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효행록서(孝行錄序) - 이제현(李齊賢)

야촌(1) 2011. 8. 15. 16:02

익재집 습유

 

■ 효행록서(孝行錄序)

 

지은이 : 이제현(李齊賢)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공[權公-이름은 준(準)]이 일찍이 공인(工人)을 시켜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하였는데, 내가 그 그림에 찬(贊)을 썼으며 사람들이 자못 널리 전하였다.

 

이윽고 부원군이 그림과 찬(撰)을 국재국로[菊齋國老-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에게 바치니, 국재가 또 손수 서른 여덟 가지 일을 초(抄)하여 나에게 그 찬을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전후로 지은 찬이 모두 예순 네가지 일이었는데, 우구자(虞丘子)에다가 자로(子路)의 효행을 붙이고왕연(王延)에다가 황향(黃香)의 일을 붙였으므로 장(章)으로는 62장이 된다.


그 사어(辭語)가 저속함을 면하지 못한 것은, 대개 전야(田野)의 백성들도 모두 쉽게 읽어 다 알기를 바라서였으나, 이를 본 문사(文士)들은 이를 가리켜 조치부(調蚩符)

*조치는 2부(符)의 이름이다. 동파(東坡)가 옥여동(玉女洞)의 약수(藥水)를 즐겨 마셨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속일까 염려하여, 대나무를 쪼개 좌계(左契)를 만들어 한쪽은 절의 중에게 보관시켜 신표로 삼게 하였는데, 이를 조수부(調水符)라고 한다.

 

또 송 경문(宋景文 : 경문은 송기<宋祁>의 시호)이 삼천관용동시(三泉觀龍洞詩)를 지었는데, 뒤에 임 마조(任馬漕)가 이를 석각(石刻)하고 탁본(拓本)하여 바쳤더니, 경문이 “근세에 글은 보잘것 없으면서 석각하기 좋아하는 것을 세상에서 치냉부(蚩冷符)라 한다.” 하였다. 치냉(蚩冷)이란 곧 산충전(山虫篆)이다.]

 

라고 하지 않은 자 드물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재공은 85세이고 길창공(吉昌公)은 66세인데도, 아침 저녁으로 문후(問候)하고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봉양함으로써 국재공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이 또한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아롱이 옷을 입고 어린애 유희를 한 효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장차 대서 특필(大書特筆)로 다시 권씨(權氏)의 효행(孝行)을 위하여 1장(章)의 찬을 쓴 다음에야 그만두리라
지정(至正) 6년 5월 초길(初吉)에 익재거사(益齋居士) 이제현(李齊賢)은 서(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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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우구자(虞丘子)에다가 자로(子路)

우구자는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 나라의 영윤(令尹)이었는데, 손숙오(孫叔敖)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장왕(莊王)에게 천거하여 자신의 직(職)을 대신하게 하였다. 자로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인 중유(仲由)인데, 공자의 제자이다.

 

《孔子家語》에 “자로(子路)는 일찍이 ‘옛날 내가 어버이를 섬길 적에 늘 여지 열매를 먹으면서 1백 리 밖에 가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였다.’ 했다.” 하였다.


[주02]왕연(王延)에다가 황향(黃香)

왕연은 전조(前趙) 때의 효자로 9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고 제삿날을 당하면 열흘 이상을 슬피 울었다. 계모(繼母)가 몹시 학대하였으나 학대할수록 더욱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므로, 마침내 감동하여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여겼다.

 

《晉書 卷80》 황향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정성껏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여름에는 베갯머리에서 부채질을 하였고 겨울에는 자기의 몸으로 아버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불을 미리 따뜻하게 하였다. 《後漢書 卷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