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송익필(宋翼弼)

야촌(1) 2011. 7. 13. 20:48

■ 송익필(宋翼弼)

     [생몰년] 1534년(중종 29)∼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조부는 송인(宋璘),  아버지는 판관(判官-從五品) 사련(祀連)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비첩(婢妾)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는 20대에 이미 선조때의 조선의 8문장가에 들었고,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安處謙)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甘丁)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강찬(姜燦)· 김반(金槃)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구봉 송익필선생묘(龜峯 宋翼弼先生 墓)

    소재지 : 충남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144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