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제의례·제문

제사의 의미

야촌(1) 2011. 11. 6. 15:31

돌아가신 부모와 살아있는 자식의 매개 역할.

 

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행위의 기본이 되는 생각, 즉 우리나라 사람이 갖고 있는 조상관을 이해해야 한다. 조상은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죽음은 자손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변형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조상 의례를 매개로 사망한 부모는 자식들과 의존성을 유지하고 자식들은 제사를 통하여 효의 의무를 다한다. 조상은 자손의 기억에서 점차로 사라져 가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혀 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는 효를 기초로 한 것으로 유교문화권에서는 효가 최고의 기본윤리가 된다.

따라서 왕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는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생겼으며 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제사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갚는다는 보본(報本)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과 인류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 어버이 그리고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효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물질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또 하나는 어버이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제사로 이어진다. 제사라는 의미가 반드시 부모가 사망했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 있을 때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상, 즉 부모들은 크게 4단계로 나뉘어 후손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첫째는 '산 조상' 단계.

과거에는 환갑까지 사는 예가 드물어 환갑 이후는 현실 생활에서 떠나 죽음을 준비하는 비활동 단계로 여겼다.

환갑 때부터 사망까지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공경받는 '산 조상'으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사망에서 탈상까지의 단계.

부모가 사망한 후에는 3년 동안 장남의 집에 상청을 마련해놓고 상식(上食)도 올리고 생신도 지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제일 먼저 상청에 인사를 드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마치 집안에 살아 계신 어른처럼 대접받았던 것이다.

 

셋째는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의 단계.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 1년에 4번 이상 자손으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곧 본인의 기제사 날과 배우자의 기제삿날, 설날과 추석이다.

설날과 추석날 대이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상이 사당에서 제삿밥을 얻어먹은 기간은 보통 4대, 약 100년 동안 계속된다.

마지막 단계는 1년에 한 번씩 묘를 자손들이 찾아가는 시제이다.

 

종손으로부터 4대조 이상이 되는 사당의 신주는 묘 옆에 묻히면서 먼 조상이 된다.

이때부터 시제의 대상이 되는데 시제 대상이 된 조상은 1년에 한 번씩, 문중의 자손들이 묘에서 올려주는 제례를 받게 된다. 이 시제는 영원히 계속된다.

 

■ 4대 봉사

 

제사는 주로 네 가지로 나뉘어 치러진다.

조상의 사당을 집안에 모시고 지내는 사당제, 조상에게 철따라 지내는 사시 제, 묘에서 지내는 묘제, 사망한 날에 지내는 기제가 있다.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지내는 사당제는 벼슬아치나 선비 등 특별히 뼈대 있는 집안에서 3, 4대의 조상 위패를 모시고 지내는 것으로 사당이 없는 일반인들은 사당제를 지낼 수 없었다.

 

사시제는 일반적으로 시제라고도 하는데 계절에 따라 네 번, 즉 설날 한식 추석 동지에 지낸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음식을 올린다는 뜻도 있어 그 의식이 간단하며 차례(茶禮)라고도 한다.

 

묘제는 날을 잡아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제사로, 보통 음력 10월에 지냈다.

시조에서 어버이까지 지내기 때문에 해당되는 직계 자손들이 전부 참석했는데 자손이 많은 집은 묘제가 아주 거창했다. 기제는 4대조까지만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대 봉사(三代奉祀) 또는 4대 봉사는 일찍이 선조 가운데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있으면, 후대에 큰 인물이 없더라도 습성화된 의식이 지속된 결과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국가적 규례를 넘는 과도한 숭조(崇祖) 사상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가정에서 4대 봉사를 지내는 것은 자신들이 선비의 지위에 있었음을 내보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대 봉사의 의미는 조상신이 존재하는 기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대 봉사가 지났다고 하여 선조와의 연을 끊는 것은 아니다.

 

시조나 조상 중에서 공을 세운 분의 제사는 시제를 통해 계속하여 이어나갔고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분은 4대 봉사 전에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는 묘안도 지켜졌다. 어떤 식으로든 조상과의 연을 계속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자 상속의 근본이다. 따라서 종통을 이어받는 장자는 다른 자손보다 재산을 많이 확보하도록 했다. 만일 장자의 후손이 없으면 그 종통이 차순위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 중에서 뽑아 종손의 양자를 삼았다.

 

종통이 이와 같이 엄격하게 대를 이었으므로 아무리 종손이 어리더라도 제주는 종손이 되었다.

제주의 일차적인 책임은 장남이 졌고, 차남 이하는 이차적이고 보충적인 책임을 졌다.

 

이차적인 책임이란 장남과 같은 정도의 책임은 아니지만 조상 제례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분담한다는 의미이다. 보충적인 책임이란 장남이 죽었을 때 차남이 장남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장남이 자손 없이 죽었으면 장남의 역할을 하며 장남이 어린 아들을 낳고 죽었을 경우에는 조카가 성장할 때까지 장남의 제사를 지낸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재산 상속이 이루도록 한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종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는 선조의 뜻을 받아 사망한 사람이 원하는 것, 바로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에 충실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종통에게 재산을 몰아줌으로써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 제사와 같이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은 이럴 경우 당연히 장남, 즉 종통을 잇지 못한 차순위 형제들로부터 불만의 요인이 되겠지만 선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순위 형제들도 자신이 성공하여 일가를 얻는다면 자식들이 자신을 따로 제사 지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시쳇말로 해서 제삿밥을 얻어먹는 것은 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후손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받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악착같이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살아서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이 성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들이 죽어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부터 1600년대 중엽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철저하게 아들·딸 구별이 없이 균등하게 재산이 상속되었다.

 

그러나 1600년대 중엽 이후부터 이러한 균분 상속 형태의 비율이 줄어들었으며 자녀의 성별과 출생 순위에 따른 차등 상속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례제도의 변동과 제사 방식의 변경에도 기인한다.

 

고려시대의 상제(喪祭)는 불가의 법을 숭상했기 때문에 매장이 아닌 화장에 의해 유골을 절에 안치하고 불교식 제사의식인 제(齊)를 거행했다. 제사의식도 절에서 대행했기 때문에 제사 목적으로 재산을 아들과 딸, 장남과 차남 간의 차등으로 구분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제사상속에 있어서도 적자 주의에 따른 장자 봉사가 행해지지 않았다. 부모의 재산을 균분 상속했으므로 부모에 대한 제사도 자녀 간의 분할이나 윤회 봉사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때만 해도 상제는 유교식의 상제 법을 따르면서도 장남 만이 제사를 상속하거나 상례를 주관하지 않고 아들과 딸 혹은 외손 등이 모두 상례 절차를 주관했다. 제사를 상속하거나 시행하는 경우에도 아들과 딸이 분할하여 각기 담당한 제사를 봉사하게 하거나 그들 사이에 윤회하며 봉사하는 형태를 취했다. 문제는 부모의 생각이다.

 

부모 측면으로 볼 때 자신의 직계 자손들이야 제사를 잘 지내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후대의 자손들이 자신을 기리며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이때 도입된 성리학은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장자 단독 봉사로 굳힌다면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도 일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확실하게 제사 지내줄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단 사망하면 모든 인연이 사라진다는 불유쾌한 상황을 제사를 통해 영원히 후손들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염원이야말로 인간의 소박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소망이 부모의 재산을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하거나 차남 이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상속 지분을 갖는 적장자 우대의 상속제도로 변한 것이다.

 

■ 정성이 담긴 제사

 

조상의 이미지에 대한 남녀 간의 차이는 여자들의 결혼과 무관하지 않다.

결혼한 후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복리는 시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결정되었다.

 

특히 자식들이 태어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남편 가문의 조상이 되었고, 남계에 의한 제례가 충실히 지켜지는 한 시집에서 다시 조상으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들은 친정집 부모보다

 

시부모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조상에 대한 개념이 다소 자유로웠다. 하지만 아들을 낳아야만 그 집안의 조상이 되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간다고 믿었다. 그 점에서 아들이 지는 짐은 제법 무거웠다.

 

딸은 출가하면 남의 집 식구가 되어 그곳에서 조상이 되지만 아들은 자신의 조상을 모시며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바로 이 점이 후손이 끊어지는 것, 즉 아들이 없는 것을 크게 걱정하는 이유이다.

 

자손이 없을 경우 혈족에게서 양자를 들여오는 풍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조상은 무덤에 머물며 제사와 차례 때 종손의 집으로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제례를 지낼 때에는 방문을 열어 영혼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또한 자정을 전후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은 첫닭이 울기 전이어야 영혼들이 비교적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치를 때는 반드시 예물을 올리게 되는데,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깊은 만큼이나 최고의 것을 사용하려 한다. 사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이고 또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준다.

 

그러나 예의는 물질적인 것 이전에 마음의 세계가 중요하다는 참뜻을 잃지 않는다면 형편에 알맞은 검소한 태도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술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습성화된 음식물 중에 하나이지만 크고 작은 의식을 거행할 때 필수적인 예물로 제사에서 특히 중요시된다.

 

술을 이와 같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에서 지성을 나타낼 정도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술을 만드는 데 지극히 정성을 쏟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이 제사에서 술이 갖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사용 술로는 화학주가 아닌 곡주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술이 '지성'의 상징물이었으므로 제사할 때 필수 물품이긴 하지만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물도 대신한다.

 

그 대신 '맑은 물'을 올릴 때에는 '물'이라 하지 않고 '무술' 또는 '현주(玄酒)'라고 부른다.

현주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의미상의 술일뿐이다. 한편 오늘날 예물로 흔히 꽃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 우리 동양의 전통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동양인의 의식 속에는 사람의 기호(嗜好)를 위해 꽃의 생명이 꺾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 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 앤티 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 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