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희문(吳希文)의 임진왜란 피난기 일상
『쇄미록(鎖尾錄)』은 해주오씨(海州吳氏)가 배출한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중종 34)~1613(광해군 5)]이 남긴 일기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쓴 피난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일기 곳곳에는 일상의 삶을 살았던 당대인들의 생활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2012년 4월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쇄미록』에 나타난 오희문(吳希文)의 피난기 일상의 삶을 통해 420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쇄미록』에는 외가(外家)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실이 우선 주목되는데. 오희문(吳希文)의 부친인 오경민(吳景閔=長城縣監)을 지냄)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혼인 후 오랜 기간을 영동(永同)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연으로 오희문은 외가에 대한 정이 각별했고,『쇄미록』에는 오희문이 피난 시절 외가인 영동(永同)을 찾아갔음이 나타난다.
『쇄미록』에 나타난 임진왜란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고전의 향기 2010년 7월 12일 기사를 참조할 것, 이튿날 무주(茂州)를 지나 영동의 삼촌 숙모의 집에 도착하니 삼촌은 부증(浮症=신장염)으로 인해 증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여러 종형제가 모두 모여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했으나 삼촌의 병으로 인해 함께 즐길 수가 없었다. 하루를 머물고 황계(黃溪)의 남백원(南百源-英陽南氏)의 집으로 향했다. 백원은 나의 외종형(外從兄)으로서 어렸을 때 외숙모 밑에서 함께 자라서 정이 골육(骨肉)과 같은데, 서로 15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서로 보게 되니 슬프고 기쁜 마음이 교차한다.
이제 고원(故園=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에 오니 사물을 보는 대로 회포가 일어난다. 살아 있고 죽은 것이 세상을 달리했으니 슬픈 눈물이 절로 떨어진다. 수일을 머물면서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가 뵈면서 예전에 나를 기르느라 애쓰신 은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이 고을에서 나서 외숙모에게 자랐으니 은혜가 어머니와 같고 망극한 까닭이다.
[ 翌日 過茂州 到永同三寸叔母家 三寸得浮症 症勢極危 諸從兄弟皆會 相見甚喜 因三寸之病 未得共歡 留一日 向黃溪南百源家 百源乃余從兄 而童稚之時 同育於外母 情如骨肉 相離十五餘年 今得相見 悲喜交幷 今來故園 覽物興懷 存亡異世 感涕自零 留數日 尊拜外祖墓下 追減昔日劬勞之恩 不覺淚下 余生於此鄕 而養於外母 恩同罔極故也]2)『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3쪽.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종택(宗宅)에 전해오는 『금오계첩(金吾稧帖)』
위의 기록에서 오희문(吳希文)은 어린 시절에 외가인 영동(永同)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종형(外從兄)을 골육으로 표현하고, 외숙모의 은혜가 어머니와 같이 망극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외가에 대한 깊은 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오희문의 형제들은 모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으며, 『쇄미록』에서는 ‘나는 본래 한양 사람인데 여기에 손이 된 지가 이제 4, 5개월이 되니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친구와 같다. 한번 남쪽으로 오면서 이 고을을 바라보니 마치 내 고향과 같았는데, 이제 경계에 들어오니 내 마음이 또한 기쁘다.(余本京人 爲客於此 今之四五朔 上下若舊 一自南行 還望此縣 如吾故鄕 今來入界 吾心亦喜)’라는 표현에서도 오희문 스스로 한양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인 1593년 5월의 기록에는 전란 후 한양으로 돌아온 후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오희문의 집안이 서울을 기반으로 했음을 볼 수 있다. 죽전동(竹廛洞=오늘날 을지로 3가, 초동, 명동)의 친가는 당초에 적이 들어와 진(陣)을 쳤지만 적이 나간 후에 가까이 있는 시민(市民)들이 먼저 들어와 도둑질해갔다.
이현(泥峴, 서울 진고개)에 있는 윤해(允諧-吳希文의 次子로 삼촌 오희인(吳希仁)에게 출계함)의 양가(養家)는 온 집안이 모두 철거되었고, 깨진 기와와 헐어진 흙이 모두 남은 터에 가득하였다.
주자동(鑄字洞=오늘날 서울의 필동) 종가(宗家)에 가보니 모두 타 버렸고, 사당만이 홀로 남았는데 들으니 신주(神主)를 후원에 매안했다고 하므로 처음에는 들어가 보고 파내서 뵈려 하였으나 비(婢=여종) 천복(千卜)의 남편 수이(遂伊)가 말하기를, 집안에 죽은 시체가 쌓여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③[竹前洞親家 則當初賊雖入陳 而賊出後 市人在近者 先入偸去 ... 泥峴生員養家 則全家盡撤 坡瓦毁土 皆滿遺址 ... 進見鑄字洞宗家 則盡燒而祠堂獨存 聞神主埋于後園 初欲入見掘出展拜 而婢千卜之夫遂伊曰 家中死屍積在 不可入]3) 『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
「계사일록」癸巳 5월 8일, 582쪽. 위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오희문 집안의 근거지인 한양의 죽전동(竹廛洞)과 주자동(鑄字洞-서울 필동)은 전란 후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쟁 속에서도 오희문은 아들인 오윤겸 형제를 서당으로 보내 과거 진출을 독려하였으며, 그 결과에 집착하였다.
1594년 10월 오윤겸이 낙방했을 때는 크게 상심하였으며, 1595년 윤겸(允謙), 윤함(允諴), 윤해(允諧) 3형제가 별시 초시에 모두 합격하자 매우 기뻐하였다. 1597년에는 오윤겸이 별시문과에 급제하자, 온 집안의 기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단, 윤해가 실패한 것이 유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 집안에서 한 사람이 급제한 것만으로도 족한 일이니, 어찌 두 사람의 영광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전해서 기별이 오나 사실 같지가 않다.
강경(講經)한 사람은 2백여명인데 급제자는 19인뿐이라고 한다. 문중(門中)의 5대조 이하는 등과(登科)가 없었는데, 이번에 나의 아들이 처음으로 이겨낸 것이다.
지금부터 뒤를 이어서 일어날 희망이 있으므로 일문(一門)의 경사를 말로 어찌 다 표현하리오. 한없는 기쁨이 넘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님의 영혼이 필경 어둡고 어두운 저승에서도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비감한 마음이 극에 달한다.
④[渾家之喜可言 但允諧見屈 是可恨也 然一家一得足矣 豈望兩得乎 傳傳來報 未知實的也 講經之人二百餘人 而所擢只十九人云云 吾門玄高以下 無登第之人 今者余子始捷 從此庶有繼起之望 一門之慶如何可言 尤極喜幸喜幸 先君在天之靈 必喜慶於冥冥之中 悲感之心亦極]4)
『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정유일록」정유 3월 19일. 593쪽. 라고 하여 큰 기쁨을 표시함과 함께 조상에 도리를 다했다는 비감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전쟁의 와중이었지만 장인을 비롯한 인척의 제사는 잊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 나타난다. ‘22일은 장인 제삿날이다.
나와 종윤 형제가 제사를 지냈고 주인(主人) 형 이빈(李贇)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전북 익산시에 속한 지명)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二十二日 妻父之忌 吾與宗胤兄弟行祭 而主兄領軍到礪山 未還耳)⑤
’거나, ‘지난 달 29일은 곧 아버님의 돌아가신 날이다. 내가 이 고을에 있기 때문에 주인(主人) 형이 제사 음식을 많이 차려주면서 나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且去月二十九日 乃先君諱日 而吾在此邑 故主兄成備祭需 使吾設尊行之)’⑥는 기록에서 제사를 꼼꼼히 챙긴 저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오희문은 개인의 제사 뿐만 아니라 역대 선왕의 제사를 걱정하였다. ‘7월 1일 이 날은 곧 인종(仁宗)의 제삿날이요, 지난 28일은 또한 명종(明宗)의 제삿날이다. 주상께서 파천하시어 이 두 날을 당하시면 어떻게 마음을 잡으실까?
북쪽 하늘을 바라다보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七月初一日 是日乃仁宗諱日 而去念八 亦明宗忌辰也 主上播越 當此兩日 何以爲心 瞻望北天 不覺淚下)⑦’라고 하면서 피난을 떠난 선조가 선왕의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를 걱정했다.
아내가 자주 꿈에 등장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지난 19일 밤 꿈에 아내를 보니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내가 남쪽으로 온 후로 한 번도 꿈에 보이지 않더니 오늘 꿈은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슬프고 슬프도다.
(去十九日也 夢見荊妻 宛如平昔 自余南來 一不入夢 而今日之夢 是何故也 生耶死耶 悲乎悲哉)⑧’라는 기록이나, ‘새벽에 꿈을 꾸니 형포(荊布⑨, 아내가 집에 있는데 완연히 옛날과 같다. 막내 딸 단아(端兒)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내가 무릎 위에 안고 앉아 그 볼을 만졌다.(曉來夢見荊布在館洞家 宛如平日 末女端兒 塗粉淨粧 吾卽抱坐膝上 俯撫其腮)⑩ ’는 기록은 아내와 딸에 대한 그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병과 약재 처방에 대한 기록도 흥미를 끈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且今乃母主患瘧之日也 早施譴治之方三事 一則桃實呪符而食 一則古鞋底 燒火作木 和水而飮 一則燕子 糞作末酒浸 當鼻下 取臭氣 此皆古方也 得效最著而爲之 亦不難矣)11, 이외에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12,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나며, 힘든 상황이었지만 종정도(從政圖), 쌍륙(雙六) 등 여가 생활을 즐기던 모습도 나타난다.
『쇄미록』의 기록을 통하여,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일상의 삶을 살아갔던 오희문과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만나보았으면 한다.
⑤『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8쪽.
⑥『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9쪽.
⑦『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일록」임진 7월 1일, 518쪽.
⑧『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8쪽.
⑨ 荊釵布裙의 준말. 형차는 後漢 梁鴻의 아내 孟光이 가시나무 비녀를 꽂은 고사에서 나온말이며, 포군은 천한 옷을 걸친 아내를 뜻한다.
곧 자신의 아내를 낮춘 말이다.
⑩『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일록」임진 7월 3일, 519쪽.
11.『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을미일록」을미 6월 2일, 730쪽.
12『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계사일록」계사 8월 5일, 598쪽.
자료출처 : 신병주 글[고전의 향기 212-420년 전 임진왜란의 기억 - 오희문과 피난기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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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吳希文)의 세계도
1世(始祖) 오인유(吳仁裕) *고려 검교군기감(高麗 檢校軍器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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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 주예(吳周裔) 內庫副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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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世 민정(吳民政) 秘書省監(文科出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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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世 찰(吳札) 太子詹事(文科出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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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世 승(吳昇) 東大悲院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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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효순(吳孝純)-효충(吳孝冲) (知白州事) (倉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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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사운(吳士雲)--사렴(士廉)--광정(光廷) (泰安郡守) (書雲觀正) (工曹典書)
┌─────┘
8世 희경(吳希敬)-희보(希保) (中和郡事) (領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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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중로(重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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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계선(繼善)-계종(繼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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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 옥정(玉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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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世 경안(景顔)-경순(景醇)-경민(景閔)
縣監公 縣監公 ㅣ
(進士試)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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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 희문(吳希文)-희인(希仁) 出系
ㅣ
14世 윤겸(允謙)-윤해(允諧-出系)---여(女)-----윤함(允諴)-윤성(允誠)
추탄공 (申應槼 妻) 縣監 縣監
(楸灘公) (進士試)
領議政
配位 慶州李氏 ---------측실 덕수이씨(側室德水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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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15世 달조(達朝)-달원(達遠)-달사(達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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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世 달천(達天)-달주(達周)-여(女)--------여(女)
군수공 현령공 정두망 처 구봉서 처
(郡守公) (縣令公) (鄭斗望 妻) (具鳳瑞 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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