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유천우(兪千遇) - 무안유씨 시조

야촌(1) 2012. 7. 5. 02:22

■유천우(兪千遇)

 

[생졸년] 1209년(희종 5)-1276년(충렬왕 2)

[고려문과] 고종(高宗) 19년(1232) 임진(壬辰) 고종 19년 임진방(壬辰榜) 을과(乙科) 3위(3/31)

[자] 지일(之一)

[호] 퇴사재(退思齋)

[시호] 문도(文度)

[일명] 유양(兪亮). 유증(兪證)

[활동분야] 고려말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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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문신으로. 무안유씨(務安兪氏)의 시조(始祖)이다.

초명은 양(亮)‧ 증(證), 자는 지일(之一), 호는 퇴사재(退思齋)로.고종(高宗, 고려 제23대왕, 재위 1213∼1259)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內侍)가 되었는데, 상서 김창(金敞)에 의하여 최우(崔瑀)에게 추천되어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그의 문객이 되었다.

 

  그뒤 이부시랑이 되었는데, 이때 삼척군민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섬에 귀양 갔다.

그 어머니가 뇌물을 바쳐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총신(寵臣)에게 뇌물을 바쳐 정방에 들어가서 병부시랑이 되었다. 

 

  원종(元宗, 고려 제24대왕, 재위 1260∼1274)초에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지주사(知奏事)를 겸하였다.이때 전선(銓選)을 맡게 되어 가까이 지내는 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자기의 세력을 넓히는 데 힘썼다.

 

  이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최씨정권을 타도한 세력)들이 맞서 권신(權臣)인 김준(金俊)에게 의지하여 족속들에게 벼슬주기를 청하자, 의(義)를 들어 그를 억제함으로써 위사공신들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대장군 오수산(吳壽山)이 그를 죽이려 하자 김승준(金承俊)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설득하여 저지시켰는데, 김승준은 앞서 유천우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었다.

 

  아우인 장군 유원적(兪元勣)이 김준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자 김준에게 불려가 사실을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문책 당하였으나, 늙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하여 고하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정상이 참작되어 관직이 파면되는 데 그쳤다.

 

  뇌물을 많이 받아 치부하였으며, 많은 비용을 들여 선원사(禪源寺)에서 불사를 베풀고 김준을 위하여 기복(祈福)한다고 아첨하여 1264년(원종 5)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으며, 1269년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뒤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이듬해 임유무(林惟茂)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 거사가 부당함을 꼬집어 크게 거슬렸으나 임유무가 복주(伏誅)됨으로써 무사하였다.또, 그해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비위에 거슬려 인물도(仁勿島)에 귀양 갔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275년에 충렬왕이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모두 고치게 되었는데, 그것에 따라 그는 참문학사(參文學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격이 낮추어졌다. 그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는 작고 총민하고 근실하였으나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남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의복과 저택을 극히 화려하게 하여 당시 사치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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