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경주최씨 인물록(慶州崔氏 人物錄)

야촌(1) 2011. 5. 20. 09:15

■ 경주최씨 인물록(慶州崔氏人物錄)

 

대종(大宗)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한다. 그는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최씨는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종 때의 승로(承老 :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 :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등을 들 수 있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 6파 가운데서 역사적 인물을 보면, 사성공(司成公) 눌(汭)의 후손인 제우(濟愚)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시형(時亨)은 종수(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익현(益鉉)이 있다. 경주시 교동(校洞)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준(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은 9대 진사(進士), 12대 만석(萬石)으로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인구수 97만 6820명, 가구수 30만 4772가구로, 최씨의 45%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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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치원崔致遠, 857년(문성왕 19)~?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경문왕 8) 12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4년 음력 10월에 귀국했다, 이듬해인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2. 최승로崔承老, 927(태조 10)~989(성종 8)

   신라말 경주에서 태어나 935년(태조 18)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왔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 12세 때 태조에게 불려가 〈논어〉를 읽었는데, 태조가 매우 가상히 여겨 염분(鹽盆)을 하사하고 원봉성(元鳳省)의 학생이 되게 했으며,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20석을 하사했다.

 

이후 주로 문장과 학문 계통의 관직에 종사했다. 광종대에는 중용되지 못했으나 경종대를 거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982년(성종 1)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이 되었다. 그해 6월 왕이 5품 이상 경관(京官)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게 하자 28조의 시무(時務)를 올렸다.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988년(성종 7)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이 되고, 청하후(淸河侯)로 봉해져 식읍(食邑) 700호를 받았다.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89년(성종 8) 63세의 나이로 죽자 성종(成宗)이 몹시 슬퍼하며 포(布) 1,000필, 면(麵) 300석, 갱미(粳米) 500석, 유향(乳香) 100냥 등을 내렸다.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998년(목종 1)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1033년(덕종 2)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이 더해졌다.

 

3. 최항崔沆, 미상∼1024년(현종 15)

   고려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내융(內融). 평장사(平章事) 언위(彦撝)의 손자이다. 성종 때에 20세로서 갑과(甲科)에 등제하니 왕은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에 발탁하였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 때는 거듭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뽑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부시랑(吏部侍郞)·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김치양(金致陽)이 불궤(不軌)를 꾀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계책을 세워 현종을 맞았다.

 

현종 즉위초에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翰林學士承旨左散騎常侍)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고, 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현종에게 청하여 성종 이래 폐지된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다.

 

1012년(현종 3) 이부상서 참지정사 감수국사(吏部尙書參知政事監修國史)를 거쳐 1016년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이듬해에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청하현개국자 식읍오백호(檢校太傅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淸河縣開國子食邑五百戶)의 관작을 받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이 되었다.

 

평소 관직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70세가 되기 전에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여 현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불교를 깊이 믿어 경주 황룡사탑(皇龍寺塔)의 수리를 자청하여 몸소 감독하기도 하였고, 또 자기 집에 불경과 불상을 만들어두고 중처럼 지내다가 마침내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1024년 병이 위독하자 왕은 친히 문병하였고, 그가 죽자 몹시 애도하며 후하게 부의하였다. 과묵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저축이 없었다고 한다. 뒤에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1033년(덕종 2) 정광(正匡)에 추증되었으며, 정종은 시중(侍中)을 가증(加贈)하고, 최항의 기일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량(道場)을 현화사(玄化寺)에 베풀고 명복을 빌었다.

 

1067년(문종 21)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이 가증되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4. 최여해崔汝諧, 1101년(숙종 6) - 1186년(명종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과거에 급제, 울주통판(蔚州通判)을 거쳐 익양부(翼陽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을 때에 익양공(翼陽公: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고 예언하였는데 뒤에 명종이 즉위하자 그 인연으로 나주판관에서 좌정언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배(除拜)되고, 이어 시어사 보문각대제(侍御史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다.

 

1176년(명종 6) 간의대부 국자좨주(諫議大夫國子祭酒)로서 감시(監試)를 주관하여 시(詩)·부(賦)로 이진승(李晋升) 등 8인과 십운시로 정세준(鄭世俊) 등 38인, 그리고 명경(明經) 1인을 시취(試取)하였다. 77세에 추밀원사 좌산기상시(樞密院使左散騎常侍)가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5.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원년)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9년(1303) 계묘(癸卯) 충렬왕 29년 계묘방(忠烈王 二十九年 癸卯榜)/합격연령: 17세

   [분야] 문학>문필가 >문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삼은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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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 호는 졸옹(拙翁),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최치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민부의랑(民部議郎) 백륜(伯倫)이며, 어머니는 대호군(大護軍) 임모(任某)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학관을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 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최해(崔瀣)만 급제하여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5개월 만에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여 예문응교(藝文應敎)·검교(檢校)·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가까이 사귀며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남의 선악을 밝힘으로써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히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고려사》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노년에 지은 《예산은자전 猊山隱者傳》은 자서전으로,『책 속에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라고 한 것은「졸옹」이라고 자호(自號)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는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 東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고, 그가 남긴 문집은《졸고천백 拙藁千百》 2책으로 일본에 있으며 1930년 영인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稼亭集. 〈朴魯春〉

 

6. 최청崔淸,1344년(충목왕 즉위)~1414년(태종 14)

    고려 말·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재(直哉), 고려 후기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최자운(崔子雲)의 아들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으며, 1361년(공민왕 10)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였을 때 안동(安洞)으로 피난하는 공민왕을 호위한 공으로 중서문하성정당문학시랑(中書門下省政堂文學侍郞)에 임명되었다.

 

1365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올랐으나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신돈의 미움을 받아 좌천되었다. 신돈이 귀향 간 후 개성으로 돌아와 첨의중찬(僉議中贊)·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를 지냈다. 1384년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으나 혼란한 조정에 실망하여 사퇴하였다. 조선 건국이후에도 송악을 잊지 못하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송음거사(松蔭居士)라 칭하였다.

 

그 후 양주풍양(楊洲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7. 최단(崔鄲)

    합문지후(閤門祗候) 수(峀)의 손자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좌군도통수(左軍都統帥) 조민수(曺敏修)의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이 해 상주(尙州)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1390년(공양왕 2)에 한양윤(漢陽尹), 1392년(태조 1)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이듬해에 다시 무진회군의 공이 참작되어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8. 최탁(崔倬)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제안의 현손)는 고려 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9. 최호(崔灝)

    정랑공(正호公) 호(灝)는 고려 정종 때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밀직공 선지의 5세손, 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10. 최현우(崔玄祐)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치적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5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종질 호(湖)는 무과에 장원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어 가문에 공신(功臣)의 맥(脈)을 이었다.

11. 최숙생崔淑生, 1457년(세조 3)∼1520년(중종 15)

     [문과] 성종(成宗) 23년(14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합격연령 : 36세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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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盅齋). 철중(鐵重)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96년(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수찬(修撰-正六品)· 지평(持平-正五品)· 헌납(獻納-正五品)등을 지냈다.


1504년 응교(應敎-正四品)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조선의 제10대왕)이 생모에 대하여 상복을 다시 입으려 하자, 이행(李荇 : 좌의정-덕수인)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그 소의 글귀가 문제되어 신계(新溪)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그해 9월에 응교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1508년(중종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였다.

 

그 뒤 대사간·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을 지내고, 1518년 우찬성(右贊成-從一品)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를 거절하자 파직되었고, 곧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從一品)로 복직되었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저서로는 《충재집》이 있다.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2. 최진립崔震立, 1568 (선조 1) - 1636 (인조 14)

    [무과] 선조(宣祖) 27년(1594) 갑오(甲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69위/합격연령 :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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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신보(臣輔)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뒤에 울산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

경흥부사·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서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참전하여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정무공기실(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13.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 호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 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현종 10) 전국 각지를 유람하여 구도행각에 나섰다.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도를 닦던 중 금강산 유점사에 있다는 중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깨닫고,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하여 포교를 시작, 도를 천도라 하였다.

 

천(天)· 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 경(敬)· 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 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보국사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1864년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게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되었다. 1907년(융희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14.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1898(철종 12)

    1827년(순조 27)∼1898년. 동학의 제2대 교주.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경주 출신으로 최종수의 아들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다.

 

1861년(철종12)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4년(고종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 등지에서 관헌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인제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했다.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조직을 강화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15. 최익현崔益鉉, 1833(순조 33)~1906)

    [문과] 철종(哲宗) 6년(1855) 을묘(乙卯) 정시(庭試) 병과(丙科) 11위

    [음관] 음관(蔭官)

    [지방관] 충청우도(忠淸右道) 신창(新昌) 현감(縣監) 1862[임술(壬戌)] 7월(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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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요. 애국지사(愛國志士). 자(字) 찬겸(贊謙). 호(號)는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이항로(李恒老)의 수제자이다. 1855년(철종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으로 제자인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16. 최준崔浚, 1884년(고종 21)~1970년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은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28세손이고, 파조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12세손이다. 영남대학교(구 대구대학)의 대지주 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았고,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항일투쟁을 했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백산상회도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됐고,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의해 대부분의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후 남은 재산을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의 설립에 내놓았다. 이렇듯, 그는 '최부잣집'의 품위를 끝내 잃지 않고 마지막 만석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집안은 "부불3대(富不三代)"란 말을 비웃듯이 12대 동안 만석꾼을 지켜왔고, 또 세상의 인심을 재산만큼 쌓고 살았었다. 이 최부잣집」은 10대 진사(進士) 12대 만석(萬石)으로 유명하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17. 최창식崔昌植,1892(고종 29)~1957)

     독립운동가, 언론인. 서울 출생. <황성신문(皇城新聞)> 후기의 소장기자(少壯記者)였고, 후에 오성학교(五星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업무에 참여하고, 전원위원회 이사 ·내무위원장 ·법무총장 ·선거위원회 위원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11월 임시정부가 개편되면서 조소앙(趙素昻) 후임으로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의 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제10대 임시의정원 의장, 1926년 국무위원, 1927년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 최현배崔鉉培,1894(고종 31)~1970) 

     호는 외솔. 아버지 최병수와 어머니 박씨의 맏아들로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김두봉(金枓奉)의 권유로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며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사사 받았다.

 

1915년 졸업 후 관비유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문과 제1부에서 수학한 후 1920년부터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2~25년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1926년 연희전문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국어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후 그해 9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했다.

 

이때 국어 교재의 편찬과 교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큰사전〉을 편찬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몰두했다.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한글학회의 중추로서 한글전용·국어순화 등 실용적인 어문 활동에 힘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