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감시만어(感時漫語) - 省齊 李始榮 著

야촌(1) 2012. 1. 28. 23:48

구매일자 : 2012. 01. 25

 

감시만어(感時漫語)-省齊 李始榮 著

 

 

  ↑필자소장본

 

 

 

 

 

 

● 이시영(李始榮)

    (1868. 12. 3∼1953. 4. 19 )

 

호는 성제(省齊) 자는 성옹(聖翁) 한국의 독립운동가. 초대부통령

서울 저동(苧洞) 사람이다. 17세 때인 1886년에 식년감시(式年監試)에 생원발해(生員發解)하여 관계에 투신한 뒤 1909년 까지 형조좌랑(刑曹佐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수찬(修撰), 승정원 부승지(承政院 副承旨),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평남관찰사(平南觀察使), 중추원 칙임의관(中樞院 勅任議官), 한성 재판소장(漢城裁判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그는 조국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져감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昇薰)·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 동지들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위로는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會榮)과 아래로는 소영(韶榮)· 호영(護榮) 등 형제의 가족 50여명을 이끌고 남만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주진수(朱鎭洙)· 윤기섭(尹琦燮)· 김창환(金昌煥)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설립에 찬성하고 속속 유하현 삼원보에 집결하게 되었다.

 

1911년 4월에는 이곳 대고산(大孤山)중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등 최초의 항일 구국의 자치단체로서 괄목한만한 활동을 벌였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교사를 신축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 양성을 서둘러 1920년 동교가 폐교될 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그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 당시 일본 대판(大阪)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이시영(李始榮)은 만주(滿洲)의 무관왕(無冠王)이요. 만주일대(滿洲一帶)의 살인강도두령(殺人强盜頭領)이라"고 표현할만큼 일본 전체가 그를 크게 주목하게 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대가 습격하여 무차별 학살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니 그 참상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다시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중국의 원세개총통(元世凱總統)을 통하여 동삼성(東三省)의 한교(韓僑)문제를 원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에 그는 북경에서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煥)· 조완구(趙琬九) 등 동지들과 모여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곧 이어 상해로 달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가 동년 9월에 재무총장에 전임되어 1926년까지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 몇해 동안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에 고심한 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의혈지사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서 군자금은 수집하거나 혹은 비밀연락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일도 수없이 많았다.

 

1929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그는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있기전에 미리 항주(杭州)로 가서 임정 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를 개조(改造)하여 주석(主席)을 윤번제(輪番制)로 하게 됨에 따라 그는 다시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에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1934년에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 출판하여 우리 독립전선에 정신적 불길을 치솟게 하였다.

 

1935년 중· 일전쟁(中日戰爭)이 확대되어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에는 다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임정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독립운동 선상에서 고귀한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정식으로 대일전(對日戰)에 참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었음에도 우리 손으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지 못하였으며, 광복후에는 연합군의 개입과 민족내부의 사상분열로 남북이 분단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광복 후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저서로 1934년에 간행한 감시만어(感時漫語)가 전한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72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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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3년 04월 14일 목요일  제11551호[3면]

 

윤택중(尹宅重) 前 문교부장관 성재(省齊) 저(著) 감시만어(感時漫語) 출판기념.

성재 기념사업회(省齊 紀念事業會) 회장을 맡고있는 윤택중(尹宅重) 前 문교부장관은 초대 부통령을 지낸 고 성재 이시영선생이 일제의 한국 위사(僞史)를 통박한 감시만어(感時漫語)의 원본을 발굴 편역해 냈다.

 

이책은 中國人 황염배(黃炎培)가 지은 한사관『韓史觀』이란 책의 왜곡된 한국사관(韓國史觀)을 한문으로 바로 잡은 단 한권의 원본인데, 그동안 안호상(安浩相) 박사가 소장하고 있었다. 성재 기념사업회(省齊 紀念事業會)는 16일 상오 11시, 성재 30주기를 맞아 옛 서울고등학교 강당에서 감시만어(感時漫語) 출판기념회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