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 이상설선생(溥齋 李相卨先生)

야촌(1) 2007. 4. 25. 18:30

본문


목차  

개요  

 

|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 망명과 헤이그 특사  | 외교운동과 망명정부 수립   

 1870, 12, 07 충북 진천 출생~1917, 03, 02 연해주 니콜리스크 순국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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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 12월의 독립운동가 선정배경.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상설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향촌 선비인 부친 이행우와 모친 벽진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수학하고, 청년기에는 수학·물리학·화학·경제학·국제법 등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신구학문을 겸전하게 되었다.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균관 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궁내부 특진관·학부협판·법부협판·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6월 토지를 침탈하기 위해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상소를 올려 반대하고, 보안회 등과 함께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선전하는 활동을 펼쳐 철회하게 만들었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가 민영환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하자 종로거리에서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운동을 촉구하면서 자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1906년 국외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여기서 신학문을 전수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펴던 중,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외교특사로 임명되어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일본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헤이그에서 이준·이위종과 함께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언론인들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널리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이후 1908년 미국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촉구한 뒤 노령 연해주로 돌아와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1910년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의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경술국치 직후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일제 강점 이후에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1914년 만주·노령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하였고,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3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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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

*생졸년 : 1870년 12월 07일~1917년 03월 02일.

 

1. 학문과 관인생활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복남(福男, 相男),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라고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동(才童)․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가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李濟村)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무렵에는 박의암(朴毅菴)이라는 한학자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다.

 

  선생은 총명한 두뇌와 탁월한 이해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단한 학구열로 17세 때는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구열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타고난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로 선생은 20살이 넘으면서 이미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만한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따라서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르렀다. 

 

  관계에 진출한 선생은 화직(華職)이라 할 수 있는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이어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과 비서원랑(秘書院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96년 1월에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고, 6월에는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관직을 사임하였다. 이처럼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유가 있는 시간에는 늘 학문을 닦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은 물론,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모든 신학문 분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헐버트(H. B. Hulbert)와 교분을 갖게 되었다.

 

  헐버트는 그 후 선생과 헤이그 사행을 같이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전통 유학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학으로 근대적 학문을 연마하였다. 

 

  선생이 신학문을 수학하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근대적 학문을 본격적으로 익힌 시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고 민권사상이 널리 보급되던 무렵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898년 가을에는 이회영(李會榮)․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 등 당시의 친우들과 회동하여 시국을 광구(匡救)하고자 자신의 서재를 연구실 겸 회의장으로 정하고 매일 회합하였다.

 

  선생은 신학문을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공부하였지만, 특히 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지칭되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4일자)에도 “씨(이상설)는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第一流)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造詣)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東西學問)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때문에 선생이 애독하던 서적만도 수천 권에 달하여, 이 장서는 해방 후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李時榮) 선생이 회수하여 국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2.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선생은 1896년 탁지부 재무관을 그만둔 후 1904년 1월 종2품의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에서 해임된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그 동안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직에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광무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바탕 하에서 후일 그가 헤이그사행에 수석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무렵 일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이권 확대를 목적으로 1904년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의 장악을 명시하고 있었다. 즉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개편하고 한국에 일본인의 이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유생들과 전직관료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선생도 그해 6월 22일 박승봉(朴承鳳)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어 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이 올린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상소가 있은 이후 일제의 황무지 점탈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로 보안회(輔安會, 保安會)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의 언론에서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게 되자, 일제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등 당시 일제에 의한 이권 침탈에 반대하여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이처럼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선생은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이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자 이 틈을 이용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 병탄의 기본정책을 확정해 놓고 외교활동을 통해 열강들에게 한국침략을 승인 또는 묵인하도록 조처한 후,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 조약을 무효화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약 반대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조약 체결 당시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의 지위에 있던 선생은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 저지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로막아 이 회의에는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한규설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목놓아 울면서 국망을 슬퍼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결코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약 파기를 위한 최후의 시도를 꾀하였다. 조약은 5적만이 찬성하였을 뿐 황제의 인준 절차를 끝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즉 황제가 사직(社稷)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후 이와 같은 상소를 다섯 차례에 걸쳐 올렸으며 관직을 버리는 한편, 조약 파기를 위한 거국항쟁을 추진하였다. 선생은 각 대신을 찾아다니면서 조약 체결이 곧 ‘국망’이고 민족이 ‘왜적의 노예’가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또한 선생은 그해 11월 30일 민영환(閔泳煥)의 순절 소식을 듣고 종로 거리에 나가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국권회복운동에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땅에 뒹굴면서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에게 구원되었다.

 

3. 국외 망명과 헤이그 사행(使行)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일제와의 직접 항전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전쟁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조약 파기운동 후 자택에 은거하며 거의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보다는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다. 이동녕과 같이 상해를 거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리고 다시 황달영(黃達永)․정순만(鄭淳萬)․김우용(金禹鏞)․홍창섭(洪昌燮) 등과 함께 북간도 중에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선생은 용정촌에서 건물을 매입하고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 창립 후의 숙장은 자신이 맡았으며 직접 산술을 가르쳤다. 당시 교원으로는 여조현(한문․정치학․헌법․국제공법), 김우용(산술), 황달영(역사․지리) 등이 있었으며, 정순만과 이동녕이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서숙에는 각지에서 온 학생 22명을 받아들여 중학과 소학 과목을 망라한 신학문을 교육하면서,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독립사상을 주입하였다. 그리하여 서전서숙은 연변에 이주한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시하던 재래적인 구식 교육으로부터 신식 학교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전서숙의 숙장이던 선생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용정을 떠나 연해주로 가게 되었다. 이에 그의 뒤를 이어 숙장이 된 여조현이 김우용․황달영 등과 함께 힘을 합쳐 계속 서숙을 꾸려 나갔으나, 일제의 감시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한 압박으로 1907년 9월경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은 1년여 정도의 짧은 기간 존속하였지만, 그곳에서 배출된 인사들은 각지에서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발의하여 각국에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다. 러시아 황제는 1906년 4월에 파나마 등 남미의 몇몇 나라와 함께 대한제국 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광무황제는 이 초청장을 받고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겨 선생을 비롯하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하였다.

 

  이상설이 정사(正使)였고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러시아주재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인 이위종이 부사(副使)였다. 이밖에 헐버트는 따로 광무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현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4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그해 5월 21일에 러시아 귀화 2세인 차(車)니콜라.

 

글쓴이 :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