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표효행정문(李東慓孝行旌門)
↑효자 은촌(李東慓)선생 정려기
↑응천사 묘정
충남 천안시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이곳은 은촌 이동표(隱村 李東慓) 선생의 유풍이 전해오는 경주이씨(慶州李氏) 평리성암공파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마을옆 기슭에 있는 응천사(應天祠)는 곧 은촌(隱村) 이선생을 모신 사우(祠宇)이며 그 옆에 선생의 효행정문(孝行旌門)이 서있다.
선생의 휘(諱)는 동표(東慓), 자는 중건(仲建)으로,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어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예의와 법도에 따라 천안 북면 전곡리에 장례를 치르고 6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깊은 산골인지라 때론 호랑이가 와서 함께 하였고,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증자동(曾子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풍문(風聞)에 듣고 선생의 여막을 찾아 본 후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알려 숙종(肅宗)으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고, 그 뒤 10년이 지나 향인(鄕人)과 유현(儒賢)들이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추증)하고 정려를 명하였으나 가세가 빈하여 정문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오다. 1992년 후손들이 마음을 모아 세워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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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 중건기(旌閭重建記)
천안 수신면 남쪽 망경산 아래 증자동(曾子洞)에 정문(旌門)이 있어서 길가에 높이 선 것은 옛날 효자 사헌부 지평 행 동몽교관(孝子 司憲府持平 行 童蒙敎官) 은촌(隱村) 이선생의 정문이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요 자는 중건(仲建)이니 평리공(評理公) 휘 인정(仁挺)의 후손으로 경주세가(慶州世家) 이다. 효성이 출천하여 어려서부터 혼정진성과 출고반면(昏定震省 出告反面)에 어른과 같이 행하시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시어 행실에 힘쓰시었으며 몸소 농사에 힘써 부모를 봉양하시되 화한 빛으로 조금도 어김이 없으셨다.
효제(孝悌)로 근본을 하고 학문에 길(道)을 정도(正道)로 잡아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보지 않으시고 소학과 사서로 수신(修身)하는 법을 삼으셨다. 부모가 병상에 계실 때 대변을 맛보시고 병의 차도를 증험(證驗)하시며 하늘에 이 몸이 대신 하기를 빌었고 부친상을 당해서는 애통함이 예절에 지나치고 장례 후에는 시묘(侍墓)를 하고 상을 마치니 산소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자리는 확 모양을 이루고 피눈물 떨어진 곳에는 잔디가 말랐다.
묘소가 북면 전곡리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직 때때로 호랑이가 내려와 호위 하였다. 모친상 때에도 전과 같이 하였다. 어사가 듣고 여막을 방문하여 감복하고 조정에 아뢰어 숙종 때에 동몽교관을 재수 하시고 그 뒤에 선생의 덕에는 부족하다 하여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받으셨다.
선생이 항상 증자의 말씀을 복종해서 실천하니 마을 사람들이 선생의 덕이 증자와 같다하여 마을의 이름을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여 이제까지 내려오고 있다. 산소 옆에 나무가 항상 푸르러서 효조(孝鳥)가 누식하니 오호라 무릇 효는 백행의 근원(百行根源)이요 만선의 근본(萬善根本)이니 천지신조(天地神袛)와 금수초목(禽獸草木)이 어찌 감응(感應)치 않으리오,
선생의 6대조 고 호군공(護軍公) 휘 식(植)과 고조고 승지공(承旨公) 휘 광전(光荃)은 다같이 충절로 인하여 안성 원곡에 정문이 있다. 무릇 충과 효는 하나이니 그 부모에 효도하면서 그 인군에 불충 하는 이 없으며 그 인군에 충성하면서 그 부모에 효도 않는 자 없는 지라 선생의 대효는 전해 받은 바가 있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 후손들이 또 조상을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하여 봄과 가을에 제향을 모시니 주시(周詩)에 가로되 군자가 만년토록 길이 효자 효손이 이어온다 하니 선생에게 이른 말이다. 슬프도다. 세상의 교화가 쇠퇴한지 오래이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부모를 위하여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서 어찌 송구(悚懼)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것을 기록하노라.
계유년 정월 기망에 진양 강인규는 삼가 짓다(癸酉 正月旣望 晋陽 姜麟圭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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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사 묘정 비문 (應天祠 廟庭碑文)
천안군 수신면 남쪽에 망경산(望京山)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증자동(曾子洞)이 있으니 이곳이 은촌 선생(隱村)의 유풍이 전해 오는 경주이씨의 세거지 이다. 마을 옆 기슭에 있는 응천사(應天祠)는 곧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은촌(隱村) 선생을 모신 사우(祠宇)이고, 그 옆에는 선생의 효행을 표창한 정문(旌門)이 서있다.
단기 4324년(서기 1991년) 2월에 유림의 공의로 성균관장에게 천거하여 정문을 세웠고, 다음에 봄 3월에 선생을 사우에 봉안(奉安)하였다. 무릇 생폐(牲幣)을 드리고 제사를 모시는 것을 도덕을 존모함이니 도덕을 존모하면서 세덕과 선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신라 원훈 좌명공신(新羅元勳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소판(蘇判) 벼슬을 지내신 휘 거명(居明)이 기(起) 세조이시다. 휘 금서(金書)는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시고 휘 핵(翮)은 호가 열헌(悅軒)이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내시고 휘 인정(仁挺)은 호가 성암(誠菴)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셨다.
그러나 직간(直諫)으로 임금의 뜻을 거스른바 되어 한때 불우한 처지에 있었으나 문정공 이지시(文正公 李之氏)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휘 원선(元善)은 벼슬이 전서(典書)요, 휘 진(進)은 진사로써 감무(監務)를 지내셨는데, 문덕(文德)이 찬란하여 태종의 잠저(潛邸)때에는 교분이 두터웠다.
휘 식(植)은 어모장군 호군(禦侮將軍 護軍)벼슬을 하셨는데 금성대군 옥사(錦城大君 獄事 )에 연류 되어 청하 현(淸河縣)에 은거하시다가 혐의가 풀린 뒤에 승지(承旨)벼슬에 추증(追贈)받았고 충절(忠節)로 정문을 명(命)하니 안성군 원곡면(安城郡元谷面)에 세웠다.
이분의 아들이 후(厚) 인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寒暄堂 金先生의 문인 이였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으니 곧 선생의 5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광전(光荃)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내셨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시고 순절하니 정려를 명하여 조손(祖孫)의 정문이 한곳에 서있다.
증조의 휘는 우신(又新)인데 집의(執義)를 배(拜)하였고 조의 휘는 문서(文瑞)인데 문과 진사(進士)로 광해조의 어지러울 때 시를 지어 이이첨(李爾瞻)과 절교(絶交)하였다. 고의 휘는 무(茂) 인데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승지벼슬을 추증 받았다.
선생의 휘는 동표(東慓)이고 자는 중건(仲建)인데 천성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성현의 글이 아니면 접견하지 않으셨으며 소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익혀 성현의 언행을 실천하셨다.
몸소 밭을 갈아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다가 부모상을 당해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슬퍼하시며 정예(情禮)를 다하시고 장례를 모신 뒤에 6년 동안을 시묘하셨다. 깊은 산골이라 때로는 호랑이가 나와서 보호하였고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사초가 말랐다고 한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덕행이 옛날 중국의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바꾸어서 증자동(曾子洞)이라 하였다. 장 하도다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교육의 원천이니 어찌 동인의 감화뿐이랴 어사가 선생의 여막을 찾아보고 크게 감복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숙종께서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재수하셨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서 향인의 논의로 다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시니 훌륭하도다. 지극한 효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감흥 하는지라 신명이 감흥하면 풍속이 변하며 지명도 바뀌게 되나니 선생의 덕이 그러하기에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빛나도다.
선생의 묘정(廟廷)에 효조(孝鳥)가 서식하고 장송구목이 충해와 설화도 없으니 과연 신명(神明)의 감흥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아들은 만승(萬升), 만익(萬益)이요 손자는 종진(宗震), 득헌(得獻), 성헌(聖獻), 종환(宗煥)이요 증손은 경상(敬常), 경철(敬哲), 경천(敬天), 경노(敬老), 효순(孝舜), 효증(孝曾)이요.
현손은 태진(泰鎭), 형진(衡鎭), 헌진(憲鎭), 정진(定鎭), 관진(寬鎭), 원진(元鎭), 화진(華鎭), 좌진(左鎭), 익진(翼鎭),이요 5대손은 응규(應奎), 학규(學奎), 환규(煥奎), 선규(善奎), 병규(秉奎), 화규(華奎), 인규(麟奎), 용규(龍奎), 완규(完奎), 철규(喆奎), 의규(毅奎), 준규(俊奎)이다.
이상 선조의 5대손까지의 위패(位牌)를 행렬의 순차로 같은 사우(祠宇)에 모시고 매년 가을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기로 하였다. 모름지기 세일제는 묘정(墓庭)에서 봉행함이 선현의 예전(禮典)이라 하겠으나 세속의 변천에 따라 사우(祠宇)에서 봉행케 됨을 조상의 영영(英靈)께서도 감흥(感興)하시리라 믿는다.
이 묘정비(廟庭碑)를 세움에 있어 규석, 규진, 종건(圭錫. 圭鎭. 鍾健)이 나에게 기문을 청함으로 제삼 고사하다가 삼가 찬하노니 은촌선생의 덕행과 효성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단기 4325년(서기 1992) 3월 일
진향 강인규는 삼가짓다(晋陽 姜麟圭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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