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1]

야촌(1) 2006. 11. 5. 22:57

新東亞

2006.11.01 통권 566 호 (p456 ~ 475)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일본인 상점 점원과 요리사로 일하다 결국에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 올랐고, 강제합방 이후에는 20년간 중추원 고문을 지낸 당대의 실력자 이하영. 구한말 신분의 한계를 드라마틱하게 뛰어넘어 선도적인 기업가로 세상을 떠난 이 사내의 유일한 자산은 ‘짧은 영어실력’이었다.

 
우연히 만난 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조선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된 그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워싱턴 사교계에서 펼친 ‘술과 춤의 외교전’, 기울어가는 나라 조선의 소극(笑劇) 같은 마지막 몸부림.


1949년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전직 일본군 소좌(소령) 이종찬을 소환했다. 1937년 일본 육사(49기)를 졸업한 이종찬은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조선인이 일본군 장교로 임관된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일본군 최전방 야전부대를 지휘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종찬은 광복 이듬해 남태평양 전선에 동원됐던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다.

그러나 이종찬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은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고위 장교로 근무했다는 개인적인 이력 때문이 아니었다.
 
이종찬의 조부 이하영은 대한제국 시기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역임하고, 강제합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뒤 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를 무려 20년간 중임한 인물이었다. 

 

흐지부지 끝난 반민특위였지만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부의장·고의·참의를 역임한 자, 칙임관 이상 관리만큼은 죄질이 나쁜 친일파로 분류하고 엄중히 조사했다.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까지 지낸 이하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친일파였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과 ‘친일파’는 국민 정서상으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법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반민특위의 조사는 이종찬이 과연 친일파인지 ‘무고한’ 친일파 후손인지 확인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1929년 이하영이 사망한 후 작위는 ‘법적’ 큰아들인 이규원에게 상속됐고, 이규원은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둔 1945년 4월 사망했다. 이종찬은 이규원 자작의 큰아들이자 법적 상속자였다.
 
이규원이 사망할 당시 이종찬은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부친의 임종은 물론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을 만큼 전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동맹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마저 자살한 마당에 일본 혼자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최전방 야전부대 지휘관 이종찬에게 당면문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와중에 고향집에서 편지가 왔다.

 

 

↑이하영 손자 이종찬 장군

 

“습작(襲爵)을 할까요?”
“총독부에서 습작 절차를 밟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습작 여부를 묻는 동생 이종호의 편지였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야전 군인에게 한가하게 습작 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열대의 전선에서 땅개처럼 구르다 패전을 목전에 둔 군인에게 자작 작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설령 작위가 탐났다 해도 전쟁 중인 지휘관이 대리인을 시켜 습작 절차를 밟는 것 또한 남 눈에 좋게 비칠 리 없었다.

이종찬은 대충 끼적거려 답장을 보냈다.  “습작하지 말라. 내 힘으로 살겠다.”

 
이종찬은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지만, 서울의 가족들은 총독부에 가서 ‘일본이 망하게 생겼으니 습작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서울의 가족들은 습작 서류도, 습작 포기 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채 독촉이 오면 해결할 요량으로 차일피일 미뤘다. 


패전을 코앞에 둔 총독부도 남의 집안 습작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어물어물하는 사이 일본은 패전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이종찬은 광복 이듬해 꾀죄죄한 패잔병 몰골로 귀국했고, 3년간 초야에 묻혀 자숙의 시간을 보내다 반민특위에 소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