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사(李匡師)
[자] 도보(道甫)
[호] 원교(圓嶠). 수북(壽北)
[생졸년] 1705(숙종 31)~1777(정조 1)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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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년(숙종 31)∼1777년(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 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진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와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간송미술관 소장)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의 美 6―書藝―(任昌淳監修, 中央日報社, 1981)
◇東垣先生蒐集文化財―繪畵―(國立中央博物館, 1984)
↑ 원교 이광사 간찰
원문해석(늘보 송준목)
日昨時中之歷訪過何爲耶 不審雪寒 僉侍履淸迪 區區瞻溯 戚從弟三兄 病情無減而所服丸藥中 入鹿角膠四五兩而京於適絶之 無處求得 或云曾覓用於貴儲而然否 若所從藏 多少分惠有望 不備狀式
臘月十日戚從匡師頓
어제 시중이 찾아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요즘 설한에 어른을 모시는 생활이 어떠신지요. 그립고 그립습니다.
저의 셋째형은 병에 차도가 없습니다.
복용하고 있는 환약 가운데 녹각교 사오량이 들어가는데 서울에 마침 떨어져서 구할곳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댁에서 구하여 썻다하니 그렇습니까.
만약 남은것이 있다면 가지고 있는 것에서 조금 나누어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섣달 십이 척제 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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