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김면(金沔)

야촌(1) 2012. 8. 14. 09:46

■ 김면(金沔)

 

   [자] 지해(志海)

   [호] 송암(松庵)

   [생졸년] 1541(중종 36)~1593(선조 26)

   [시대] 조선중기

   [본관] 고령(高靈)

   [활동분야] 호국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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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중종 36)∼1593년(선조 26).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학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고령출신이다. 부친은 경원부사(慶源府使-從三品) 김세문(金世文)이며, 모친은 김해김씨로 판관(判官-從五品) 김중손(金仲孫)의 딸이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인 조식(曺植)을 사사하였고,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했다.명종(明宗-조선의 제13대왕)때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從九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선조(宣祖-조선의 제14대왕) 즉위 초년에 유현(儒賢)을 뽑아 육품직에 승진시켰는데, 조목(趙穆)‧ 성혼(成渾)‧ 정구(鄭逑)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사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居昌)과 고령(高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경북 김천시 지례면)에서 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대첩으로 합천군수(陜川郡守-從四品)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무계(茂溪)에서도 승전을 거듭하여 9월에 첨지사(僉知事-正三品)에 임명되고, 11월에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이때 호남의 도백(道伯)에게 군사와 군량의 도움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으므로 스스로 무기를 수선하고 사졸을 격려하여 전투에 임했으며, 호남과 영남 의병장들과 함께 4도로 진병하고자 하였으나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자, 혼자 군사를 이끌고 고령‧ 지례‧ 금산‧ 의령 등을 수복하였다.

 

이에 왕이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 이들의 군사로 근왕(勤王)하게 하고자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통곡하며 보호를 청하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장계를 올리니 본도에 머물러 수호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그 이듬해인 1593년 1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從二品)가 되어 충청‧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진주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는 도중, 갑자기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발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러 장수가 그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신창(新倉)까지 돌아온 뒤에야 발표하니, 일군(一軍)이 통곡하고 백성들이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관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왕이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正二品)를 명하였다.

 

정구와 교분이 깊었으며, 강개한 절의가 있었고, 문장보다 성현의 본지(本旨)를 묵수하여 실천에 힘썼는데, 특히 이정(二程: 程顥=程頤)의 글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고령의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으며, 1607년에 다시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송암실기》 3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國朝人物考 ◇嶺南人物考(探求堂, 1967)

 

 

↑송암 김면 선생 간찰

 

[간찰 원문]

連三日伏奉辱復。指揮之意。皆合事宜。益服爲國盡誠之義。無以爲謝。强賊未易爲滅。湖兵亦難爲倚。 誠如令敎。區區妄料。已陣於前狀。今不復縷縷。湖南諸軍。皆爲盡往星州云。會同之期。恐未及來。而尙州亦許來援。深恐彼此日期相違不得擧事也。如果擧事。則敢不如令敎十分愼重耶。晉山炮手。亦如敎督送至仰。火藥乏絶。幷迎優下。皆在前狀所陣。伏惟令鑑。謹拜上答狀。壬辰臘月十九日。沔再拜。

 

[국역]

사흘 동안 연이어 보내주신 답장은 분부하신 뜻이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의리에 더욱 감복하여 사례할 길이 없습니다.

 

강포한 왜적은 섬멸하기가 쉽지 않고 호남의 병사 또한 의지하기 어려움은 진실로 영감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구구한 저의 생각은 앞서 보낸 편지에 이미 진달했으니, 지금 다시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호남의 여러 군사들이 모두 성주(星州)로 간다하니, 회동할 기일에 미쳐 오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상주(尙州) 또한 원조하러오기를 허락했으니, 피차간에 약속한 날짜가 어긋나서 거사를 도모하지 못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만일 과연 거사를 도모한다면 감히 영감의 말씀처럼 십분 신중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진산(晉山)의 포수 또한 말씀하신대로 독책하여 보내주시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화약이 몹시 부족하니,아울러 넉넉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앞 편지에서 올린 말씀에 들어있으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임진년(1592, 선조) 12월 19일 면(沔) 올림

 

 

 

[간찰원문]

出來後伏未審(출래후복미심)

 

春居如何慕仰轉切沔今夕到高靈(춘거여하모앙전절면금석도고령)

옛날에는 정월을 봄으로 보았다함,

似聞寧敵還去若非虛傳則明間與(사문영적환거약비허전즉명간여)

星牧相見同議攻守之策伏計伏惟(성목상견동의공수지책복계복유)

令鑑謹拜(영감근배)

上問狀(상문장)

癸巳正月十三日(계사정월십삼일)

沔再拜(면재배)

 

[국역]

물러 나온 이후로 기거(起居) 하심이 어떠하신지 삼가 살피지 못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늘 간절합니다.

저(沔)가 오늘 저녁 고령에 도착하여 들어니 개령(開寧)의 적군들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만약 헛소문이 아니라면 금명간 성주목사를 만나서 공략과 방어의 계책을 함께 의논할 계획이오니 밝게 참고하여 주십시요.

공손히 문후 글을 올립니다.    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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