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사도세자 묘(顯隆園)

야촌(1) 2012. 12. 11. 17:46

<1>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릉.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불렀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여졌다.

<2> 사도세자 책봉죽책문. <3> 사도세자가 김가진에게 쓴 편지. 경남대박물관에서 기증 받은 데라우치 소장 문서 

        중부다. <사진 : 권태균>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영조 11)∼1762년(영조 38). 조선 후기의 왕자.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允寬). 영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映嬪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 : 眞宗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혼인해 곧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해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떼었다.

 

또한,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 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그는 격간도동(膈間挑動)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그 병의 증상에 대해 그의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無可指之形 非病而病 作歇無常).”고 하였다. 1761년에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장조가 죽은 뒤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神主)에 제주(題主)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璿源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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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임금이 쓴 사도세자 묘지문

 

御製誌文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어제 묘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御製誌文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思悼世子諱愃字允寬臨御十一年歲
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卽暎嬪所誕
也生而穎悟及其長也文理亦通其有
朝鮮庶幾之望嗚呼不學聖人反學太
甲慾敗縱敗之事嗚呼訓諭自省編心
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噫自
 
古無道之君何限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其本生於豐豫不能攝心流
於狂也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終至
於萬古所無之事使白首之父作萬古
所無之事乎嗚呼所惜者其姿所歎者
述編嗚呼是誰之愆卽予不能敎導之
致於爾何有嗚呼十三日之事豈予樂
爲豈予樂爲爾若早歸豈有此諡講書
 
院多日相守者何爲 宗社也爲斯民
也思之及此良欲無聞逮至九日聞不
諱之報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至此不忍呼寫歲玄黓敦牂月夏五閏
而卽二十一日也乃復舊號特賜諡曰
思悼嗚呼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
此矣此豈爲爾嗚呼辛丑血脈之 敎
今只有世孫寔爲 宗國之意也七月
 
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嗚
呼無他施惠賜嬪號曰惠嬪於斯盡矣
此非詞臣代撰者故臥而呼寫表予三
十年之義嗚呼思悼將此文而無憾于
予矣壬戌入學癸亥行冠禮甲子行嘉
禮娶豐山洪氏卽領議政鳳漢之女永
安尉柱元五代孫嬪誕二男二女一懿
昭世孫一則世孫嘉禮于淸風金氏卽
 
參判時默女府院君五代孫也長女淸
衍郡主次女淸璿郡主側室亦有三男
一女矣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 日
어제 묘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사도세자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 11년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망하고자 망할 일로 흐르니 슬프다. 자성편과 심감을 가르치고
문득 말로 가르쳤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라.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는
나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이 술편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그를 옳게 가르칠 수
없어 이런 일까지 이르니 어찌 하리오. 슬프다. 13일의 일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했으리오. 즐거워서 했으리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 있으리.
 
세손 강서원에서 여러 날 서로 지키게 한 것이 어찌 종사를 위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진실로 소식 없기를 바랬는데 9일 만에 숨길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칠십 애비가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했느냐
이에 참지 못하고 불러 적게 하노라. 해는 임오년이오, 여름 윤오월하고
이십일일이라. 이에 도로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내리니
사도라. 슬프다. 근 30년 아비로 은의를 베푼다는 것이 이것에 불과하구나.
이것이 모두 너를 위한 것이구나. 슬프다 신축년 혈맥의 가르침에
다만 세손 식(정조)이 나라를 받들어라는 뜻이 있구나.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유향(서쪽) 들판에 장사지냈다. 슬프다.
다른 시혜 없이 세자빈의 호를 혜로 내려주었다. 이것이 빈에게는 전부였다.
이것은 신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다. 누워 불러서 나의 삼십년 의리를
표했다. 슬프다. 사도여. 이 글을 받들고 나에게 원한 품지 말아라.
임술년(1742) 입학하고, 계해년(1743) 관례를 하고, 갑자년(1744) 가례를 하는데
풍산 홍씨를 아내로 했는데 영의정 봉한의 여식이었다.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다. 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하나는 의소세손이고,
하나는 현재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 김씨 즉
 
참판 시묵의 딸과 했다. 부원군의 5대손이다. 장녀는 청연군주이고,
차녀는 청선군주이다. 측실 역시 3남
1녀다.
숭정기원후 135년(1762년) 임오 칠월 일

 

 

[용어풀이]

 

◇穎悟(영오) : 뛰어나게 영리함.

◇庶幾之望(서기지망) : 거의 이루어질 듯한 희망

◇太甲(태갑) : 탕왕의 손자, 은나라 4대 왕. 즉위 후 탕왕의 유훈을 따르지 않다가 이윤에게 쫓겨났으나 3년 뒤 회

                           개하고 다시 복직함.

◇狎昵(압닐) : 매우 친하고 가까움.

◇自省編(자성편) : 영조가 지은 책

◇心鑑(심감) : 영조가 지은 책

◇述編(술편) : 영조가 세자를 가르치기 위해 저술한 책

◇呼寫(호사) : 불러서 적게 함.

◇玄黓敦牂(현익돈장) : 현익은 壬, 돈장은 午를 말하며 임오년을 뜻함.    <끝>

 

출처>오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