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체원(體元) 스님에 대한 고찰(考察)

야촌(1) 2007. 11. 29. 16:40

익재공 중형(益齋公中兄) 체원(體元) 스님에 대한 고찰(考察)

 

一.머리말

 

경주이씨의 족보(族譜)에는 익재공(益齋公)의 형제(兄第)가 삼형제(三兄第)로 나타나 있지만, 1354년(공민왕 3) 진주에서 간행된 최해(崔瀣)의 문집《졸고천백(拙藁千百)》제1권과 1478년(성종 9) 왕명(王命)을 받아 당시 대제학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양성지(梁誠之),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등의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참여하여 나라에서 편찬한 시문집 《동문선(東文選)》제84권에 기록된 송반룡여대사서(送盤龍如大師序)를 보면, 익재공 이제현「益齋公 李齊賢: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에게는 법명(法名)을 체원(體元)이라고 하는 중형(仲兄)이 있었다.

 

최해(崔瀣: 1287년(충렬왕 13)~1340년(충혜왕 복위 1)는 익재공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文名)을 떨친 분인데, 그가 이렇게 적었다.

 

「여공(如公: 체원을 말함)」은 소년시절에 머리를 깎고 선불(選佛)의 장소에 고보(高步) 하였으며, 태위상왕(太尉上王)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승직(僧職)을 높이고 명찰(名刹)을 제수 받았으나,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차마 좌우를 떠나지 못하고 탕약(湯藥)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죽은 뒤에도 더욱 형제간에 우애 하였으니, 대개 그 효도(孝道)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사(師: 體元을 말함)는 동암(東庵) 이문정공(李文定公)의 둘째 아들인데, 지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국상(國相) 익재(益齋)공의 둘째 형(兄)이다. 친교 맺기를 좋아하여 당대의 이름난 귀공자인 회안군(淮安君)과 그 아우 창원공(昌原公)같은 이도 다 사(師)를 경애(敬愛)하였다 했다.

 

또한 최해선생은 모함을 받아 도스마(당시 티베트인의 거주지역)에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러가는 여정에서 익재가 지은 한시 35수를 담은 《후서정록(後西征錄)》(1323년 충숙왕 10)의 서문을 지었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3월 28일 익재공 배위 안동권씨가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자 익재공이 그를 찾아가

 

「아! 내가 불행히도 갑작스레 아내를 잃고 말았네.

 

아무리 보아도 그 영혼을 위로할 길이 없네。

자네가 나와 가장 오랫동안 사귀었고 또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해 묘지명을 지어주지 않겠나」하니 감히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자리에서 물러나 부인에 대한 사실을 모아 묘지명을 지었다라고 했다.

 

二.체원의 저술 과 활동상.

 

체원(體元) 스님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그의 저술편찬 년대(著述編纂年代)를 통하여 1313년(忠宣王 5)부터 1344(忠惠王 5)때 활약한 화엄종(華嚴宗) 승려(僧侶) 로서 해인사 계통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저술로는 일종의 주해서(註解書)로 모두 해인사(海印寺) 사간판(寺刊板)으로 간행되어 현제 해인사의 사간장(寺刊藏)에 남아있는데,《백화도장발원문약해(白華道場發願文略解)》·《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設法門別行疏)》·《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등과 그의 저술은 아니나 체원의 발제(跋題)가 들어있는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이라는 위경(僞經)의 발문(跋文)이다.

 

위의 저술에서 살펴보면 체원(體元)이란 법명(法名)이며 달리 법호(法號)로서 목암(木庵) 또는 향여(向如)라 했고, 시호(諡號)는 각해대사(覺海大師)이다. 그리고 그가 삭발한 구체적 동기는 알 수 없으나, 20세(世) 전후 삭발한 뒤, 선불장(選佛場)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 하였으며, 한때 태위상왕(太尉上王) 즉, 충선왕(忠宣王)의 지우(知遇)를 받아 승직(僧職)이 오르고 명찰(名刹)의 주지 직을 제수 받기도 하였으나 노부모의 봉양을 핑계로 거절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소속된 화엄종(華嚴宗)은 당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법수사(法水寺), 반룡사(盤龍寺), 경주의 동천사(東泉寺) 등, 당시 지방을 대표하는 사찰(寺刹)들인데 화엄종이 신라 의상(義湘)스님이 우리나라에 전 한 이래고려전기 까지 불교계를 주도한 대표적 교종이었지만, 무신 집권기 이후 두렷한 행적을 남긴 화엄종승을 찾아보기 힘든 시기에 바로 화엄종풍(華嚴宗風)을 진작 시킨 분이, 체원(體元)스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14세기초반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반룡사(盤龍寺)였으며 이때 핵심 인물이 체원(體元)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체원(體元)은 1324년(忠宣王 11)에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임명될 때 “법수당두(法水堂頭), 즉 법수사(法水寺)를 중심한 우두머리라는 칭호라든가, 체원(體元)을 화엄종 자체에서 추천한 후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윤허(允許)를 얻은 후에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등장시키는 절차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體元은 40세 전후인 1320년-1330년대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있으면서 해인사를 중심한 화엄종단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해인사 수종의 주해서(註解書)와 공덕소경(功德疏經)의 간행에 착수했다고 보인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體元은 李瑱(1244-1321)을 아버지로 한 경주이씨(慶州李氏),로 1280년대 초(初)에 출생하여 20세 전후에 해인사 계통의 화엄종 승려로 출가하여 40세 전후인 1320년-1330(忠宣王)때 법수사(法水寺), 반룡사(盤龍寺), 해인사(海印寺) 등지의 화엄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의 활약상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三.체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체원은 그의 저술 별행소(別行疏)에서 보현행원(普賢行願)의 입장에서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통한 실천신앙을 강조 하였고, 이러한 실천신앙의 배경을 징관소(澄觀疏)등의 화엄사상에서 찾으려 하였으며 구체적 실천신앙의 예를 『법화경(法華經)』신앙의 영험(靈驗)과 감응(感應)에서 찾으려 했으며 體元이 관음신앙을 강조한 현실적인 여건이 14세기 초, 원(元)나라 지배하(支配下)라는 점과, 관음신앙이 현실적인 구원을 표방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상(義湘) 이래, 화엄종이 표방한 실천신앙(實踐信仰)의 측면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體元이 화엄종 출신이면서 실천신앙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사적(思想史的) 저변에는 당시 원(元)의 지배기에 있어 화엄종이 지배신분에 대한 이념적(理念的) 역할을 담당 할 수 없게 됨으로, 기층사회(基層社會) 속에서 그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리하여 體元은 당시 불교계의 자각 운동을 전개하여 탕화(湯火)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구현(具現)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四.맺는말

 

족보에 동암공 이진(東庵公 李瑱)의 배위(配位) 기록을 보면 초취(初娶)의 성씨는 미상(未詳)이나 아들 한분(一男)을 두셨고, 재취(再娶), 진한국 부인 박씨(辰韓國夫人朴氏)께선 삼남(三男)을 두셨으니 동암공은 모두 아들 사형제(四兄第)를 두셨다.

 

그러면 1684년(朝鮮肅宗10) 간행된 오문(吾門)의 가장 오래된 갑자보(甲子譜) 이후, 지금까지 왜 동암공(東菴公)의 둘째아들 체원스님의 기록은 없을까? 향후 많은 연구와 고증(考證)을 통하여 세상에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五.참고내용

 

●최해 崔瀣(1287-1340)

본관 경주(慶州). 자(字)는 언명부(彦明父). 수옹(壽翁). 호(號)는 졸옹(拙翁). 예산농은(猊山農隱). 문과에 급제 한후, 성균학관(成均學官)을 거쳐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원나라에 가서 1321년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으나 신병을 핑계로 5개월 만에 귀국, 검교(檢校),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집이 가난하여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 명현(名賢)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수했다.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문집으로《졸고천백(拙藁千百)》(2권)과 《농은집》이 있다. 단 졸고천백(拙藁千百)은 국내에는 유실되고 없었는데 일본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고려판이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으며, 1903년에 영인된 것 중 하나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화엄경(華嚴經)

화엄경 이라 부르는 불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대방광’ 이란 대승 곧, 진리를 의미하고 『불화엄』이란 아름다운 연꽃으로 옥대(玉臺)를 장식하듯, 보살이 여러 가지 꽃으로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를 장식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주제(主題)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의 광대한 공덕에 대해 설명한 경전이다. 따라서 화엄경의 전체적인 주제는 한마디로 여래의 해탈세계와 보살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최고 통치기관으로서 문종 때의 중서문하성(中書文下省)을 1275년(忠烈王 1)에 첨의부(僉議府)로 개칭 하였고, 1298년(忠烈王 24)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개칭 하였다.

 

원(元)나라의 내정간섭에 의해 설치된 것이었는데 1356년(恭愍王 5)에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취하면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尙書省)을 복구하고 도첨의사사는 폐지하였다.

 

●법수사(法水寺)

법수사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야산 기슭의 중기(中基)마을(오늘날 수륜면 백운리)에 있던 사찰이다.

802년(新羅 哀裝王 3)에 금당사(金塘寺)로 창건 되었으며, 고려 때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592년(宣祖 25)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폐사 되었는데 한때는 건물이 총, 천 칸이 넘고 부속 암자가 백여 개나 되는 큰 절이었다.

 

●반룡사(盤龍寺)

우리나라에 반룡사(盤龍寺)란 옛 사찰은 경산(慶山). 고령(高靈). 평양(平壤)의 세 곳에 있었다.

이곳 고령 반룡사는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187번지 소재하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02년(애장왕 3)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절로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원나라 세조가 이 절에 내린 방문(榜文)의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방문에 따르면 일본의 정벌을 위해서 경상도 땅에 왔던 원나라 군사들이 절을 짓밟고 시끄럽게 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만약 절을 짓밟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는 법에 의해서 처벌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진된 것을 사명(四溟)이 중건하였다.

그 뒤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육당(六堂)과 요사채가 전소되었으나,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대웅전과 동·서 요사채, 만세루(萬歲樓) 등을 중건하였으며, 1930년경 중수하였고, 1996년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六. 참고문헌

○ 익재집(益齋集)-1980 민족문화추진회

○ 졸고천백(拙藁千百)-2006 한국문집총간 3집.

○ 東文選-1968년 민족문화추진회

○ 慶州李氏 戊辰譜-1748(영조 24)-영암 영호사

○ 體元의 著術과 華嚴思想(釜山大學敎蔡尙植敎授博士學位論文/서울대1987)

○ 네이버 백과사전

 

2007년 10월

李在薰

 

◇경주이씨종보제279호 7면(2015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