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정인지 선생 묘(鄭麟趾先生墓)

야촌(1) 2011. 5. 3. 13:56

■ 학역재 정인지 선생 묘(學易齋 鄭麟趾 先生 墓)

 

○생졸년 : 1396년(태조 5)~1478년(성종 9)

○문화재지정일 :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3호.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산144번지

 

정인지(鄭麟趾) 선생의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 역재(學易齋),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권우(權遇)의 문인이다.

1414년(태종 14)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부제학(副提學)등을 지내고 성삼문「成三問,1418년(태종 18)~1456년(세조 2)」, 신숙주「申叔舟,1417년(태종 17)~1475년(성종 6),」 최항「崔恒,1409년(태종 9)~1474년(성종 5)」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웠다.

 

김종서「金宗瑞,1383년(우왕 9)~1453년(단종 1)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고 권제「權踶,1387년(우왕 13) ~ 1445년(세종 27)」, 안지「安止, 1377년(우왕 3) ~ 1464년(세조 10)」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도 지었다.

 

세조 때에는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당시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 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전면이 정인지선생 묘이고 뒤에 보이는 것이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이다. 봉분앞의 높이 250㎝, 폭 90㎝의 갈명

    은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선생이 찬한것으로 전해지는데, 앞면의 각자는 식별이 가능 하지만 뒷면의

   각자는 마모가 심해서 식별이 되지않는다.

 

↑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18世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의 三子 판윤공(判尹公) 이휴(李携)의 딸이다]

    ⓒ카페>한국의 능원묘ㅣ글쓴이 : 광나루|

 

↑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근경)

 

↑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원경)

 

↑묘역 아래 세워진 전각(殿閣)

 

왕릉의 전각과 동일한 형태의 전각(殿閣)이 선조에 대한 후손들의 효심은 이해되지만 넘치는 것도 꼭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사우(祠宇)를 건립했으면 더 좋았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묘 아래의 전각(殿閣) 우측에 서거정(徐居正)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있었으나 유실되어 1958년 다시 세웠다.

   새로운 이 신도비의 글씨는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쓰고 제전(題篆)은 성락서(成洛緖)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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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지선생 묘에 관한 이야기

 

정인지 선생의 묘는 우선 보는이로 하여금 우람하게 느껴지는 산이다.

언뜻 보면 인공으로 쌓은 것처럼 불거져 나온 산자락 끝이다. 주차장의 좌측에 정자각이 있고.산 아래에 작은 신도비가 있는데 비교적 마모가 덜하다. 산능선에 올라보면 2개의 묘가 기맥을 타고 자리하고 있다. 앞쪽에 있는 묘가 학역재(學易齋) 정인지(1396-1478)선생의 묘이고. 위쪽에 배위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묘가 자리해 있다.

 

묘의 봉분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250cm 폭 90cm의 크기의 묘표가 있다.

비문은 강희맹(姜希孟)이 지었다고 전한다. 표석 앞으로는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로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다.

 

사람이 살아 생전에 공이 있으면 과도 있는 법이다. 정인지가 죽자 무덤을 세 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하동정씨문중과 인근 마을에 전해오고 있는데, 정인지의 능력과 업적은 매우 뛰어나나 그러나 일부에서는 정인지(鄭麟趾)하면 충신으로는 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를 찾이 할 때, 사육신(死六臣)들 처럼 불사이군(不事二君)하지 않고 세조 편을 들어 정승까지 지냈다는 이유다. 정인지의 묘가 있는 마을은 반능이다. 옛날에 정승을 지낸 사람의 묘는 ´능(陵)´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정인지의 묘는 ´반릉(盤陵)´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정인지는 세조 편을 들어 정승까지 했지만 사람을 모함해서 죽인 일은 없다. 세조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정인지는 사람을 죽이지 않은 정난공신으로 알려졌다. 당시 세조에게 편든 사람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고, 또 세상이 뒤집히면 충신이 역신되고, 역신이 충신되는 세상이기에 정인지는 죽음의 순간에 유언을 남겼었다고 전한다.

"내 묘가 파묘 될지도 모르니 세 개를 써라."

 

이 유언을 후손들이 받아들여 묘를 세 개로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간혹 정난공신이나 사람을 많이 해한 고위직 관료들이 임종 전에 남긴 유언과 유사한 말이지만, 후세 사람들은 3개의 묘를 조성했지만 어느 것이 진정한 묘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정인지의 묘는 괴산 불정리의 묘가 정설로 알려져 있고 후손들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