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종 목] 사적 제117호
[명 칭] 경복궁(景福宮)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면 적] 343,888.1㎡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에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한 것이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었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점은 광화문을 비롯한 성문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서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광화문은 그 중에서도 홍예문을 셋이나 내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기 이전의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궐의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두공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내삼출목외부는 제공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을 만들었으며, 첨차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당초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북쪽에 이전시켰고, 그 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원래의 옛 광화문 모습.
↑일제시대의 모습.
흥례문과 영제교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광화문은 건춘문옆 지금 민속
박물관앞으로 옮겨져있다. 근정문,근정전,사정전,광회루,수정전만이 경복궁에 남아있다.
↑도로때문에 담장이헐려 동십자각이 외롭게 서있다.
↑총독부옥상에서 바라본 근정문과 건춘문. 동궁자리에는 박물관이 있다.
↑1960년대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원래위치보다 틀어져있었다.
↑광화문은 2009년 12월 현재 공사 중이다. 2010년 12월 말에 완공이라니 그때는 제법
궁궐의 모습을 갖추겠다.
↑광화문과 주변의 복원모습!.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의 모습이다.
↑북궐도. 옛것은 없고 1970년대 작품이다.
↑원래는 건물이 빼곡한 경복궁이지만, 일제 강점기때 많이 헐렸다.
↑광화문은 남쪽에 있는 정문인데 동, 서, 북에도 문이 있다.
「동쪽의 건춘문(建春門)」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 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
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또한 신무문(神武門)은 1949년 6월 20일 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오늘날 수도방위사령부)
제30대대 정문으로서 청와대 경비업무가 주요 임무엿다.
↑동십자각(東十子閣)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 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
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 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버렸다.
↑동십자각의 옛모습. 건춘문에 연결되어있다.
↑흥례문(興禮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세종 8년(1426) 10월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처음에는 홍례문(弘禮門)이라 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흥례문(興禮門)으로 문 이름을 고쳐 짓게 되었다. 이는 당시 청나라 乾隆帝(건륭제)의 이름자인 '弘曆(홍력)'을 피휘(避諱)해서 지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알 수 있는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소장)에 의하면 흥례문은 주변 행각 없이 문만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흥례문 일곽에 행각을 두른 것은 고종 2년(1865) 재건 때로 추정된다.
흥례문은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주변행각과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5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철거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청사를 흥례문 자리에 짓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철거된다.
한편 흥례문을 철거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완공되어 해방이후 정부종합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철거되기 시작한다. 이후 흥례문 복원계획에 따라 1996년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2001년 10월 흥례문과 주변행각,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등이 복원된다. 흥례문이 일제에 의해 완전 철거 된지 85년만의 일이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중층으로 되어있으며,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의 출입문으로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흥례문 현판 글씨는 2001년 10월 새로 지으면서 서예가 정도준 선생이 쓴 것이다.
↑마침 수문장 교대식이다.
↑교대식 시간은 10분이 채 안됐다.
↑홍례문 안쪽
↑영제교(永濟橋)와 근정문(勤政門).
↑영제교(永濟橋)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이 자리하고 있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維和門)이 한
것이다.
↑금천 영제교(禁川 永濟橋)를 지키는 천록(天鹿)
↑이 천록(天鹿)은 익살스럽게 혀를 내밀고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景福宮의 勤政門 )
[종 목] 보물 제812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 량] 일곽
[지정일] 1985.01.08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복궁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 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思政門)이 있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로, 위엄을 갖춘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근정문 행각(勤政門 行閣)
↑경복궁의 근정문(勤政門)과 유화문(維和門).
↑궐내 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이던 유화문(維和門).
↑근정문 양 옆의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다.
↑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종 목] 국보 제223호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 량] 1동
[지정일] 1985.01.08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 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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