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제용재(濟用財) - 이보림(李寶林)

야촌(1) 2012. 1. 11. 00:48

경북인물열전 (62)

제용재 설치로 백성들의 횡렴당하는 고통을 없애준 이보림(李寶林)

 

옮긴이 : 이 웅 재

 

  이보림(李寶林)의 생몰년(미상~1385년(우왕 11) 7월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요,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시중을 지낸 이제현(李齊賢)의 손자이며, 이서종(李瑞種)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엄격하고 품행이 방정(方正)하고 정치적 재능이 뛰어났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였고, 1357년 우사간(右司諫)으로 있으면서 나라에서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우간의(右諫議) 이색(李穡) 등과 함께 그 폐단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공민왕 8)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있을 때에는 새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하여 모든 경비를 지원케 하자 백성들로부터 함부로 염출하는 행위가 사라졌다. 목은 이색(李穡)의 기(記)에서 말하였다.

 

  “국자 학유(國子學諭) 양이시(楊以時) 군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여 말이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에 새기지 않아도 남아있겠지만,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는 쉽게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폐단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하므로,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양군(楊君)의 말을 따라 그 일을 상고하여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보면 사자(使者)가 부세를 급히 독촉하므로 백성들이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 현(縣)에서도 변통해줄 능력이 없어서, 백성들은 어쩔 도리 없이 이자 돈을 내어 메꾸게 되다 보니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면서, 밀린 세금을 징수하여 포(布) 약간을 장만하고, 안렴사(安廉使)에게 아뢰어 무명을 보조받고, 또 노비문제로 다투어 관아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한 명당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도합 무명 총 650필이 되었습니다.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지현(支縣)에서 급할 때에는 네 사람이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자는 받지 않으며, 부의 아전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을이 비록 산 중에 있으나 손님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접대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우리 사또가 그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랴 하여, 재(財)를 설치할 의향으로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이를 친히 맡아 경작하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여기에서 쌀 200섬과 콩 150섬을 얻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새로 개간한 밭에서 얻은 72섬을 보태어 열 가구가 쓸 수 있는 모든 용구를 완비하여 이를 모두 합쳐 제용재(공무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제공하기 위한 재원)라 이름하니, 이후로는 백성들이 함부로 횡렴(橫斂; 무법하게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일)당하는 고통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경산부사(京山府使)로 있을 때였다. 길을 가다가 어떤 부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붙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자였다.

 

  또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이 내 소의 혀[舌]를 잘랐다.”고 고소하였는데, 이웃 사람은 불복하였다. 이보림(李寶林)은 그 소를 목마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은 후에 물에 간장을 타 놓고 명령하기를, “차례로 소를 끌고 가서 마시게 하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다시 빼앗으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고소를 당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소가 놀라 달아났다. 그를 심문하니 과연 “소가 내 곡식을 먹기 때문에 그 혀를 잘랐다”고 자백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馬]을 풀어 놓아 그 말이 남의 보리 싹을 거의 다 뜯어 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하려 하자 말 주인이,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너의 보리가 수확이 없거든 내 보리를 너에게 주겠으니 고소하지 말라.”고 하므로 보리밭 주인이 고발을 하지 않았다.

 

  여름철이 되어 그 보리의 싹이 다시 나서 조금은 수확할 수가 있었다.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네 보리도 결실하였으니 주지 못하겠다.”라고 하므로 보리밭 임자가 고발하였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함에, 이보림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한 후에, “경주(競走)를 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주인이 따르지 않고 항의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어찌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보림이 말하기를, “보리도 그러하다. 뜯어 먹은 후에 돋아난 싹이 어찌 온전한 수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가 말을 풀어 놓아 남의 보리를 먹게 하였으니 그것이 첫 번째 죄요, 

 

사정하여 고소하지 못하게 꾀인 것이 두 번째 죄이며,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죄이니라.”라고 하면서 마침내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고소한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공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공정하고 명확하기가 이와 같았다.

 

  1375년(우왕 1)에는 판안동부사(判安東府使)로 지내면서 치적이 최상이라 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樸)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공문에 서명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어 밀직부사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제주에서 바친 고력(羖䍽: 일종의 암컷 黑羊)을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많이 죽고 새끼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죽은 양의 대가를 변상시키고 나머지 양을 재상들이 나누어 기르려고 하였다.

 

  이에 이보림(李寶林)이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백성에게 대가를 변상시키고 우리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은 양심에 꺼려지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되었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의 봉호를 받았다. 1385년(우왕 11) 7월 사후(死後)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은 없었다.

 

(2010.9.26. 원고지 1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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