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진왜란 비사(일본군과 싸운 일본군들)
일본 나고야성의 일본 장수 사야가(沙也可) 충선(金忠善,1571년(선조 4)∼1642(인조 20). 그는 조선을 향한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하당문집(慕夏堂文執-김충선 저)에 따르면, 그는 출정 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곧 투항했다. 그 때는 임진왜란이 막 시작된 시기이고 일본군이 승승장구할 때다. 패전해서 어쩔수 없이 투항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출정을 앞두고 이미 투항을 결심한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는 과연 이 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길 래, 조국을 버리고 조선에 투항해 조선군이 되어 싸울 생각을 했을까?
그의 투항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가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모하당 문집에는 사야가 김충선이 일본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와있지 않다.
그렇지만 사야가가 누구였는지, 모화당 문집에서 단서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모하당문집 기록을 보면,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투항 후 조선군에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더구나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귀화 후, 자체적으로 조총부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기록도 나오고 있다. 이 단서를 근거로, 일본에서 사야가의 정체를 알아본다.
1.일본에서의 사야가 김충선(金忠善)
고사카 지로는 사야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바다의 가야금(2001)'을 쓴 저자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사야가가 조총기술과 화약제조술을 조선에 전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다.
와카야마 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고사카 지로는 조총 전문가다. 그는 사야가가 전국 시대때 존재했던 일본 최강의 철포부대원 중, 한 인물이라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잘 쏘는 여러개의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 중, 최강의 철포부대는 바로 와카야마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철포부대. 이 부대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은 독립집단 으로, 최고의 명사수들이었다. 바로 이 사이카부대에 사야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2.사야가는 사이카일 것이다.
작가 고사카 지로 : 총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총도 그렇지만, 화약의 조합도 그렇다. 그런 것들이 조선에 전수된 것을 볼 때, 사야가는 사이카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던 마을 이름을 따, 잡하, 일본발음으로 사이카라 불렸는데 사야가와 발음이 흡사하다.
석산군기(사이카들의 전투를 묘사한 책), 이 책에는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사카지로는 바로 이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 주장한다.
3.사야가 김충선의 본명(本名)
작가 고사카 지로 : 스즈키 마고이지로라는 이름이 진짜 이름인데, 밖에 나가면 전부 사이카라고 불렀다. 실제, 스즈키는는당시 조선에 출병했고, 이후 그의 흔적은 일본 땅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작가 고사카 지로 : 고사카 지로 :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조선침략의 출병지 나고야까지 100명을 데리고 갔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겨버린다. 마고이치로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남아있는데, 그만 홀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4.사야가 김충선은 왜 조선에 투항했을까?
당시 사이캬집단이 살았다는 사이카부락, 사이카라는 마을 이름은 아직까지 그 지방에 남아있었다.
와카야마성, 이 곳이 사이카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면, 그는 왜 조선에 투항했을까?
작가 고사카 지로 : 주요 간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그 식량을 노리고 이 일대에 불을 질렀는데, 그 당시에는 대단했다. 움직이는 것은 개도 죽였다.
일본전역에 맹위를 떨치던 최강의 철포부대인 사이카집단은 전쟁 발발 7년 전, 히데요시군에 의해 초토화됐다.
사이카가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부하던 영주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이유였다.
멸망한 사이카집단은 부락을 떠나, 전국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사야가가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라면,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수 였다는 모하당문집의 기록에 위배된다. 스즈키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장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한 장수였다고 주장하는 교수가 있다.
서남대학교의 마루야마 교수이다. 그는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장수 하라다노부타네라는 새 학설을 발표했다.
마루야마 교수 : 가토 기요마사의 출정군인에 대한 일람표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사야가가 될 수 없다. 전사했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중에서 조사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니까, 사야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남은 인물이 하라다 노부타네였다. 본묘사는 가토 기요마사가 전쟁 후,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바로 이 절 안에, 가토 기요마사군대의 진립서가 보관되어 있다. 이 진립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출병 1년 전에 작성한 것으로, 조선침략시 출병할장수 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마루야마 교수 : 가토 기요마사의 진립서는 1592년 가토 기요마사가 제2진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해서, 조선에 상륙하는데 그때 가토 기요마사 쪽의 군진을 나타내는 그런 자료이다.
5. 사야가라는 이름은 있을까?
그러나 무장들의 명단에서 사야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라다 노부카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진립서에 쓰여져 있는 여력(○力, 다른 곳에 있는 부대로서 유력한 장군에게 협력해주는 부대). 하라다 노부타네는 바로 이 여력부대에 속해 있었다.
마루야마 교수 : 여력에 속한 이름들은 여기서는 안쓰고 있다. 여력을 조사해보면, 여력의 맨 처음에 실려있는 이름이 하라다 노부타네(사야가)다.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여력부대 명단. 무사들의 이름 맨 위에,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하라다 가문의 족보에도,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선에 출병한 기록이 나와있는데, 출병 후 그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에서 죽었거나, 혹은 투항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하라다가 조선출병 전, 직접 작성한 자신의 부대구성원명단. 거기에 그는 자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야가가 전수했다는 조총기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은서사문서는 그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그의 조선출병 부대원 중,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투항했다면, 조총기술을 조선에 전수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라다 가문이 살았던 마에바루시. 그곳에 하라다가문이 세운 절이 남아있다. 절 안에는 하라다 집안의 묘지들이 있다. 그런데 하라다 노부타네의 묘지는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다.
하라다가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족보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하라다 가문은 대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군에 의해 정벌 당하고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예속됐다.
전국통일을 꿈꾸던 히데요시가 큐슈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라다 가문이 희생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국통일과정에서, 하라다뿐 아니라, 많은 반 히데요시세력을 만들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인 하라다가 조선에 투항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성에 3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반란을 대비해, 이 곳에 전국, 영주의 아내들을 인질로 데려다 놓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의 야심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과 무사들은 조선침략을 반대했다.
사지마 아키꼬(후쿠오카 여학원 대학 인문학부) 교수 : 영주들은 히데요시로부터 명령 받은 군인들, 전쟁에 참가해야 할 사무라이들을 모을 수가 없었다. 사무라이들이 가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군인들을 출전시키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있다가 히데요시로부터 처벌받은 영주들도 있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들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고야 성 안에는 반란자들의 아내를 처형하는 처형장 자리가 남아있다.
나카자토 노리모토 (향토사학자) : 히데요시는 반란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사츠마와 시마즈의 유력한 가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것에 대해 프로이스라는 선교사가 편지를 로마에 보내기도 했다. 그것을 보면, 반란자의 처가 나고야성에 인질로 있었는데 그들은 못박혀서 불태워진다.
나고야성에서, 반 히데요시 세력들도 억지로 조선에 출병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싸울 명분이 없었다. 반 히데요시 세력인 장수 사야가, 그는 출병 전 이미 투항을 결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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