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록(西征日錄) /이정암 유필
필자소장본[影印本] 및 국력본
↑사류재 이정암선생의 서정일록 원문 유필(영인본 필자 소장품)입니다.
간행(1973년) : 플러스예감 李章熙(廷馣先生 十四代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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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世 이정암(李廷馣)
[생졸년] 1541년(중종 36)∼1600년(선조 33).
[문 과]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합격연령 : 21歲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5위/합격연령 18歲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서울 출신.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정형(廷馨)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承文院-오늘날 외교부)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로 사관을 겸하였다. 1565년 승정원주서(承文院注書-正七品)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병조좌랑(兵曹佐郞-正六品)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외직인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從五品)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고,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禮曹正郞-正五品)을 거쳐 다시 외직인 함경도도사로 나아갔다.
1569년 경기도도사(京畿道 都事-從五品)로 옮겼다가 경직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에 재임용되어 지제교(知製敎-왕의 敎書 작성을 담당하는 관직)를 겸하였으며, 다시 병조정랑(兵曹正郞-正五品)으로 전직하여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파견되어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正言-正六品)을 역임하였다.
1571년 예조정랑(禮曹正郞-正五品)·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正五品)으로 춘추관(春秋館-政事를 기록하는 관아)의 직책을 겸대하고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으로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으로 유생들에게 音樂 지도를 맡은 벼슬)에 임명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고, 그해 여름 연안부사가 되어 군적(軍籍)을 다시 정리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76년 장단부사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正三品堂下官)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에 양주목사((楊州牧使-正三品)로 나가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하여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584년 장령(掌令-正四品으로 司憲府의 監察職)· 사성(司成-成均館의 從三品관직)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587년 동래부사(東來府使-正三品)가 되어 내왕하는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보비에 관한 부적과 소송 사무를 관장하는 正三品堂上官)· 승지((承旨-正三品)· 공조참의(工曹參議-正三品)· 병조참의(兵曹參議-正三品)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로 있었는데, 선조가 평안도로 피란하자 뒤늦게 호종(扈從)하였으나, 이미 체직되어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開城留守-從二品) 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하였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여,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하여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兵曹參判-從二品)· 전주부윤(全州府尹)·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從二品)등을 역임하고,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事-從二品)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가 되고,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재차의 왜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1604년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 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四留齋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宋子大全 *燃藜室記述
◇壬亂海西義兵에 대한 一考(李章熙, 史叢 14,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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