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반지부인초상(開國功臣 白川后人 趙伴之夫人肖像)
↑조반초상(趙胖肖像)
↑조반부인초상(趙胖夫人肖像) / 경주이씨 직장공 이양오의 딸)
◇시대 : 조선시대
◇재질 : 사직(絲織)-견(絹)
◇크기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번호 : 덕수(德壽)-0063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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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부인(趙胖夫人)
조반 부인은 계림이씨(鷄林李氏=慶州李氏)로서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從七品)을 역임한 19世 이양오(李養吾)의 딸이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가슴에서 두 손을 모은 자세이다.
화면 상부의 비단에 ‘개국공신 백천후인 조반지부인초상(開國功臣 白川后人 趙伴之夫人肖像)’이라 써 있다.
조반 부부상의 인물 표현을 보면, 단순한 선묘 위주로 그려 음영과 요철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들 초상이 조선 후기의 이모본이나 조선 초기 부부상의 유형과 인물 표현 전통을 방증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내용]
○사온서(司醞署) 조선시대 종오품아문(從五品衙門)으로 궁중으로 술과 감주(甘酒: 단술)를 공급하는 일을 담당
한다.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에 폐지하였다. 사온서(司醞署) 관원으로는 영(令: 從五品) 1원,
주부(主簿: 從六品) 1원, 직장(直長: 從七品) 1원, 봉사(奉事: 從八品) 1원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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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趙胖),
1341년(충혜왕 복위 2)∼1401년(태종 1).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백천(白川),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은천군 조하(趙何)의 손자로, 호군(護軍-正四品) 조세경(趙世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의 딸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매부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워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1368년(공민왕 17) 아버지가 늙어 환국하였다.
1382년(우왕 8)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였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1385년에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고 돌아왔다.이때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의 종 이광(李光)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협의를 한 우왕(禑王)의 명으로 조반(趙胖)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 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 正月之誅라고도 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개성윤(開城尹)이 되었다.1389년(공양왕 1)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렸으며, 이때 윤이(尹彝)· 이초(李初) 등의 본국에 대한 무고 사실을 명 황제 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다음해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여 이색(李穡) 등 수십 명이 피해를 당하는 옥사를 일으켰다.1391년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省憲)의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어 죽림(竹林)으로 귀양 갔으나 곧 풀려나, 139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하여졌으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從二品)가 되었다. 또한, 백관(百官)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년(태조 3) 6월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명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렸고, 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하여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1395년 판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1396년과 1397년에도 하정사로서 명나라에 갔으나 등주(登州)에서 제왕(齊王)의 방해로 다음해에 돌아왔다. 시호는 숙위(肅魏)이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太祖實錄太宗實錄李和開國功臣錄券朝鮮開國功臣에 대한 一考察(朴天植, 全北史學 1, 1977)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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