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경복궁(景福宮) 의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과 자경전(慈慶殿)

야촌(1) 2012. 8. 21. 02:22

경복궁(景福宮)의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과 자경전(慈慶殿)

[침전영역]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강녕전의 공간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補階)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항오문과 강녕전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위치한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의 부속건물격인 소침(小寢)이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태조 4년(139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고종 2년(1865)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연생전과 경성전을 모두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 폐허가 되고 만다. 현재의 모습은 1995년 다시 재건된 것이다. 강녕전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은 '만물이 생성되는' 봄(春)을 상징하고,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은 '결실을 맺는' 가을(秋)을 상징한다.

 

연생전과 경성전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렸는데, 이는 왕조사회의 통치관을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도전의 글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은 텅 비어있는데, 여기 유물은 궁중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강녕전 뒤에 왕비가 있는 교태전이다.

 

↑굴뚝만 보더라도 여자의 감성이 묻어나온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다만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르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공간구성 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도 같은데 지붕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내부에는 종도리를 두개 나란히 두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침전이 이와 같이 용마루를 두지 않는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교태전을 둘러싼 창고.

 

 

 

 

 

 

 

↑교태전 담장으로. 왕비의 침소라서인지 담도 아름답다.

 

↑교태전 옆에는 흠경각과 함원 전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흠경각(欽敬閣) 문.

 

흠경각(欽敬閣)


흠경각은 1438년에 장영실이 왕의 명령으로 완성하고, 궁중 자동 천문시계인 옥루를 보관하던 곳이다. 또한 방위, 계절을 살필 수 있는 과학기구도 설치했다. 경복궁 뒤뜰(후원)에 설치되어 있던 여러 기구를 왕의 침전인 강녕전 서쪽 뜰에다 흠경각을 지고, 한 곳에 모아두어 관리했다. 해가 있을 때는 해시계, 밤에는 자격루(물시계)를 써듯 각각의 기구를 서로 보완을 해야 제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흠경각 안에 옥루는 물의 힘으로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시간과 하늘의 천체 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흠경각을 만든 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저절로 치고, 움직이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과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든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과학기구 발명과 활용으로 농업생산량이 몇 배씩 늘어났다. 농업이 생산이 늘면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53년 명종 8년에 불탄 것을 다음 해 다시 지었는데 일제 때 없어졌다. 1995년에 지금 모습으로 다시 만들었다. 흠경각이란 이름은 ‘하늘을 우러러 공손 되어 때를 얻는다’는 말귀를 책에서 세종이 딴 것이다.

 

 

흠경각뒤의 함원전(含元殿)


함원전은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다.
함원전의 굴뚝이 놓인 뒤편 화계(花階)와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함원전에 관한 기록은 무척 이채롭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당시 왕세자인 노산군(단종)이 잠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는 기록도 엿보이지만, 경복궁의 내전 깊숙이 위치해 '불사(佛事)'를 주로 행하던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세조 9년(1463)에는 내수소(內需所)에서 불상 4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점안하기도 했다. 또한 세조 10년(1464)에는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 때 '여래(如來)가 나타나는' 이적(異蹟)으로 사리를 얻자, 함원전에 공양(供養)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원각사의 백옥불상(白玉佛像)이 이루어지던 세조 12년(1466) 7월에는 이곳 함원전으로 불상을 들여 점안(點眼)하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함원전은 건립 초기에 불교와 깊이 연관된 궁궐 내 전각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65년 경복궁의 재건 무렵 다시 지었다.

 

 

↑함원전 뒤는 교태전의 아미산과 연결된다.

 

↑이 문을 나서면 교태전뒤쪽의 아미산이다.

 

↑교태전의 뒤쪽

 

 

 

 

 

↑아름다운 굴뚝입니다.

 

[종  목] 보물 제811호 
[명  칭] 경복궁아미산의굴뚝(景福宮峨嵋山의굴뚝)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수 량] 6기 
[지정일] 1985. 01. 08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복궁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교태전 건물의 바깥쪽입니다.

 

 

 

↑교태전의 아름다운 담장을 뒤로하고 자경전으로 향한다.

 

↑자경전에서 바라본 교태전.

 

[종  목] 보물  제809호 
[명  칭] 경복궁자경전(景福宮慈慶殿)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일곽 
[지정일] 1985.01.08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복궁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이곳도 대비가 머문 곳이라 담장이 아름답다. 

 

 

이곳에서 옆문을 통해 정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서쪽 담은 주황색 벽돌로 축조하여 내벽에는 만수문,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 있는 모양벽돌로

꾸며 격조를 높이고 있다.

 

외벽의 모습이다.

↑자경전의 내벽입니다.

 

 

 

↑이곳 만세 문으로 들어가면 자경전입니다.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 전(慈慶殿)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 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 루의 동측으로 협 경당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 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 문으로 된 만세 문이 있다.

 

 

 

 

 

 

 

 

↑다락형식의 청연루.

 

 

 

 

 

 

 

바깥에서 본 모습.

 

자경전 뒤편에는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처럼 화계를 꾸미지는 않았지만,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을 세워 볼거리를 만들었다.

종    목 : 보물  제810호 
명    칭 : 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景福宮慈慶殿十長生굴뚝)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85.01.0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경복궁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붕위 잡상.

 

서쪽 담장. 이 담장을 따라가면 동궁영역이다.

 

강녕전 담장.

 

오른쪽이 강녕전이고 왼쪽이 동궁이다.

 

근정전에서 동궁으로 오는 문.

 

근정전에서 오면, 왼쪽문은 동궁으로 바로 들어거고, 오른쪽 문은 동궁 바깥쪽으로 가게된다.

 

동궁(東宮)영역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동궁.

왼쪽문은 자선당, 오른쪽은 비현각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면 다시 문이다.

 

자선당 문.

 

비현각 문.

 

이 작은문은 화장실로 가는 문이다.

 

두개의 문을 지나자 자선당이다.

 

 

 

 

 

 

  

 

그림에 나와있는 각종 유물들은 고궁박물관에서 볼수있다.

 

자선당을 둘러싼 건물.

 

자선당과 비현각 사이의 화장실.

 

이제는 비현각이다.

 

비현각에서 화장실로 연결되는 문.

 

 

 

 

 

 

 

동궁 바깥쪽 모습이다.

이제 경복궁 뒤쪽에있는 향원정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