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당 곽공 신도비명
(忘憂堂 郭公 神道碑銘)
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다. 성은 곽씨(郭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다.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인데,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부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문과 을과(文科乙科)에 발탁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전부 파방(罷榜)되었다. 다음해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임진년의 난리에 왜적이 모든 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그 기세를 몰아 한 달만에 서울을 침범하니, 상은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공은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하고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하였다.
우선 신번(新繁 경상북도 의령 동북)의 곡식을 점거하여 요해처를 지켜 연전 연승하였고, 참괵(斬䤋 전쟁에서 적의 귀나 머리를 벰)하는 것으로 공을 삼지 않았다.
공이 처음 기병할 때 병사가 적고 적은 강하므로 기병(奇兵)을 두고 용사 몇 사람을 얻어 그들과 함께 강의(絳衣 진홍색으로 장군이 입었던 옷)를 입고 백마를 타고서 적이 아군을 쫓도록 유도하고 산기슭에 숨은 뒤에, 사람마다 각각 산위에서 출몰(出沒)하게 하여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적을 의혹(疑惑)케 하고는 꾸며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강의 장군을 내려 주셨다.”
하며, 복병으로 하여금 활을 마구 쏘아대게 하니, 적이 크게 놀라 비장군(飛將軍)이라 하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공이 거느리는 병사는 모두가 향병(鄕兵)과 오합지졸(烏合之卒 까마귀 떼가 모인 것처럼 규칙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병졸)로 병사(兵事)를 익히지 못하여 싸움에 겁을 먹고 있으므로, 공은 싸울 때마다 반드시 사졸에 앞서 모든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군졸들은 모두가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기 때문에 열 번 싸워 열 번 이겼으며, 원근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당시 순찰사의 군사가 항상 후퇴하여 지기만 하므로 공은 크게 불쾌하게 여겼는데, 양호(兩湖)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장수와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이 흩어져 다시 병사를 소집하자, 모든 군과 현이 소란하고 인심은 더욱 불쾌하고 의병은 흩어지려 하였다.
공이 분개하여 꾸짖기를,
“수(睟)를 베어야 한다.”
하고 그의 여덟 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군사를 옮겨 먼저 치려 하니, 순찰사가 병졸을 엄중히 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한편으로 ‘반역한다’고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초유 아문(招諭衙門)에 이첩(移牒)하여 체포하여 상에게 아뢰고자 하였다.
그러자 김성일(金誠一 당시에 초유사였음)이 답하기를, “모(某)가 과연 반역을 꾀했다면 그가 현재 병졸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일이요, 만일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편지 한 장으로 충분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오.”하고, 편지를 보내 공을 책망하고 반역과 순종의 의의를 깨우쳐 주었다.
의병장 김면(金沔)도 간곡한 비유로 깨우쳐 주니, 공은 글을 보내어 사과하기를,
“공은 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공의 말씀은 곧 상의 말씀입니다. 감히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초유 아문(招諭衙門)에서 곧 상에게 이뢰기를,
“모(某)는 나라를 위한 것뿐이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진상을 진술하니, 상이 추궁하지 않고 교서를 내려 충의(忠義)를 포상하였다.
양군(兩軍)의 대립이 해소되자 공은 눈물을 뿌리고 병졸을 격려하여 날로 적을 공격하니 병세가 더욱 불어났다. 이에 현풍(玄風), 고령(高靈), 창녕(昌寧)에 주둔한 적이 창고의 양곡을 모두 태우고 도망갔으나, 강(江) 오른쪽의 농상(農桑)은 무사하였다.
상이 영남 지방 사민(士民)들에게 유서(諭書)를 내리고 공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공으로 처음으로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으로 상을 주고, 뒤에 형조 정랑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절충장군에 승급되고, 연이어 성주(星州), 진주(晉州)의 목사(牧使)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했으며, 다시 방어사로 승급하여 모든 의병을 공의 휘하에 예속시켰다.
그 당시 적은 해상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체상(體相) 이원익(李元翼)이 산악을 다스려 석문(石門)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군졸을 이끌어 한바탕 싸우려고 양원(楊元)의 군사에게 위세를 떨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성과 해자를 정비하고 비축하는 데에 힘쓰다가 그들의 동향을 기다려 움직여야 합니다. 맹호(猛虎)가 산에 있으면 위세를 떨치고 들에 있으면 겁을 먹는 것이니, 천병(天兵 명 나라 군대)이 호로(湖路)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맹호가 산에 있는 형세입니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적이 크게 밀어닥쳤는데 석문이 미처 구축되지 못하여 화왕산(火旺山)으로 옮겨 지키고 모든 장사에게 명령하기를,
“삼가서 싸우려 하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하였다.
적이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룻밤 하루낮을 서로 대치하며 지키다가 마침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무찌르고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들이 모두 무너졌다.
체상(體相) 이원익이 병졸이 적어 성을 지키기 위태로움을 염려하여, 군사를 철수할 것을 명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고 더욱 굳게 성을 지켰다. 얼마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 상중에 상이 여러 차례 출사(出仕)하도록 불렀으나 끝내 나서지 않았다.
다음해 적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죽자 모든 적병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공은 동계(東界)의 울진으로 피난하여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자(父子)가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상을 마치자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로 삼아 남쪽 지방을 안찰(按察)하게 하였고, 이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계(啓)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할 것을 간청하고 성의 수비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자, 공은 상소하여 시국(時局)을 말하고 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 자는 사신(士信))이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에 부처(付處 관원을 형벌할 때 어떤 땅을 지정하여 머물게 함)되었는데, 1년 만에 상이 석방하였다.
공은 드디어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도인(導引 호흡 및 운동에 의해 전신의 관절을 조정하는 법)하는 사람으로부터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 상이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를 삼고, 천생성(天生城)을 축성케 하고, 이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삼았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임명하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에 승급되었으며, 뒤에 다시 찰리사에서 동중추부사로 바꾸고 우윤(右尹)에 옮겼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영남 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가 되었으며, 다음해(1610, 광해군2)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속 소명이 있어서 여름에 서울에 가서 부총관에서 좌윤으로 옮기고 곧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때 이 상국(李相國 오리(梧里) 이원익)이 병을 핑계 대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자, 공은 곧 상국을 찾아가서,
“장수와 재상이 화목하면 내외(內外)가 모두 일체가 되는 것인데 이제 상국께서 두문불출하시니 저 또한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소를 올리고 드디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광해군이 재차 선유(宣諭)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 4년(1612)에 호남 절도사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 : 선조의 아들. 어머니는 인목왕후. 유일한 정비(正妃) 소생임]을 살해하자, 공은 상소하기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 뒤 5년이 지나 만력(萬曆) 45년(1617) 4월 10일에 공이 별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광해군이 부의(賻儀)를 보냈으며 의식대로 조상(吊喪)하고 제사 지내고 전기(傳記)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해 8월 모일(某日)에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 곽씨 족장 터에 장사하였다.
다음해(1618, 광해군10)에 향인(鄕人)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산김씨(商山金氏)인데, 조남명[曺南冥 : 남명은 조식(曺植)의 호. 자는 건중(楗仲)] 선생의 외손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형(郭瀅)과 곽활(郭活)이고 사위는 신응(辛膺)과 성이도(成以道)이다.
곽형(郭瀅)은 곽여로(郭汝櫓)와 곽여집(郭汝楫)을 낳았으며, 곽활은 곽여식(郭汝植), 곽여재(郭汝梓), 곽여추(郭汝樞), 곽여송(郭汝松)을 낳고, 신응은 신동망(辛東望), 신시망(辛時望)을 낳았으며, 성이도는 성만강(成萬江), 성만하(成萬河)를 낳았다. 또한 측실자(側室子) 두 사람이 있는데, 곽탄(郭灘)과 곽목(郭沐)이다.
공은 평생에 신(信)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으며, 의(義)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큰 난을 만나자 솔선하여 의병을 격려하고 적을 토벌할 것을 마음속 깊이 맹세하였으니, 그의 충의가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난이 평정되고 나서는 공명을 자처하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물러가 살았으니, 성대한 명성에서 오는 우환과 해(害)가 미치지 않았다.
공이 살던 곳은 취산(鷲山), 창암(倉碞)이고, 그곳에 망우정(忘憂亭)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명분은 지키기 어렵고 / 處名難居
공은 이룩하기 더욱 힘들다 / 成功尤難
기미를 앎이여 / 知微知幾
철인은 멀리 떠나 은거하는 것이니 / 哲人高蹈
확고하고 안일하도다 / 確而安
[문헌자료] :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6권/許穆(朝鮮) 著
--------------------------------------------------------------------------------------------------------------------------------------
[주-01] 수(睟) :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수(金睟)를 말한다. 서로 전략상 의견이 맞지 않았다.
[주-02] 김면(金沔) :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그는 당시에 금산(金山)ㆍ거창(居
昌)ㆍ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ㆍ개령(開寧) 간에 주둔한 적병과 싸워 승전하였다.
[주-03] 양원(楊元) : 명 나라 장군이다. 이여송(李汝松)의 휘하에서 좌협(左協) 대원으로 참전했다.
[주-04] 부자(父子)가 생활하였다 : 전기(傳記)에 의하면, 자질(子姪)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으며, 사람들이
여소(廬所)를 방어점(防禦店)이라 하였다고 한다.
-------------------------------------------------------------------------------------------------------------------------------------
[[原文]
忘憂堂郭公神道碑銘
公諱再祐。字季綏。姓郭氏。玄風人。成均司成之藩之孫。黃海道觀察使越之子。母晉陽姜氏。嘉靖三十一年八月廿一日公生。器識過人。好讀書。二十七。從先大夫如京師。有相者見之曰。當作巨人。名聞天下。三十四。擢庭試第二名。以所言。忤上意。命盡罷一榜及第。明年。先大夫歿。旣卒喪。因廢擧子業。釣於江上。壬辰之亂。賊連陷諸城長驅旬月。犯圻旬。上西幸。公傾則募壯士。起兵於宜寧。先據新繁粟。守要害。連戰連克。亦不以斬馘爲功。以初起兵。兵少賊強。設爲奇兵。得勇士數人。與公皆絳衣白馬。誘賊追我。匿入林麓。人各出沒山上。閃忽疑惑。詭謂曰。天降絳衣將軍。伏兵亂射。賊大驚。亦謂飛將軍。不敢近公。所領兵皆鄕兵烏合。不習於兵。又怯於攻戰。公每戰。必身先士卒。以激衆心。以故衆皆出死力。十戰十克。遠近響應。時以巡察軍常退守。多不快於公。及與兩湖諸將勤王兵潰奔。還召兵諸郡縣。擾亂人心。益不快。義兵思欲散去。公發憤罵曰。睟可斬。因數其八罪。欲移兵先擊之。巡察嚴兵自守。一以叛聞。一移招諭衙門。欲捕囚以聞。金公誠一謝曰。某果有叛謀。彼方據兵非一力士可捕。若無叛心。一書足以開悟。乃移書責之。曉以逆順。義兵將金沔。亦譬曉之甚力。公復書謝曰。公。上之所遣。公之言。乃上之言。敢不從。衙門卽啓上。某爲國無它意。因陳戰捷狀。上不問。下敎褒其義。兩軍之難解。公雪涕勵兵。日擊賊。兵勢益張。於是玄,靈,昌屯賊。悉燒倉粟而遁。江右農桑晏然。上下諭。嶺南士民。恨聞名之晩也。初賞爵幽谷道察訪。後改刑曹正郞。尋陞折衝將軍。連爲星,晉二州牧兼助防將。陞防禦使。諸義兵皆屬焉。時賊屯兵海上。體相李公元翼。令治嶽堅築石門。欲悉衆一戰。請楊元兵以爲聲勢。公曰。今日之勢。不如修城池。務積儲。待彼而動。猛虎在山則威。在野則怯。天兵在湖路。猛虎在山之勢也。秋。賊大至。築石門未完。移守火旺。令諸將士曰。愼毋與戰。堅守而已。賊不得戰。相守一日一夜。乃渡江西。屠黃石。進陷南原。於是列城皆潰。體相念兵少守城危。令下兵。公不從。城守益堅。尋以母憂去。上累召起復。終不起。明年。賊酋秀吉死。而諸賊兵撤歸。公避地東界之蔚珍。守喪三年。父子作業以販賣。旣除喪。召爲察理使。按南邊。仍爲節度使。啓請脩島山城。具陳城守形便。朝廷不從。公上疏言時事。卽棄歸。大司憲洪汝諄。論以瀆慢。付處靈巖。一年。上釋之。公遂入琵瑟山中。辟穀導引。學神仙之術。上復召爲察理使。築天生城。仍爲善山都護府使。不赴。拜安東大都護府使。又不赴。冬。陞嘉善大夫行龍驤衛上護軍。後復以察理使。改同中樞。遷右尹。皆辭不至。光海元年。復爲嶺南左節度使。明年。爲水軍統制使。皆不起。連有召命。夏。至京師。以副摠管。遷左尹。尋拜咸鏡道觀察使。時李相國謝病杜門。公直入見相國曰。將相和調。則內外一體。今相國杜門。吾且去矣。三上疏。遂去歸。光海宣諭者再。而終不至。四年。爲湖南節度使。不起。其年。光海殺永昌。公上疏言不可殺。不報。後五年。公卒。萬曆四十五年四月十日。年六十六。光海賜賻弔祭如儀。命立傳。其八月某日。葬于玄風縣南仇知山郭氏族葬。明年。鄕人爲之立祠。貞夫人商山金氏。曺南冥先生外孫也。生二男二女。男瀅,活。壻辛膺,成以道。瀅生汝櫓,汝楫。活生汝植,汝梓,汝樞,汝松。辛膺生東望,時望。成以道生萬江,萬河。公又有側室子二人。灘,沐。公平生非信不踐。非義不爲。身當大亂。率勵義士。誓心伐賊。忠義著於四方。旣事平。又不以功名自居。遺世遠引。以盛名。患害不及焉。公棲息之所鷲山倉嵒。有忘憂亭。銘曰。
處名難。居成功尤難。知微知幾。哲人高蹈。確而安。
문헌자료 :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6권/許穆(朝鮮) 著
곽재우 장군 영정(충익사) 망우당 곽재우 기념관 전경(대구 망우공원)
'■ 보학 > 신도비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점필재 김종직선생 신도비명 병서. (0) | 2009.02.12 |
---|---|
목은 이색 신도비명(牧隱 李穡 神道碑銘) (0) | 2009.02.02 |
우암 송시열 선생 신도비(尤庵 宋時烈 先生 碑)-정조대왕 (0) | 2009.02.01 |
권율장군 신도비 명(權慄 將軍 神道碑 銘) (0) | 2009.01.11 |
白頣正先生神道碑銘 幷序 - 익재의 스승이고, 사돈지간임 (0) | 200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