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世 이의립(李義立)
[세계] 경주이씨 교감공파로 25세 관란공(觀蘭公) 이승증(李承曾)의 5대손.
[생졸년] 1621년(광해군 13)~1694년(숙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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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의립(義立), 자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 『求忠堂은 사호(賜號-임금이 내린 호)』이고, 성(姓)은 경주(慶州)로 1621년(광해군 13) 5월 18일 당시의 경주부 전읍리(오늘날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에서 이영부(李榮富)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나라의 유황 광맥과 비철(砒鐵) 광맥을 최초로 찾아내 제련기술을 정립한 사람이다.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로 중시조(中始祖)로 부터 30世이고, 중조 10세이신 문하시랑공(휘 춘림)의 21世가 되고, 교감공(휘 존사)의 12世가 되며, 관란공(휘 승증)의 5대손이다.
울산 농소달천에는 철장이 있는데 쇠의 발견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문화로 바꾸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부(富)의 축적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국력으로 연결되었다. 이 철장으로 조선시대 불벌정책에 기여한 종조가 구충당(求忠堂)이시다.
이에 대한 기록들을 관찰해보면, 우의정(右議政) 이완(李完)-국당공후, 충무공 이수일의 삼남)공이 이르되 이번 이의립(李義立)이 200여호의 흡취군으로 무쇠를 뽑아내어 전후에 거둔 세포가 많았으며, 이번에 다시 솥200좌를 가지고 왔으니 합당한 상전을 줄만하다 하니,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당상첩문(堂上帖文)을 주어 격려하자 하니 현종(顯宗-조선 제18대왕)이 승낙하였으며,1660년(현종 원년)이니 3보 창조일기와 세보, 문집, 묘갈명에 그 기록이 있다.
구충당(求忠堂)은 36세에 청동산과 초산 등을 답사하는중 현몽하고 달천산(望祭山-오늘날 울산시 북구 농소동 달천에 있는 산 )에서 철광을 발견했고, 반척곡(般尺谷)에서 철을 녹이는 비뢰를 찿아냈다. 그후 39세부터는 비철 제련법을 연구하고, 49세때(현종 10)에는 권이산에서 유황을 발견하여 유황으로 화약을 만드는 자조법도 연구한 기록이 있다.
이 공헌으로 1673년에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제수하니, 무학걸제(無學乞才)는 목민불능(牧民不能)이라 고사불루하니. 현종은 위로 3을 추하고 가선의 품계를 내리니 달천철장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공(公)은 불벌정책에 호응하여 1659년에는 각궁(角弓-활) 280자루, 함석(咸錫-주석) 100근, 연철(鉛鐵-납) 1000근, 세면포(가는베) 100필, 주철환(탄알) 73만개, 부정(솥) 440좌를 위국물품으로 자진헌납하였다.
공의 아들 극경(克敬)도 유황번조법(硫黃燔造法)을 전수받아 군문에 유황감관으로 재직, 1712년에는 원주와 제천에서 동광맥을 발견하여 공헌하였고, 3형제가 유황과 위국물품울 한성으로 운반하는 등 광산개발에 기여, 이후 철장은 종자 종손에 의하여 경영되다 13세손 은건(殷健)에서 일제(왜놈)에 약탈당했다.
공은 1674년(현종 15)에 74세로 별세하여 월서동에 예장하였는데, 1902년 두동 삼정으로 이장하였다.
울산청년회에서 위선사업 일환으로 묘소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현재 쇠불이 터는 달내주변에 89개소가 있으며, 민속놀이로 재현하여, 지난 2004년 10월에 제45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울산 달내철장 그리고 쇠부리"
라는 민속놀이로 다시 이땅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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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립(李義立).
이의립(李義立)의 본관은 경주. 자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求忠堂). 신라좌명공신 급량부대인 휘 알평의 후손.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된 이영부, 모친은 경주 설씨. 1621년(광해군 13년) 5월 18일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옛날 경주부 남쪽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5세 때 천자문을 읽고 7세 때에 '오포시(烏哺詩)'를 지었다. 조선시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광산의 개발과 산업을 일궈낸 경제인이자 과학자로 생전에 "나라의 일에 병(兵)과 예(禮)보다 필요한 것이 없으며 솥과 농기구는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1630년(인조 8년) 10세 때 모친 설씨가 세상을 떠났다. 1635년 안동권씨(도사 벼슬을 한 계우의 손녀)와 혼인했다. 슬하에 극경, 극발, 극룡 등 세 아들을 두었다. 1640년 2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642년 8월 상복을 벗고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양친께서 돌아가셨으니 효 대신 충(忠)을 하고자 하나 재주가 없다. 무예조차 뛰어나지 못하니 충성도 여의치 않다. 생각 컨데 나라의 큰일로는 군사와 농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조총에 쓰는 화약은 유황이 없으면 안 되고, 농기구와 가마솥은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
이 모두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라 밀 무역 꾼을 통해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발각이 되면 청일 양국으로 부터 당하는 치욕이 참으로 크다. 이 땅에서 이것을 얻으면 나라의 위험을 미리 방비하는 것이 되니 충성의 길과 다름없다."
1646년 의립은 치술령에 올라 백일기도를 올리고 팔도강산을 답사했다. 가야, 금강, 묘향, 구월, 백두, 속리, 지리산 등을 답사했다. 태백, 소백산에서는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1657년(효종 8년)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울산 달래산(達川山)에서 무쇠(수철)와 경주 반척산 계곡에서 비상을 각각 발견했다.
1659년 무쇠와 비상의 제조법을 터득했다. 1660년(현종 원년) 각궁(角弓) 280통, 함석(咸錫) 1백근, 연철(鉛鐵) 1천근, 세면포(細綿布) 1백필, 철환(鐵丸) 73만개, 부정(釜鼎) 440죄를 만들어 훈련도감에 바쳤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다.
1669년 의립은 만호 봉에서 유황광맥을 발견했다. 1671년 제조법을 터득하고 이듬해 2월 유황을 제조, 비변사에 바쳤다.
현종이 그 충정과 식견에 감탄해, '구충당'이란 호를 내리고, 수철이 나는 '달천'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했다.
1673년 의립은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평안남도평원지역)에 제수됐으나 사양했다. 현종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함께 위로 3대에 걸쳐 증직(贈職)을 내렸다. 부인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의 교지를 내렸다. 또 역군 180명을 주어 해마다 유황을 제조해 군수물품으로 충족케 했다.
1685년(숙종11년) 의립은 동생 계립에게 글을 보내 경주부 동쪽 효문동에다 구충당을 짓도록 했다. "늙어서 집에 들어가게 되면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심중에 더욱 간절할 터이니 문은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만들어라. 대청마루에는 난간에 오르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산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항상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이곳으로 와 편액을 '구충당(求忠堂)'이라 붙이고, 임종 시까지 그 곳에서 기거했다.
1694년 3월 12일 의립은 오시(午時)에 정침(正寢,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4세. 9월 20일 월서동 선대의 묘소 아래 묻혔다.
1902년(고종 39년) 맏손자 민구(旻久)가 옛 묘터 밑 언덕에 무덤을 옮겨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정자(正字) 벼슬을 지낸 최현필이 지었다.
현종이 하사한 달천광산은 이의립의 후손이 관리해 오다 일제 때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철광공사에서 경영권을 소유하기도 했다. 이의립의 유고본이 사후 216년이나 묻혀 있다가 1910년 <구충당문집> 목판본이 단책(2권 1책)으로 간행됨으로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2000년 12월 구충당문집발행위원회 이기형의 <국역 구충당문집>이 간행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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