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도동서원(道東書院)

야촌(1) 2011. 5. 19. 20:00

■ 도동서원(道東書院)

 

[지정] 사적 제488호 | 2007.10.10 지정

[시대] 조선시대

[분류] 유적건조물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소재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8,891㎡)

[서원소개]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의 5현중 수현(首賢)인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선생의 도학(道學)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1865년(고종 2)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寒暄堂)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1568년(선조 원년)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1573년(선조 6년) 임금이이 서원(書院)에 에 필요한 현판(懸板)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1605년(선조 38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道東里)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 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道東)은 성리학의 도(道)가 처음으로 동(東)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도학의 으뜸스승(近世, 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우리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金宏弼) 선생은 포은(圃隱)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道統論)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신도비 참고).

 

그럼으로 우리나라 대구광역시 달성이야말로 처음으로 도학이뿌리를 내렸던 발생지(發生地)라 말할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우리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할 수 있다.

 

 

 

 

↑멀리서 바라본 도동서원

 

 

 

↑도동서원 중정당(道東書院 中正堂)

 

↑1980년 국역으로 새로히 건립한 한훤당 신도비(도동서원 내)

 

↑문경공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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