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조선시대 족보의 위조와 판매

야촌(1) 2011. 5. 23. 02:11

조선시대 족보의 위조와 판매

 

족보는 조선시대 가문의 일개 사문서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실제로 공적인 역할도 상당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족보의 위조가 널리 행해졌고 족보에 기재되면 상인은 양역을 면하고 천인도 양반행세가 가능하였다.

 

양반들은 이를 악 이용하여 돈을 받고 상천을 족보에 모록하였으며 심지어 세력 없는 일가는 사감으로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하기도 하여 조선후기 족보문제는 큰 사회문제로 되어 가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 족보에서 이름이 빠짐으로써 군역에 충당되는 경우도 나타났고, 적자와 서자의 명분이 엄하여 첩자는 서자라고 명기하여 서족의 원한을 산 기록도 많이 나타난다.

 

대개 족보에 이름을 인위적으로 올리기 위해서 돈을 주고 남의 족보에 기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투탁(投託)이라고 불렀다. 투탁이 많고 적서의 명분이 엄하지 못하면 탁보(濁譜)라 하여 족보 기록이 정확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청보(淸譜)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야유를 받아야 했다.


정약용은 곡성에 살고 있는 이인번, 이인화 형제가 자칭 선성군 후예라고 하면서 그 증거로 수교완문책자와 계첩문을 가지고역(役)을 면제해달라고 요구를 하였을 때 그 계파의 진위를 족보를 통해 살펴보았는데, 결과적으로 그 족보가 허위 투 성이였다.

 

당시 이들 이씨 형제는 가까운 조상대에서 족보가 위조되었다고 자백을 하였는데, 이때 족보의 위조는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나타났지만, 엉성한 위조는 금방 드러나기가 쉬웠다.


당시 이러한 족보의 인쇄는 한 집안 단위에서 큰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인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1788년 정조 12년 실록 기사를 보면 최두성이라는 사람이 족보 인쇄업에 투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1807년 순조 7년에는 족보의 대규모 위조인쇄사건이 적발되어 일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관련된 죄인만 15명이며 위조 족보를 사들인 사람이 166인이나 되고 그 판로가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뻗어 있었다.

 

이러한 족보와 관련된 일련의 위조 문제들은 족보가 단순한 가계의 기록이 아닌 당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자료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출처 : 野村 李在薰 + 한국사시민강좌24집(송찬식,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