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제185호 | 20100925 입력
어떤 정치 지도자가 혜성같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혜성같이 등장한 지도자가 성공의 결실을 거두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기존 체제와 맞서 싸우면서 미래를 지향해야 하지만 대부분 기존 체제와 싸우다가 끝을 맺기 마련이다.
혜성같이 등장했던 대원군의 앞에도 마찬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
① 대원위 분부 시대
↑대원군 초상
대원군은 극적으로 집권했지만 그 앞에는 과거와 전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의 철종이 사망했다.
5남 6녀를 두었으나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간 4녀 영혜(永惠)옹주를 제외하고는 어려서 모두 죽어 후사가 없었다.
설혹 왕자가 있었어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웠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국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철종의 큰형 이원경(李元慶)이 헌종 10년(1827) 사형당하고 철종도 여기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음에도 국왕으로 영입했다는 것은 왕권이 이미 유명무실하다는 증거였다.
누가 국왕이 되든지 권력은 노론 소수 벌열(閥閱)의 것이었다.
그런데 두 외척가문의 대립이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에게 기회를 주었다.
조만영(趙萬永)의 딸이자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풍양 조씨, 순조비 순원왕후와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안동 김씨가 그들이었다.
한때 풍양 조씨가 조만영을 필두로 안동 김씨에 맞서기도 했으나 헌종 12년(1846) 조만영의 사망을 계기로 그 세가 약화되고 장김(壯金)이라 불렸던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대왕대비 조씨는 철종 사망 당일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을 원상(院相)으로 임명하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대왕의 대통(大統)을 잇게 하기로 작정했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 8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조씨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을 철종이 아닌 자신의 남편 익종의 후사로 결정한 것이었다.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 사이에 묵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으나 이미 내린 결정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명복이 만 열한 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철종 사망 당일 대왕대비 조씨의 수렴청정 절목(節目: 법령)이 반포되었다.
그러나 대비 조씨는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고 국사가 다난(多難)하니 대원군이 대정(大政)을 협찬하고…백관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지휘를 청(聽)하라(현채, 『동국사략』)”고 대원군에게 대권을 넘겼다. 이렇게 대원군의 시대가 극적으로 열렸다.
↑남연군 묘소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다. 대원군은 복치형 길지라는 이곳으로 부친 묘를 이장해 권력을 꿈꿨
다.
↑남연군 묘비(南延君墓碑)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恩信君 ) 이진(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의 후사였다.
은신군은 열여섯 때 죽어 후사가 없자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李秉源)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그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이구(李球)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불우한 생애를 보내던 흥선군의 집권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가난한 파락호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흥선군은 조지서(造紙署) 제조 등의 명목상 한직들도 거쳤지만 종친부 유사당상이나 정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 같은 실직도 역임했기에 불우한 처지만은 아니었다.
흥선군은 이런 관직생활을 통해 왕실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천하장안(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이라 불렸던 평민들과도 교류하며 시중의 민심도 수집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의 묘도 이장했다.
지사(地師)로부터 충청도 덕산 대덕사(大德寺)의 한 고탑(古塔)이 ‘큰 길지(吉地)’라는 말을 들은 흥선군은 재산을 팔아 2만 냥을 마련해 대덕사 주지에게 절반을 주어 절을 소각하게 했다. 꿈에 탑신(塔神)이 나타나 ‘이곳에 묘를 쓰면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3형제의 꿈이 똑같자 형들이 두려워했다.
막내 흥선군은 분통하면서 “장김의 문전을 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때 잘 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이장을 단행했다. 그곳이 복치형(伏稚形: 꿩이 매의 공격을 피해 엎드린 형상) 명당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일화들은 이하응의 강한 권력 지향성을 보여준다.
드디어 대원군은 극적으로 집권한 후 벼르고 벼르던 칼을 뽑았다.
대원군 개혁정치의 큰 목표는 노론 벌열가문의 약화와 왕권 강화였다.
이와 관련해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대원군이 집권 초 어느 공회(公會)에서 재상들에게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시키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한다”고 말하자 아무도 대꾸를 못했는데 김병기(金炳冀)가 “대감의 지금 권세로 천리를 지척으로 만들 수도 있고, 남대문을 3층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태산은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천리 지척은 종친(宗親)을 높인다는 뜻이고, 남대문 3층은 남인을 기용하겠다는 뜻이고, 태산 평지는 노론(老論)을 억제하겠다는 뜻인데 이는 쉽지 않으리라는 암시였다. 대원군은 고종 1년(1864) 6월 함경감사 이유원(李裕元)을 좌의정, 홍문관 제학 임백경(任百經)을 우의정에 임명해 충격을 주었다.
이유원은 소론이었고 임백경은 북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백경은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이 몰락한 지 240여 년 만에 등장한 북인 정승이었으나 그해 죽고 말았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에는 남인 유후조(柳厚祚)를 우의정에 임명해 다른 당파를 중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고종 2년(1865)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만동묘는 송시열(宋時烈)의 뜻에 따라 그 제자들이 충청도 괴산군 화양리에 세운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서 황제를 빙자해 제후(조선 임금)를 압박하는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총본산이었다.
그 곁의 화양동 서원은 우암(尤庵) 송시열을 제사 지냈는데 그 폐해가 극심했다. 우암사(尤庵祠)라고도 불리는 화양동 서원이 제사에 쓸 제수전(祭需錢) 징수를 빙자해 각 고을에 보내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관령을 능가해서 이를 거부하는 수령은 통문(通文)을 돌려 축출할 정도였다.
『매천야록』은 “묵패로 평민들을 붙잡아 껍질을 벗기고 뼈를 빻아 남쪽 지방의 좀이 된 지 100년이 되었다”고 개탄하고 있다. 대원군도 어린 시절 화양동 서원에 갔다가 원유(院儒)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하는데, 전국의 노론 계통 유생들이 ‘통유(通儒)’라 불리는 격문을 돌리며 거세게 항의했으나 대원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대원군은 고종 8년(1871)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47개 소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대원군은 또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본산인 비변사(備邊司) 개혁에 나섰다.
비변사는 중종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진압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했던 군령기관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정권이 후금(後金: 청)과의 항쟁을 명분으로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부기구를 지배하면서 왕권을 능가하는 상설 관청으로 변질되었다.
비변사의 도제조는 전·현직 정승이 겸임하고 제조는 병조판서를 포함한 각 조(曹)의 판서와 강화유수·훈련대장 등이 겸임했다.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을 비변사당상이라고 불렀는데 정원(定員)도 없었다. 3인이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서 비변사에 상주했는데 중앙과 지방의 관료 임명 등의 행정권과 군사권은 물론 비빈(妃嬪)의 간택까지 관장하는 국정 최고기관이 되었다.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풍양 조씨, 달성(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반남 박씨 등의 6대 가문이 제조당상을 독차지하면서 국가권력을 독식했다. 비변사에서 주청하면 국왕은 거부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원군은 고종 1년(1864) 2월 비변사와 의정부를 나누는 분장절목(分掌節目)을 반포해 의정부를 비변사에서 독립시켰다. 고종 2년(1865) 3월에는 “서울과 지방의 사무를 모두 비변사에 위임한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체로 보아 그럴 수 없다(『고종실록』 2년 3월 28일)”는 대왕대비의 전교로 비변사를 의정부에 흡수시켰다.
비변사는 의정부 조회 때 대신들이 임시 거처하는 대기실로 격하되고 비변사에 내렸던 ‘묘당(廟堂)’이란 현판은 의정부 대청으로 옮겨 달게 했으며 비변사의 인장(印章)은 영원히 녹여 없앴다.
대원군은 왕권을 억압하던 노론 벌열과 그들이 장악한 국가기구들을 개혁하는 것으로 왕권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이른바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는 인조반정 이후 그 어느 임금의 명령보다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노론 세력의 약화에 따른 왕권 신장은 부분적 대책일 수밖에 없었다. 고종 즉위 1년 전인 철종 13년(1862) 2월 경상도 진주의 농민들이 일어난 것을 필두로 전국 30여 곳의 백성들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하는 삼남(三南)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고종 즉위 한 달 전에는 동학교주 최제우가 체포되었지만 동학은 더욱 성한 기세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수탈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차차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원군이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그의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무관의 제왕’ 흥선군 권문세가와 전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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