 창당되는 민주정의당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민정당에 입당하여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어 2월에는 민정당 후보로 12대 대통령에 출마했다.
재미있는 점은 모양을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급조된 정당, 곧 국민당의 김종철(金鍾哲), 민권당의 김의택(金義澤),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 등이 들러리 후보로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 체육관선거에서 전두환은 90.2%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시 TV를 보던 집안 어른이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두환과 레이건
사극을 보고 있자면 조선 임금이 중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받아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일을 중시했던 이유는 제후국 신하의 도리니 뭐니 하는 그런 의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책봉을 받아둬야 경쟁자들이 자리를 넘보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출발한 전두환에게는 미국의 공식승인이 절실한 입장이었다. 승인을 내외에 확인시키자면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 여기에서 한미정상회담의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 일을 뒤에서 성사시킨 주역이 외무장관 노신영(盧信永)이었다.
그 결과 제40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1981년1월 21일 전두환에게 2월 1∼3일에 워싱턴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서한을 보내왔다. 날짜가 불과 11일 뒤라 너무 긴박했다. 보통 이런 식의 일정으로 타국의 대통령을 초청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2·12사태 이후 지속되어온 한·미 간의 불편한 관계를 씻어내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할 때 전두환으로서는 다른 불평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레이건이 취임한 후 백악관을 방문하는 첫 외국 원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국민용으로는 낯이 서는 일이었다.
전두환은 이틀 만에 초청에 대한 감사의 답장을 보냈고 초청 날짜에 맞춰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쿠데타와 유혈로 정권을 잡은 한국 대통령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접은 싸늘했다.
국빈방문(State visit)은 고사하고 공식방문(Official visit)도 아닌 실무방문(Working visit)이었다. 워싱턴 덜레스국제공항에서는 아무런 환영행사도 없었다.“정상회담 자리에는 공식통역관도 없이 한국의 외무장관이 통역으로 배석하고, 그나마 두 정상이 마주앉은 시간은 단 10분간이었다.
양측의 통역시간과 회동 앞뒤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빼고 나면 길어야 5분. 서로 마주 앉았다가 금방 일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대통령이 직접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마저 배정되어 있지 않았다.”(이흥환, <신동아>, 2004년 8월호) 서러울 정도의 푸대접이었다. 그러나 대접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의 공개적인 ‘승인’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를 얻어내는 데는 상응하는 대가가 뒤따랐다. 당시 헤이그 국무장관과 노신영 외무장관 사이에 오간 그 대가의 내용은
①박정희시대부터 추진해오던 핵개발 포기
②박정희시대부터 개발해오던 핵미사일 폐기
③미국 무기(F-16 및 호크미사일 등) 구매
④미국산 쌀의 추가구입 등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국익을 얻었고 정통성 없는 한국 대통령은 미국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언론은 전두환의 방미 결과에 대해 이런 분석적인 기사는 한 줄도 없이 그저 “한미 새 동반자 시대” “철군 불안에 깨끗한 종지부”라는 식의 찬미기사만 내보냈다.
어떤 신문은 전두환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가진 기자 회견의 본 내용보다 그 뒤의 유머를 두고 “위트로 이끈 오찬장 화기의 폭소”라는 박스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 내용은 미국 기자의 질문에 남·북한의 군사력을 자세히 설명한 그가 말미에 “지금까지 한 얘기는 한국에서 1급 비밀에 속하는 내용으로 만일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되니 보안을 지켜주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임으로써 참석 미국기자들의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는 것이었다.(鳥羽欽一郞) 푸대접을 받고 상응한 대가를 치렀다 하더라도 미국의‘승인’을 받고 돌아가는 그의 마음에 여유가 생긴 때문이었을까?
유혈진압이나 삼청교육대 등의 폭력정치와 달리 자연인 전두환의 성격은 본래 밝고 명랑한 데가 있었다고 여러 자료들은 전한다.
전두환과 과외공부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성공한 전두환은 국내 문제로 눈을 돌렸다.
눈앞에 산적한 국내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경제가 파산 위기에 직면해있다는 점이었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부동산값은 치솟고 기업은 부도로 쓰러지고 화폐개혁설과 사채동결설로 민심이 흉흉했다.
1970년대 들어 무리한 중화학공업 투자, 수출지원 금융, 농촌 주택개량사업 등으로 경제는 중병을 앓고 있었으며 1978년 말의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를 질식직전으로 몰고 갔다.”(김충남,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특히 1980년도의 물가는 44%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심한 가운데 생산된 한국 상품은 국제경쟁력을 크게 상실했다.
수출이 잘되지 않으면 수출을 겨냥하고 지은 대규모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5.6%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2월 1일 전남도청을 연두순시,
전석홍 지사로부터 업무계획 보고를 받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제수지 악화였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제2차 오일쇼크로 2배 이상 치솟은 원유수입가를 외채로 해결해온 바람에 외채 규모가 국민총생산의 50%가까이 늘어났고, 원리금 상환만 50억 달러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게다가 12·12사태 이래 5·18 등 요동치는 정국을 겪으면서 정치·사회 안정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외채 조달의 문제도 쉽지 않았다.
당시 막막했던 실정에 대해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고 보니 나라가 얼마나 어렵게 돼 있던지 경제가 이쪽으로 봐도 저쪽으로 봐도 캄캄했습니다. 경제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 맡은 게 후회막급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전두환육성증언>)
여기에서 전두환이 취한 행동은 경제를 아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자는 것이었다. 군인 출신의 그가 복잡한 경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경제제일주의를 추구했던 박정희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직 정권을 잡기도 전인 1979년 여름 박봉환(朴鳳煥)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 “60만 군대를 지휘하다 보니 경제를 모르고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디다.
재무부의 이재국장도 지냈고 박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운 경제관료라고 들었는데, 나한테도 경제에 관한 공부를 시켜주었으면 합니다”(이장규)하고 경제 과외공부를 부탁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말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자 그는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의 김재익(金在益)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시작했다. 김재익이 경제의 기본 원리부터 당면문제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감복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이때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 조건을 말하자 전두환은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이장규)
그 후에도 김기환(金基桓)·사공일(司空壹)·차수명(車秀明) 등으로부터 경제 과외수업을 계속해나갔던 전두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경제기획원 차관보, 국세청과장까지 토요일, 일요일에 불러서 배웠다.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장관 보고만 아니고 실무자의 전망과 정책 방향도 보고토록 했다. 그 사람들한테서 하루 3∼4시간씩 보고를 받았다. 80년 말까지 경제교수를 아침 7시에도 부르고 일과가 끝나자마자 뒷방으로도 부르고…….”(<전두환육성증언>)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지난날 영어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기상시각인 5시30분까지 혼자 공부하던 때처럼. 그는 빨리 습득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몇 달간 경제공부에 집중하고 나니 “나 나름대로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이정립되더라”고 그는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최우선 정책으로 밀고 나가게 된 것이 ‘물가안정’이었다.
전두환과 나카소네
솔직한 성격이지만 또 아는 것을 ‘떠벌이기’ 좋아하는 그는 경제에 대해 감을 잡게 되자 크게 ‘떠벌이기’ 시작했다.
“중점은 물가안정이야. 물가안정이 돼야 소득의 균형분배가 됩니다. 그래야 임금 인상분만큼 실질소득이 돌아갑니다. 그만큼 분배가 됩니다……. 성장이 5%, 물가가10%라면 그것은 실패한 경제입니다. 소비자물가는 3%이하가 되도록, 이건 꼭 지켜야 돼.”(<전두환육성증언>)
그는 나라를 좀먹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3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이고 둘째, 통화증발을 막으며 셋째,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물가를 잡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눈 딱 감고 밀어붙였다.”(김충남)
이에 따라 그는 한국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되어온 중화학공업을 과감히 수술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며, 금리 인하 조치와 공정거래 제도를 도입하는 등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물론 이런 방안을 제시한 것은 경제전문가 김재익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두환이 이를 수용하고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실천에 옮기기 쉽지 않은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새로 시작한 안정우선정책은 1960∼1970년대의 성장우선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통치의 모든 것, 경제제일주의까지도 박정희를 모방했던 그가 박정희와 차별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박정희를 존경했지만 그를 뛰어넘으려는 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전 대통령은 내심 박 대통령을 무척이나 존경하면서도 또 ‘나는 더 잘해야지’ 하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라이벌 의식도 있는 것 같았다.”(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 2005)
허리띠를 졸라매는 안정화 정책은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그가 총재로 있던 민정당은 선거를 겨냥하여 예산증액과 공무원의 봉급인상을 요구했고, 경제부처는 수출증대를 위해 환율인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단호했다. 박정희시대의 유산인 고물가·고금리·고임금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그는 경제논리에 배치되는 어떤 정치논리도 수용하지 않았다. 당시는 그의 말 한마디면 모든것이 간단히 정리되던 시절이다.
역설적이지만 권위주의 체제의 장점도 있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경제전도사가 되어 국민 설득에 앞장섰다.
“국무회의, 수출진흥확대회의, 중소기업진흥 확대회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정당, 각계 대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자신의 경제정책을 설명했다. 그야말로 대통령 자신이 경제정책의 세일즈맨이었다.
이에 따라 경제장관, 경제비서관들도 정책 세일즈맨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공무원 교육의 핵심도 경제교육이 되었다.”(김충남)
이런 열기 때문이었는지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고질적 인플레이션이 1982년부터 잡히기 시작했다. 44%까지 치솟던 인플레이션이 한 자릿수, 그것도 4.7%까지 뚝 떨어진 것이다. 모두 놀랐다.
물가가 안정되면 국민저축률이 높아져 자력 성장의 기반이 확보된다. 하지만 여전히 외채는 많았고, 무역적자는 계속되었으며, 산업에 투자할 외자 조달은 원활하지 못했다.
타개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전두환을 찾아온 일본 기업인이 있었다. 이토추(伊藤忠)종합상사의 회장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였다. 전전 대본영 작전참모를 지낸 세지마는 전후 ‘일본주식회사’의 개념을 도입한 주역으로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기업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무렵 터진 ‘한·일 교과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지만 본질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문세광사건 이후 단절되다시피 한 한·일 관계의 수복을 위해 당시 수상에 막 취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가 보낸 밀사였다.
세지마는 나카소네 수상의 방한을 성사시키는 조건으로 경협자금 40억 달러 제공을 거론하면서 한국 측에서 안보부담금조로 요구하는 형식을 취해 명분을 잡으라고 제안했다.
1983년 1월 11일 서울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가진 나카소네는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한국에 40억 달러의 경협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경협자금은 당시 부족한 산업자금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한국 경제가 제2의 도약을 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날 공식만찬을 끝낸 후 있었던 2차 술자리를 스케치한 미국 시사주간지는 “술잔이 거듭되자 두 지도자는 서로 돌아가며 힘껏 애창곡을 불렀다.
나카소네가 선택한 3곡 중의 하나는 1961년 한국에서 히트했던 낭만곡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였고, 전두환이 자신의국빈에게 들려준 노래는 2차대전 전 일본에서 히트했던 사랑노래 <그림자를 쫓아서(影を慕いて)>였다”라고 보도했다.(1983년 1월 24일)
재미있는 것은 나카소네가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부르도록 막후 연출한 것이 세지마였다는 사실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돌아가신 선친이 좋아해서 나도 귓등으로 들어 아는 1932년의 이 절절한 사모곡을 전두환이 1983년에 불렀다는 점이다. 소년시절의 애창곡이었던 것일까?
전두환과 경제대통령
이승만의 반공주의에 필적할 만한 박정희의 테마는 경제제일주의였으나 전두환은 그만 한 테마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잡은 것이 올림픽 개최였다고 볼 수 있는데, 5공 내내 귀가 따갑도록 들은 ‘88올림픽’을 전두환에게 제안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세지마 류조였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李秉喆)의 권고로 1980년 6월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을 1차 만났고, 다시 그 해 8월 전두환의 요청으로 도큐(東急)그룹 회장 고토(五島昇)와 함께 서울을 방문해 전두환을 다시 만났다.
이날 전두환이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광주 진압으로 잃은 민심 회복의 방법을 묻자 세지마는 올림픽을 개최해 보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세지마 자신은 동행한 고토가 제안했던 것으로 회고록에 적었다.“고토 씨는 일본의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올림픽 유치나 세계박람회 유치가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장군은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1988년의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나고야가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던 고토 씨도 유치위원이었다. 귀국 후 고토 씨는 나고야 측이 서울올림픽에 반대하지 말도록 조정하느라고 애를 먹었다.”(瀨島龍三, <幾山河>, 東京, 1996)
그러나 올림픽 유치의 발상 자체는 박정희시대에 나온 것이었다. 그 방침이 결정된 것은 1979년 9월이었고, 이어 그해 10월 초 서울특별시장이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으나 10월 26일 대통령 시해사건이 생기면서 흐지부지되었다가 세지마에 의해 다시 리바이벌된 것이었다.
올림픽 유치건은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이규호(李奎浩) 문교부 장관의 발의 형식으로 제기되었으나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결단력은 전두환의 특성이다. 그는 1981년 초 정무장관 노태우로 하여금 올림픽 유치활동에 적극 나서도록 지시했다. 이후 관민합동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결실을 거두게 됐다.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기적적으로 52대27, 예상을 뒤엎고 서울이 나고야를 꺾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하고 발표하자 세계가 놀랐고 대한민국은 환호했다. 유치 대표단은 귀국 즉시 김포비행장에서 기자회견만 하고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격려를 받았다.”(김용운)
정권 탈취의 어두운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유치한 88올림픽은 초기에 국력 낭비라는 견해가 많았으나, 이로 인한 한국의 이미지 개선은 오히려 한국 상품에 대한 긍정적 광고효과를 가져와 수출 증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게다가 1985년 말을 기점으로 달러가치 하락, 원유가격 하락, 국제금리 하락이라는 이른바 ‘3저현상’의 신풍(神風)이 불면서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86년부터 한국 자동차가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 해부터 선진국 신문과 TV에 한국 대기업의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또 이 때부터 전자산업 수출이 기계산업과 섬유산업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는 전두환이 집권 초 지시하여 마련한 ‘전자산업육성방안’의 청사진에 따라 반도체·컴퓨터·전자교환기 부문을 3대 전략산업으로 꾸준히 육성한 결과였다.
김대중시대에 와서 꽃을 피운 IT산업의 초석을 다진 것은 전두환이었다. 공고출신의 그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래서 여건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연구개발비를 국민소득 2% 수준까지 높였던 것이다. 당시 전화교환기를 세계에서 열 번째로 개발하여 ‘1가구 1전화’의 시대를 열게 된 것도 그 같은 성과의 하나였다.
수출이 잘되면서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자 1986년부터는 한때 510억 달러에 달했던 외채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집권 초기부터 전두환이 일관성 있게 추구해온 물가안정정책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 경제를 잘 모를 것 같은 한원로 시인도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서정주,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드리는 송시>, 1987)라고 당시의 물가안정과 무역흑자의 공을 노래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20년 뒤인 17대 대선 때 ‘경제대통령’이란 정치구호가 등장하지만 당시 일선 기자였던 친구 한 사람은 “돌이켜보니 경제적으로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진짜 경제대통령은 전두환이었어”라고 내게 말했다.
전두환과 6·29
그 친구는 행복했을 것이다. 당시 기자들에겐 특혜가 많았으니까. 나라에서 집도 주고 이자없는 돈도 꿔주고 그랬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당근이었다. 그래서 도하신문은 5공 내내 거의 완벽하게 정부에 협조했다.
심지어는 전두환의 전(全)자를 쓸 때 들 입(入) 변이 아닌 사람 인(人)변을 쓰라고 당국이 강요하면 신문은 그런 활자를 만들어 인쇄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면 온전 전(全)자가 ‘사람들의 임금’이란 뜻이 된다. 관언(官言)유착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언로가 열리지 않는 숨막히는 구조 속에서 민중의 불만은 그 출구를 찾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시대에 통용되던 개발독재의 논리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강권통치가 계속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식화 운동까지 진행되었다.
이제 민주화 요구는 계기만 생기면 폭발할 태세였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경찰 고문에 의해 사망하자 경찰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해명을 내놓았다.
이것이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개헌 논의를 중단한다는 4·13담화가 발표되자 정국은 벌집을 쑤신 듯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과 재야 및 학생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원했다.
민중의 시위 참여는 6월 9일 연대생 이한열(李韓烈)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실이 보도되면서 마침내 폭발했다. 수십만의 시민이 연일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6·10항쟁의 규모는 이미 경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자 전두환은 6월 14일 청와대에서 관계자 확대회의를 갖고 군수뇌부에 위수령 또는 계엄령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6월 16일 미 하원 외교위원회는 “마주 달려오는 열차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 사태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6월 17일 릴리 주한미대사는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라”는 요지의 레이건 친서를 전두환에게 전달하며 계엄령 반대의사를 밝혔다.
미국의 반대로 비상계엄을 발동할 수 없게 된 전두환은 작전개념에 익숙한 군출신답게 이 문제를 정반대의 방법, 즉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 묘책은 다름아닌 김대중을 사면복권해 야권을 분열시킨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전두환육성증언>)
그가 급소를 찌른다고 한 것은 ‘6·29선언’을 뜻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1월 1일 청와대에서 병인년 새해를 맞아
자녀들로부터 세배를 받은 후 부인 이순자 여사가 손자를 안아보고 있다.
‘6·29선언’의 담화문을 작성한 것은 노태우 측이지만 그 전략을 제시한 것은 전두환이었다. 이후 대선 날짜가 공시됐다. 후보로 나선 것은 김종필,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4명이었다. 여기에서 2개의 ‘4자 필승론’이 등장한다.
하나는 여당에서 내놓은 ‘4자필승론’이었다. 여당 후보가 하나고 야당 후보가 셋이면 반드시 여당 후보가 이긴다는 논리였다. 당시 국민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바랐다. 그러나 단일화 협상은 깨졌고김대중은 독자 출마를 선언하면서 또 다른 ‘4자필승론’을 내놓았다.
그 논리는 충청표를 김종필이 가져가고 영남표를 노태우와 김영삼이 나눠 가지면 호남표와 수도권표를 독식한 김대중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었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2개의 ‘4자필승론’ 중 승리한 것은 여당의 ‘4자필승론’이었다.
1등인 노태우의 득표율은 36.6%, 2등인 김영삼의 득표율은 28%, 3등인 김대중의 득표율은 27%였다. 양김 득표율의 합계는 55%로 양김이 단일화했다면 ‘가발 쓰고 나온 전태우’ 또는 ‘노두환’을 이기고 군사정권을 종식 시켰을 것 아니냐며 아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의 후보단일화 실패는 양김의 짐으로 남았다.
전두환과 후계자
이 일이 있기 전 전두환은 후계자 문제로 한동안 고민했다. 한때 노신영이나 장세동(張世東) 이야기도 흘러나왔으나 결국 자신의 평생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택했다. 그 방침을 확정하던 날 그는 노태우 등과 술자리를 같이했다.
양주를 25잔이나 마신 전두환은 “노 대표, 자네는 일생 동안 나와 함께 지냈고, 나의 일등 참모장이다” 하고 구수하게 이야기를 꺼내더니 술상에 앉은 일동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께서는 나보다 정말 훌륭한 분이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노후보, 이 나라를 구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분이 노 대표시다.”(<전두환육성증언>)
그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워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여 뒤에서 국정을 원격조정하겠다는 구상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해(日海)재단도 설립했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속성을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평생 전두환을 고분고분 따랐던 노태우는 칼자루를 바꿔 잡자마자 반기를 들었다. 언론도 노태우에게 동조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전두환은 퇴임 직후 연희동 자택으로 자신을 찾아온 노태우의 측근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며 분노감을 표출했지만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이렇다 할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1988년 11월 23일 쓸쓸히 백담사로 떠났다. 그의 몰락이 주는 교훈은 과오 있는 권력은 후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5공이 막을 내릴 무렵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1마리의 토끼도 제대로 못 잡아 절절 매는 판에 그는 3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이같이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만큼 국민들에게 인기없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이장규에서 재인용)
유혈로 정권을 잡았고, 집권기간 내내 강권통치로 임했던 데대한 국민적 반발을 간과한 기사다. 그는 백담사의 유배생활을 끝낸 후 서울로 돌아와 한때 추종세력들과 함께 정계 진출을 시도해보았으나 김영삼시대에 들어와서 전격 구속되었다. 재판을 통해 집권기간 중 무려 7000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존재는 완전히 빛을 잃게 되었다.
돈을 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도자의 실격 사유다. 이 점에서 그는 그토록 닮고 싶었던 박정희로부터 정작 배워야 할 것은 배우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와 대중적 평가는 다른 면도 있다. 후임 노태우에 비해 통이 크고 부하를 잘 돌보며 보스 기질과 의리가 있다는 점 등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슬하에 3남1녀를 둔 그는 대통령 유경험자로서의 코멘트로 이따금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도 하면서 아직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0년 현재 그는 만 79세다
[강준식 필자프로필]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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