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설선생의 선구자적 리더십에 관하여
금년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하 보재라고만 칭함)이 서거하신지 90주년이고 선생이 고종황제의 정사(正使)로서 활약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의 외교투쟁을 전개한지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보재의 위대한 생에는 앞서 연보(年譜)로 이미 소개하였음으로 저는 이 자리에서 그분의 애국적이며, 선구자적인 삶과 리더십에 관하여 종합하여 말씀드릴까 생각 합니다.
보재는 1870년에 태어나시어 48세를 일기로 191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업적을 남기시어야 할 연세에 너무 일찍 가신 점을 아쉽게 생각 합니다. 보재는 동지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는 아니었음에도 가장 출중한 리더였습니다.
선생과 동시대의 애국지사 가운데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이준(李浚 1859-1907), 등은 모두 선생보다 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재는 시대의 선각자로서 남다른 리더십을 갖추었습니다.
보재는1894년 25세시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甲午文科)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입문했지만 벼슬하여 일신의 안일에 빠지지 않고 신학문을 익혀 시대의 진운에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18885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국가론이나 법학을 공부하신 것을 보면, 이미 개화와 계몽사상의 필요성을 일찍이 깨달으신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은 1869년 명치유신을 계기로 개화를 서둘렀고, 입헌제가 도입된 것이 1875년, 일본군의 통수권이 일본 왕에게 1882년, 교육칙어(敎育勅語)를 제정하여 국민교육을 진흥시킨 것이 1890년이었습니다. 일본의 이와 같은 발 빠른 근대화 개혁의 움직임을 동시대에 살고 계셨던 보재는 같이 느꼈고,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해간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재의 선각자적인 풍모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재는 또한 일제의 침략 기도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 했습니다. 일본이 무단히 침략을 노골화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전해인 1904년, 일본인들은 이미 조선의 황무지 개간을 요구하려 했습니다.
보재는 앞장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고종(高宗)이 거부하도록 한 사례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미리알고 대비한 것입니다. 그해 보재선생은 항일구국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한협동 회(大韓協同 會)라는 단체를 결성하시어 회장이 되셨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세운 정치단체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체의 부회장은 이준, 총무에 정운복(鄭雲復), 평 의장에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서무부장에 이동휘(李東輝 1873-1935). 편집부장 이승만 1875-1965), 지방부장 양기탁(梁起鐸 1871-1938), 재무부장은 무감대장(武監大將)이던 허위(許蔿 1855-1908)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였고, 이분들 모두는 우리 근세 역사에서 혁혁한 발자취를 남기신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재는 이런 일당백의 인사들을 모두 끌어 모아, 구국운동에 동원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재의 폭넓은 인간관계와 지도자로서의 넉넉한 포용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05년, 일본의 이토 이로부미(伊藤博文)는 한편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한편으로 친일 각료들의 내통과 협조를 받아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보재는 분연히 일어나 비겁한 친일 각료들의 처벌을 상소로 올렸고, 조약 무효와 운동도 적극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일본의 군사력 앞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이런 국가적 비운을 한탄하고 항거의 뜻으로 시종무관장민영환(閔泳煥 1861-1905)과 중추원 좌의장 조병세(趙秉世1827-1905)등이 연달아 자결하였습니다.
특히 민영환은 보재와 더불어 비밀결사인 개혁당의 일원으로 국정개혁을 도모 하다가 일신상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보재는 자결보다는 정면대결식의 투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나라가 이처럼 무력한 것은 국민들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했음을 깨닫고 교육입국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우선 일본의 감시에서 벗으나 만주 길림지방으로 옮겨가 교육기지를 설치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만주에는 한민족이 많이 살고 있음으로 이들에게 민족교육으로 무장시켜 나라를 다시 찾자는 각오였습니다. 그 첫 사업이 용정(龍井)에 세운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은 외교투쟁이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된다는 정보를 제일먼저 입수한 곳은 보재의 동지들이 활동하고 있던 상동교회(尙洞敎會)였습니다. 상동교회 지하에는 전덕기(全德基 1875-1914), 목사가 마련한 상동청년학원 이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이회영, 이동녕, 양기탁등 애국지사들의 모임 처였고, 신민회가 창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보재의 가장 가까운 동지인 우당(友堂) 이회영은 즉시 비밀경로를 통하여 고종에게 만국평화회의 개최사실을 고하고, 내락을 받아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세계에 널리 선언하자는 계획을 비밀리 진행하였습니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아 헤이그 평화회의에 정사(正使) 이상설, 부사(副使) 이준, 이위종(李瑋鐘 1887-?)을 정식 대표단으로 파견했습니다. 사절단의 통역을 맡기 위하여 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 하와이에서 윤병구(尹炳球), 송헌수(宋憲樹), 두 분이 현지로 합류 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의 요청으로 국제관계에 경험이 많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박사가 현지에서 도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현지 공관과 대표단의 집요한 방해로 국제회의 참석은 좌절했지만, 일제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회의에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는 한편, 현지에서의 언론 홍보 호소활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준열사는 그곳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만국평화회의의 참석은 비록 실패했지만 보재의 외교투쟁에 대한 의지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보재는 1908년 2월 헤이그에서 영국을 경유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교포들을 규합하여 국민 회를 결성했습니다. 평화회의에서 활약한 윤병구, 송헌수, 그리고 박용만(朴容萬 1881-1928)과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투쟁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자는 방안에 대하여도 깊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아직도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재가 미국에서 블라디 보스토크(당시 해삼위:海蔘威라 칭함)로 돌아와 즉시 동지들과 만주에서의 무장기지 설치에 관하여 논의했습니다. 한편 보재가 다녀간 미국에서는 1909년 박용만이 네브래스카 주에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李相龍 1858-1932)등은 만주 삼원보(三源堡)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런 무관양성과 무장투쟁의 준비가 미국과 만주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역시 앞으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재는 중국, 러시아에 흩어진 한인 의병들을 모으고 통합군단을 조직하였습니다. 1910년 13도의군(道義軍)을 편성하고 이범윤(李範允)과 이남기(李南基)와 함께 의병 대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을 도총재(道總裁:군사령관격)로 추대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북만일대의 독립운동세력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정통령(正統領)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15년 보재는 또한 독립운동의 중심부를 설치하고, 운동의 범위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상해까지 갔습니다.
상해에 있던 박은식, 신규식(申圭植 1879-1922), 청도(靑島)에서 간,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시베리아에서 간, 유동열(柳東 1877-1950), 국내에서 간, 유홍열(柳鴻烈)등을 규합하여 신한혁명 단(新韓革命 團)을 조직했습니다.
단위 본부를 중국 북경에 두기로 하고, 보재는 본부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보재의 복안은 고종을 단의 상징적 수령으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보재가 이처럼 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나갈 때, 불행하게도 건강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7년 독립투쟁의 커다란 숙제를 남긴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치었습니다.
이상에서 보면, 보재의 독립투쟁의 방략은 실로 종횡무진(縱橫無盡)했습니다. 그는 폭 넓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조의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유교적 반상(班常) 가치관에서 벗어나 교육입국, 외교투쟁과 더불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성립되는 단체나 조직마다, 지도자로 추대 되었습니다. 그가 리더로 있을 때에는 사상적으로도 통일 되었고, 지역적으로도 불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동원했고, 모든 전략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몸소 실천했습니다.
보재가 서거한지 2년후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만약 보재가 살아계셨다면 그의 리더십으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투쟁은 보다 통합적으로 추진되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분단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이 보다 광범위한 지지 성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막스 베머(Max Weber)는 정치 지도자의 자질로, 일에 대한 정열과 책임감, 통찰력 및 결단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습니다. 드골(Charles De Gaulle)은 그의 저서 <칼날>에서 “지도자가 지도자일수 있는 이유는 그의 비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리더십 연구 대가인 워렌 베니스(Warren Bennis)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리더십에 네가지 요소를 강조 했습니다. 첫째 시대에 앞선 비전(Guiding Vision), 둘째 정열과 낙천적 영감(Passion and Optimistic Inspiration), 셋째 통합성(Integrity), 넷째 용기(Courage)라 했습니다. 그는 리더십의 귀감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을 쟁취한 벤구리온을 꼽았습니다.
보재는 누구보다 시대의 진운을 앞선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독립투쟁에 있어서 문무를 모두 겸비한 전략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비전을 수립했습니다. 보재는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침략을 감행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서 싸우는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여 자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용기와 정열과 희망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재는 연령에 관계없이, 또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는 넉넉한 포용력을 가졌습니다. 지도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통합능력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지도자의 표상으로 삼아야할 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역사에서는 그분의 리더십에 대하여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노력이 그만큼 부족함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더욱 노력 할 것 을 다짐합니다.
2007년 4월 22일
전 국정원장 이종찬
*본 글은 항일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선생의 서거90주기 추모행사에서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선양강연 내용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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