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연산군묘역(燕山君 墓域)

야촌(1) 2012. 4. 15. 15:21

연산군묘역(燕山君墓域)

 

↑좌측이 연산군(燕山君, 1476-1506) 묘이고 우측이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 1472,~1537)

    묘이다. 

 

↑연산군 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

 

▲이 묘역은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 안에 연산군의 묘가 있다.

 

제일 위쪽의 곡장안에 있는묘가 연산군 부부(燕山君 夫婦) 묘이고 그 아래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한양조씨(義貞宮主 漢陽趙氏) 묘이고 제일 아래쪽에는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綾陽尉 具文璟)과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묘이다.

 

●연산군 묘(燕山君 墓)

 

연산군 묘는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 1472, 1537)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成宗)의 큰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다.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쓰고 시(詩)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어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하였다(1506). 

 

그해 연산군은 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7년 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1513). 묘(墓)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曲牆),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규모가 작고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있다. 묘의 아래쪽에는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묘와 그 아래에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綾陽尉 具文璟)과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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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를 이곳 서울 방학동으로의 이장배경

 

연산군은 1506년 훈구세력이 주도하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 교동으로 유배가서 1506년 11월 6일 역질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며, 물도 마실 수 없고, 눈도 뜨지 못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거창군부인 신씨 와의 사이엔 2남 1녀가 있었고 후궁 조씨에게서 역시 2남 1녀를 낳았는데 네아들 모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연산군이 유배 가서 살던 집인 부근당의 터가 지금도 강화도 교동도에 남아있으며, 주민들이 화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조 처음으로 폐위된 연산군을 두고 학자에 따라 그가 광포하고 난잡스런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실록<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강화 교동도에서 세상을 떠자 그곳에 묻혔다가1512년(중종 7년) 12월 12일에 연산군부인 폐비 신씨가 상언하여,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인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로 이장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왕자군의 예로 개장토록 하고 개장할 때 쓸 쌀과 콩 100섬과 면포 150필, 정포 100필, 꿀 2섬, 참기름 2점, 밀까루 4섬, 황랍 28근을 하사했다. 또한 중종은 이듬해 2월 11일 연산군의 묘를 수축할 것을 명하고 양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묘역은 능성 구씨인 사위의 선영으로서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이곳에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묘의 상설로는 곡장 3면과 상석 2개, 장명등 2개,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과 제각이 있을 뿐이다. 

 

대군의 예우로 했기 때문이다. 자고 야트막한 봉분 앞에는 대리석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명은 전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되어있고, 후 면에는 정덕 8년(癸酉1513) 2월 22일 장이라 되어있다. 또한 부인의 비명은 전면에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 되어있고 후면에는 가정 16년(丁酉 1537)  6월 26일 장이라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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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太宗)의 후궁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의 묘가연산군 묘역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漢陽)으로 증조는 판도판서 조돈(趙暾)이고, 조부는 조선 개국1등공신 중추원부사 충정공 조인옥(趙仁沃)이고, 아버지는 판한성부사 절효공 백탄 조뢰(趙賚, 조인옥의 장남)이다. 의정궁주의 선조의 고향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같은 함경도 지역에서 대대로 살았다. 

 

할아버지 조인옥의 형이 판의덕부사 조인벽(趙仁璧)인데 조인벽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과 의비(懿妃)최씨의 소생 정화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태조 이성계의 매형이 되며, 고조부인 쌍성총관 조휘(趙暉)의 딸은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둘째부인으로서, 태조 이성계와는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가문은 조선을 건국할 때 개국공신이 많이 나왔으며, 가문이 조선 전기에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개국공신으로는 참찬의정부사 양절공 조온(趙溫, 조인벽의 장남), 우의정 양경공 조연(趙涓, 조인벽의 차남), 지돈녕부사 안정공 조후(趙候, 조인벽의 삼남)는 의정궁주의 당숙들이며, 판중추부사 조관(趙貫, 조인옥의 삼남)은 의정궁주의 숙부가 된다.

 

또한 그녀는 계유정난에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사사되었던 병조참의 파서 조순생(趙順生), 통례원 봉례 조관생(趙觀生), 사직 조효생(趙孝生), 사헌부 집의 조춘생(趙春生), 조덕생(趙德生)과는 친동기간이다.

 

세종4년(1422)에 태종의 마지막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4째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되어 이곳에 의정궁주 묘를 조성하였고,

 

그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연산군 부인 거창군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윗쪽에 연산군 묘를 이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