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문집 발(三간본) - 유성룡

야촌(1) 2011. 8. 17. 02:04

익재문집 발(益齋文集 跋) 

 

류성룡 찬(柳成龍 撰)  

 

1542년 11월 7일 ~ 1607년 5월 31일 경자년(1600, 선조 33) 가을 내가 하촌[河村-오늘날 안동 하회(河回) 마을의 옛지명]에 있을 적에 동도윤(東都尹-동도는 경주)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새로 판각(板刻)한 《익재선생문집》 인본(印本)을 보내오고, 또 말하기를,  “익재 선생은 나의 선조(先祖)입니다.

 

왜란(倭亂)을 겪은 뒤 내외(內外)의 문적(文籍)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이 책만이 간신히 불타 없어짐을 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없어져 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편질(篇帙)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이를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영구히 전해지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跋)을 지어 주시오.” 하므로, 내가 삼가 받아 다 읽어보니, 《익재난고(益齋亂稿)》가 10권(卷), 《역옹패설(櫟翁稗說)》이 4권, 《효행록(孝行錄)》이 1권으로 모두 약간 권(若干卷)이었다.

 

인하여 책을 어루만지면서 감탄하기를,“많구나, 선생의 글이여!

민첩하구나, 이공(李公)의 거사(擧事)여!

전(傳)에 이르기를 ‘군자의 유택(遺澤)도 오세(五世)가 지나면 끊어진다.’ 하였으나, 이는 다만 대개(大槪)를 말한 것이다.대저 덕(德)이 두터우면 그 빛이 오랜 세월을 흘러가는 것으로, 그 유풍(遺風)과 여운은 백세(百世)가 지나도 오히려 보존되는 것이니, 어찌 단지 오세로 한정지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이른바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세 가지라는 것은, 덕(德)ㆍ공업(功業)ㆍ입언(立言-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가 반드시 공업을 세우는 것은 아니고,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입언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5백 년을 통하여 세상에 명예를 드날린 사람이 많지만, 그 본말(本末)이 겸비하고 시종(始終)이 일치되어 우뚝하게 높이 솟아 의논을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을 찾아본다면, 오직 선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2백 34년이로되 남긴 글이 세상에 유행됨이, 북두(北斗)가 하늘에 걸려 있고 교악(喬嶽)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으며, 병화(兵火) 속에서도 사람들이 수습하여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유실(遺失)된 것이 없기에 이르렀으며, 또 훌륭한 자손(子孫)이 있어서 발휘(發揮)하여 선양하니, 덕이 두터우면 그 빛이 오랜 세월을 흘러간다는 말이 미덥구나.

 

내가 듣건대, 이공(李公)이 처음 동도(東都-경주)에 이르렀을 적에는 왜적(倭賊)이 겨우 물러간 뒤라서 가시 덩굴만 성(城)에 가득하여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텅텅비어 있었는데, 이공이 다스린지 얼마 안 되어 정사(政事)가 잘 행해지고 인심이 화합하여, 모든 시위(施爲)가 점차로 옛 모습을 회복했다고들 하였으며, 이에 정무(政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문교(文敎)의 일에 마음을 두어 학습(學習)에 관계되는 옛 서적은 다 취하여 간각(刊刻)해서 널리 유포(流布)시켰으며, 선생의 글에 대하여 더욱 정성을 기울여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이 큰 일을 신(神)처럼 빨리 완성시켰다 하니, 공(公)의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에 대한 재능이 남보다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참으로 선생의 후손(後孫)이라고 이를 만하다.

 

나 역시 선생의 외척(外戚) 계보(係譜)에 있으며, 과거 기사년(1596, 선조 2) 간에 선군자(先君子)께서 청주목(淸州牧)으로 나가 있을 적에 성근(省覲)하러 왕래하다가, 진사(進士) 이잠(李潛)의 집에서 선생의 유상(遺象)에 첨배(瞻拜)한 적이 있었는데, 잠(潛) 또한 선생의 먼 후예(後裔)였다.

 

선생의 유상은 바라보매 엄숙하고 나아가매 온화하였으므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뒤 선생의 유상이 병화(兵火)에서 보전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는데, 30년 뒤에 이 전집(全集)을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고금(古今)을 통하여 변천되는 인사(人事)를 돌아보건대, 거듭 느껴지는 바가 없을 수 없다. 선생의 문장과 덕업(德業)의 성대함에 대하여는 목은『牧隱-이색(李穡)의 호』의 서(序)에서 다 말하였으니, 내가 감히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기꺼이 부윤공(府尹公-이시발)의 일을 말하고 또 나의 느낌을 기록하여 돌려보냄으로써, 뒤에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이 문집이 더욱 귀중함을 알리려 한다.” 하였다.  

 

이해 9월 상한(上澣)에 후학(後學) 풍산(豐山 유성룡의 본관) 유성룡(柳成龍)은 삼가 발(跋)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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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益齋文集 跋 - 柳成龍 撰

 

庚子秋。余在河村。東都尹李公時發。以新刻益齋先生文集印本見寄。且曰。益齋吾先祖也。亂後內外文籍。蕩失殆盡。獨此編僅免灰燼。恐遂湮沒不傳。乃裒聚而改刻之。今始訖工。欲藏之名山。以圖永久。子其爲我跋其後。余謹受而卒業。則其曰益齋亂稿者十卷。曰櫟翁稗說者四卷。曰孝行錄者一卷。拾遺一卷。摠爲若干卷。因撫卷歎曰。富哉。先生之文也。敏哉。李公之擧也。傳曰。君子之澤。五世而斬。此但言其槩耳。夫德厚者流光。其遺風餘韻。將百世而猶存。豈但以五世限之哉。古之所謂不朽者三事。德也功也言也。然有德者未必有功。有功者未必有言。高麗五百年間。名世者多矣。求其本末兼備。始終一致。巍然高出。無可議爲者。惟先生有焉。故今去先生之亡二百三十四年。其遺文之行世也。如星斗麗天。喬嶽在望。有目者皆可見。至於鋒燄煨燼之中。人且收拾而寶藏之。無所失墜。又得賢子孫發揮而揄揚之。信乎其德厚而流光也。余聞李公始至東都也。賊退甫爾。荊棘滿城。公私赤立。李公爲之未久。政通人和。凡百施爲。稍稍復舊。乃於調度征繕之暇。留心於文敎之事。悉取古書籍之有關於學習者。刊刻而廣布焉。於先生之文。尤加惓惓焉。不數月間。成此大役。敏速如神。可見公政事文學之才出人遠甚。眞可謂先生之後也。余於先生。亦忝系外派。昔在己巳間。先君子出牧淸州。余省覲往來。因獲瞻拜先生遺像於進士李潛家。潛又先生遠裔也。望儼卽溫。至今森然在目。其後聞遺像不全於兵火。爲之泫然而悲。豈料三十年後。得見此全集也。人事變遷。俯仰今古。不得不重有感焉。若夫先生文章德業之盛。牧隱之序盡之。余不敢贅。只樂道府尹公之事。且記余之所感者而歸之。使後之覽者。知斯集之益可貴重也。是年九月上澣。後學豐山柳成龍跋。 <끝>

 

서애집 > 西厓先生文集卷之十八 / 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