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윤집 선생 묘(尹集先生 墓)

야촌(1) 2011. 3. 16. 22:31

윤집 묘(尹集 墓)와 신도비(神道碑) / Written by 한국의 능원 묘

 

▲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 사진 우측이 삼학사의 한분이신 윤집선생 묘이고 약간 좌측 아래 묘가 아들

     윤이선(尹以宣) 입니다.

 

윤집(尹集, 1606~163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증조는 윤우신(尹又新), 조부는 윤섬(尹暹), 아버지는 현감 윤형갑(尹衡甲), 어머니는 춘천부사 황치경(黃致敬)의 따님 창원 황씨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 윤집선생 묘역을 우측으로 오르면 신도비를 볼 수 있습니다.

 

▲ 묘역 하단에 위치한 후손 묘역 전후경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 좌측 봉분이 윤집선생 묘, 우측 봉분이 아들인 윤이선 묘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2리 407번지(마을회관에서 200m 지점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 윤집선생 묘역 전경. 1701년(숙종 27)에 세워졌다는 묘갈(墓碣)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 윤집 선생과 정부인 안동권씨 합장묘이나 삼학사들은 시신이 없으니 이 묘역 역시 단소입니다.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 윤집선생 묘역 후경과 윤집선생 묘역에서 바라 본 아들 묘역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 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윤집선생 아들인 윤이선(尹以宣) 묘.                                    ▲윤이선 묘역에서 바라 본 윤집선생 묘역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삼학사와 60만 조선 인질의 억울한 혼백은 어디에…

심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입력 : 2010.10.28 16:15

 

●조선 백성의 깊은 상처 숨겨진 요령성 심양

 

중국 요령성(遼寧省) 심양시(沈陽市) 중심가에서 20여㎞ 떨어진 화평구(和平區) 경새로(競賽路)에는 3년제 직업대학인 '요령발해전수학원(遼寧渤海專修學院)'이 있다. 지난 1992년 설립된 이 대학 교정에는 다른 대학에서 보기 힘든 '삼학사 유적비'가 서 있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분을 말한다.

 

●'삼학사 유적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조선은 단군이 처음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 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했다.'


유적비는 높이 1.5m, 폭 60㎝ 크기로 전면에는 삼학사의 행적을 기리는 1000여자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를 한글로 풀이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척화의 수괴'로 지목된 삼학사가 심양에 끌려와 청조의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이듬해(1637년) 3월 소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아 죽은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이다.

 

 

 ①심양 발해학원 교내에 건립된 삼학사비.

 ②심양관으로 추정되는 건물. 지금은 아동도 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③지난 2005년 심양 발해학원에 건립된 학사정 앞에서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 등이 낙성

     식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_계룡건설 제 공

④인조가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장면을 담은 삼전도비 동판.

 

●후손들이 살려낸 삼학사의 정신


발해학원 교정에 세워진 유적비는 사실은 진본이 아니다. 진본은 대학 구내에 마련된 삼학사비 자료실에 두 동강이 난 채로 보관돼 있다. 유적비가 조성된 것은 1935년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70년이나 더 된 비문이 어떻게 18년 역사의 발해학원에 보관돼 있는 것이며, 또 두 동강이 나게 된 것일까. 먼저 병자호란이 발발한 4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616년 중국 동북지방에는 만주족이 중심이 된 후금(後金·청)이 들어선다. 후금과 조선은 광해군이 유연한 외교정책을 편 덕분에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후임인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함)'을 표방하여 후금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금은 1627년 1차 조선 원정[정묘호란]을 개시해 개성을 점령하고 조선으로부터 '형제지국'의 맹약을 받아낸다.

 

그후 후금이 명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전비와 병력을 요구하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격하할 것을 강요하자, 인조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 의지를 굳힌다. 홍타이지(태종)는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그해 말 1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 원정길[병자호란]에 오른다.

 

청군이 압록강을 넘은 사실을 4일 뒤에야 안 인조는 화급히 수비부대를 편성해 보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청군을 막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게 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1만3000명의 병력으로 저항하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하게 된다.


전승을 기리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삼전도에 남긴 청군은 삼학사를 인질로 잡아가 끝내 죽였으나, 청 태종은 이들의 절개를 높이 사 사당과 비석을 세운 사실이 청대의 야사인 '질사(��史)'란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삼학사비를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흐른 뒤 만주에 살던 조선족 동포와 삼학사 후손들이었다. '삼학사 유적비'는 이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사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 수 없었다. 마을의 고로에게 물어보니 심양성 서문 밖 세 분이 순절한 곳 곁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 분 절사를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保靈寺) 근처이다.

 

얼마 안 있어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 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삼두' 넉 자가 찬연하니 질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후손들은 비신(碑身)을 찾지는 못했지만 비액을 기초로 하여 비석을 복원한 뒤 심양 춘일(春日)공원 양지바른 곳에 세웠다.

 

중수비 맨 아래에는 '이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1935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라고 내역을 적고 있다. 영원히 땅에 묻힐 뻔한 삼학사의 정신을 후손들이 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복원한 이 비석마저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비석은 두 조각이 나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되고 만 것이다.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나선 요령대학의 천문갑 교수[훗날 발해학원을 세웠으나 2009년 위암으로 별세]는 중국인의 집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0위안을 주고 구입하였다가, 지난 2005년 한국의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학 구내에 원비문은 보관하고, 이를 모조한 비석을 세운 것이다.

 

똑같은 비석이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에도 세워져 만주를 떠돌던 삼학사의 혼백은 3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



●백성들에게 더 가혹했던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온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沈陽館)의 흔적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심양시 심하구(沈河區) 조양가(朝陽街) 131호에 있는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이 그것이다. 기와 지붕의 모양이 중국의 전통 건축과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강점기 이곳은 일본 만철(滿鐵)출장소와 봉천영사관 등으로 쓰이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 시립아동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정보다 백성들이 더 컸다. 청군은 항복의 조건 중 하나로 군이 잡은 포로를 돈을 내고 데려갈 것을 강요했다.

 

청이 제시한 항복문 8항은 이렇게 되어 있다. '군에 포로가 된 자는 합법적으로 돌아오는 자를 제외하고는 조선이 모두 잡아서 청으로 보낸다. 조선에 와서 또는 귀화해서 사는 한인(漢人)이나 여진인은 모두 잡아서 청나라로 보낸다. 27일 이전에 잡힌 자는 심양으로 보내고 그 이후에 잡힌 자는 석방한다.'


이에 따라 포로를 잡으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청군은 철수하는 동안 포로 사냥에 혈안이 되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갔다. 김영삼 정부 시절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주돈식씨는 지난 2007년 펴낸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가 6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지천집(遲川集)'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명이었다'라고 한 것을 들고 있다. 

 

또 왕의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일기(南韓日記)'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은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명(明)을 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많은 병력과 노동력이 필요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끌려간 조선인은 양반·평민 할 것 없이 만주족의 노예로 전락하여 심양의 상설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중 돈 많은 양반집 가족은 거액의 속환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들이 빨리 빼내려는 욕심에 속환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돈 없는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몰래 탈출하다가 붙잡혀 매 맞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향 땅에 돌아온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며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는 조선의 남성 중심 문화 앞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심양시 9·18사변기념관 부근에 가면 '류조호(柳條湖)'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은 '호수'인데 주변 어디를 봐도 호수가 없다. 요령성 민족사를 연구해온 요령조선문보 오지훈 기자는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에 제법 큰 호수가 있었는데,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없이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한 70대 주민은 "60년대까지도 이 주변은 움푹 파인 땅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도로가 생겨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 나라 지도부의 무능으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은 억울한 삶을 이국땅에서 마감했으나, 지금 이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심양 서탑거리는 오늘도 한국인으로 붐빈다.

 

출처 : 나홀로 태마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