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白頣正先生神道碑銘 幷序 - 익재의 스승이고, 사돈지간임

야촌(1) 2007. 2. 8. 14:47

 高麗國三重大匡上黨君文憲公彛齋白先生神道碑銘 幷序

고려국삼중대광상당군문헌공이재백선생신도비명 병서

※익재공의 둘째아들 운와공 달존의 장인.

 

輔國崇祿大夫兼吏曹判書致仕奉 朝賀安東 金履陽 撰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全城 李翊會 書

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世孫右賓客 徐俊輔 篆

 

我東僻在海隅人文開塞之運宜若不並中華 觀於箕聖東來仲尼欲居文明之兆已㫼焉由 是安文成公當麗代佛敎之漫 葺聖廟宗孔氏門人彛齋白公入中原 購得程朱全書 與李益齋朴耻庵諸公講誦討論揚 厲發揮環海數千里章甫之士 殆庶乎一變至道逮夫 我朝眞儒繼緖雲興霞蔚斐然成章 先輩所云自朱子歿吾道東來者儘非夸毗之言也 揚子雲曰聖人者天之譯也盖言 天道無爲故惟聖代其工而明其道也 推此而論之程朱孔氏之譯 白公又程朱之譯也 原原本本厥功誠不在文成之下矣然而世之等前世者往往知文成而不知 有彛齋者可勝歎哉 謹按李益齋稗說曰國家伐叛問罪二十年士皆袵金革操弓矢讀書者十不一二六籍之傳不絶如絲大德間安文成公爲宰相葺國學修庠序薦紳之徒盡以通經博古爲事白彛齋頣正從德陵留京師十年廣取程朱性理書以歸克廣其傳俾學者知有道學又按竹溪安氏家乘曰白公在元朝求得程朱書以還與文成之胤竹屋子及同門權菊齋李東菴諸公校正訓晦夫以益齋之賢親炙同德其言可信無疑殆文獻之徵孰加於是哉公字若軒藍浦人遠祖諱仲鶴爲新羅諫官著名高祖諱光宇官兵部員外郎生諱 汝舟樞密院左承宣翰林侍講學士知製誥生諱 景瑄吏部尙書左僕射生諱文節官吏部侍郎國子祭酒大司成寶文閣學士諡文簡號淡菴史稱立朝有志節文詞富贍爲一時所推配星州李氏即公之考妣也公以宋理宗淳祐七年九月二十八日生登第于忠烈王朝公天資純厚有公輔器事忠宣王有志輔導忠宣不用其言屢官至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加三重大匡封上黨君卒于忠肅王朝諡文憲與權文正溥禹文僖倬早遊安文成之門以性理之學 自任時人稱之以東方夫子 配安東金氏上洛府院君恂之女 生一男二女 世廉淸風郡守 追贈政堂文學平章事 女適典理摠郎李達尊即益齋之子 次適判樞奇仁傑 世廉生二子 內侍舍人咸正 政堂文學平章事咸明 曾玄以下牒存焉 公享年七十七 葬于羊角山西麓東幕洞坐甲原 嗟呼追遠報本先王所以歸民德於忠厚之域也故先農先蠶咸有祀典農蠶不過衣食之原其崇報也如彼而乃於啓人文明人道之地昧昧焉不知其本寥寥焉不厚其報此不可聞於鄰國者粤在 宣廟先輩諸公議以文成及公祀享于松京表奬其倡絶學之功値倭寇而止逮正廟丁巳權尙書常愼宰藍浦有感於邑有新安面面有武夷山朱子川謀於邑人營建朱夫子影堂於武夷山下以公配食因有尼之者已焉純廟丁卯京鄕多士翕然議同重建朱夫子影堂配享公及尤庵宋先生尋以公之門人李益齋宋先生門人權遂庵配焉自是當世之人稍稍知公之有功斯文焉獨恨公之言語文操必有以惠後學者而奈五百年之間兵燹屢作孫裔不振箱篋間零金片王只有七絶一首傳誦者詩曰矮屋蕭條十肘餘焚香靜讀聖人書自從人爵生天爵情欲秋林日漸疎此雖寂寥乎短章超然有澄本源消物累之意宜乎其孫裔之傳世寶玩之也今其十九代孫東赫有文學篤於追先懼夫愈久而愈泯也歷謁搢紳求和其遺韻旣又合同人齊展力將伐山石爲碣爲碑屬余以銘誠意感人庸可辭諸銘曰。

   

玄聖之衰程朱篤生異言者熄大道以明孰嗜是書載之而東昭洗舊染擊發羣蒙文成之傳益齋之師源泉放海普哉厥施長夜不曉噫復何爲荒山片石尙或有辭。

 

崇禎紀元後四戊申(1848, 헌종 14) 六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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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인소개]

 

●김이양(金履陽)

 

1755년(영조 31)∼1845년(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命汝). 아버지는 김헌행(金憲行)이다. 초명은 김이영(金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하여 피휘(避諱)하기 위해 김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장계(狀啓)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건의하는 동시에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주도록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 확보를 위하여 영남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移給)해 주도록 주청하여 2만3천석을 얻는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어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