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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엿보기

야촌(1) 2011. 2. 24. 19:41

↑김일성 동상이 있는 지남산으로 통하는 개성 통일거리 

 

↑1391~1393년에 지어진 개성 남대문, 한국전쟁 기간에 소실되고,  1954년에 재건.

 

↑개성 남대문

 

개성 남대문은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쌓은 장방형평면의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이루어졌다. 축대위에 세운

루는  정면3칸, 측면2칸이다. 기둥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이어 세웠다.

 

지붕은 겹처마의 합각(合閣) 지붕으로서 용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 지붕면이 모두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었다.

개성남대문 문루에는 유명한 연복사종(演福寺 鐘)이 있다.

 

↑자남산에서 바라본 개성 한옥마을

 

↑자남산에서 바라본 개성 한옥마을

 

↑개성 자남산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 개성 한옥마을의 민속여관

 

개성시자남동에 있는 한옥여관은 조선식건물들로 특색 있게 세워져 있는 관광용여관이다. 총부지면적 12,000m2, 건축면적 5,079㎡(1,539평), 수용능력 120여석이다. 여관은 기본건물과 보조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배치평면 형태는 ‘□’형이다. 개울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침실호동, 서쪽에는 봉사건물들인 식당 · 연회장 · 상점 등이 배치되어 있다.

 

여관건물은 합각(合閣)지붕들로 이루어진 조선식 건물로서 침실호동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은 2~3칸의 온돌방과 툇마루를 기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관은 조선식 문간에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들이 서로 격리되면서 건축적으로 잘 해결되었고 난간들과 기둥 등의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관에서는 인삼닭곰, 설렁탕, 약과 등의 특산음식을 만들어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개성의 한옥마을은 300채 이상의 한옥을 가지고 있으며 마치 조선시대를 그려놓은 듯하다.

 

↑ 개성 자남동

 

↑개성의 공사 현장

 

↑개성의 북안 신약국 

 

↑개성 청년거리

 

 ↑개성의 거리 

 

↑ 개성 고택의 뒷문

 

↑개성의 옛 골목길

 

↑개성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 개성의 전통가옥

 

 

 

↑전형적인 북한의 공사 현장

 

↑개성의 선죽교 : 정몽주가 1392년 이방원의 명으로 저격 당한곳이다.

 

↑개성 선죽교(善地橋) 해설사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韓石峰) 글씨의 비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 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이 돌은 좌우로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족 가에 기다란 난간 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 주(欄干 柱) 구실을 하는 돌기둥들을 3단으로 쌓았는데, 맨 아랫돌은 구형단면의 돌로서, 일정한 치수의 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간 돌 사이에는 각 돌기둥을 이어주는 8각의 돌을 꽂았고 맨 윗돌은 비석의 끝처럼 완만한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선죽교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1395)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한다.

 

 

↑1920년대의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이다[개성선죽교]

 

 ↑ 개성 선죽교에 있는 정몽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념비들. 

 

 ↑개성 표충비

 

■ 개성 표충비

 

조선왕조의 영조와 고종이 고려왕조의 충신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2기이다. 개성직할시 방직동 선죽교(북한 국보 159호) 옆에 있다.

 

이들 비석은 건립연대가 서로 다르지만 한 비각 속에 암수거북이 한 쌍이 나란히 받치고 서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은 1740년(영조 16)에 세운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1872년(고종 9)에 세운 것이다. 

 

두 비석은 깔끔한 바닥 돌 위에 10여 톤 정도 되는 커다란 통 돌로 힘 있는 거북을 정교하게 새긴 귀부위의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식의 이수를 올려놓았다.

 

비신(碑身)은 검은 대리석이고 이수와 귀부는 화강석이다. 비신에는 정몽주의 충의와 절개를 찬양하는 어필이 새겨져 있다. 귀부의 등에는 연잎 모양의 연화비좌와 귀갑문 등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이수의 처마 밑에는 용틀임 조각을 장식하여 비석의 장식성이 한층 돋보인다. 

 

비각은 정면 4칸(11.41m), 측면 2칸(5.25m)의 팔작지붕 집으로, 현존하는 비각 중 가장 크다. 둘레를 화방 담으로 둘러싸고 삼문을 두었다. 마당에는 수령 300년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개성 성균관의 명륜당(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고려시대의 국립 대학이다)

 

↑성균관 존경각.

 

↑수창궁 룡머리조각(수컷)  *한쌍의 용머리가 대성전 앞에 있다. 

 

↑만월대 룡머리조각(암컷) 

 

↑성균관의 대성전(현재 고려박물관의 청자 진열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균관 대성전 내부

 

↑개성 성균관 한국식의 담장

 

↑개성 고려박물관에 있는 적조사쇠부처 

 

↑개성에 있는 한옥의 대문, 바로 옆이 성균관

 

↑개성의 한옥, 이집의 바로 옆에 성균관 건물이다. 

 

↑개성민속여관의  담벼락 담장이 넝쿨

 

↑ 오늘날 개성의 가옥들 

 

↑목청전(穆淸殿)/경기도 개성시 운학동에 있는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옛 집이다.

 

↑목청전의 지붕 장식 

 

↑왕의 화상을 모신 목청전의 영모당.

 

↑ 목청전비각(穆淸殿碑閣) 

 

↑개성 목정천의 석조각 

 

↑개성의 교외 마을

 

↑개성 공민왕릉

 

↑ 공민왕릉 석조물

 

↑공민왕릉의 석호상

 

↑개성 태흥산의 박연폭포

 

↑ 박연폭포의 룡바위

 

 

 

↑대흥산성의 북문에서 관음사로 가는도중

 

 ↑대흥산성의 파멸된 석문들

 

  ↑관음사 관리인의 집

 

 ↑개성 태조왕릉의 해설사

 

↑관음사 대웅전, 1646년에 재건되었다. 

 

↑관음사 대웅전의 내부(섬세한 목조각이 돋보인다)

 

↑관음사 7층탑

 

↑개성 관음사의 용조각, 대웅전 후문에 있다.

 

↑ 관음사 대웅전 후문에 새겨진 미세한 조각.

 

↑판문점의 조선인민군 간부, 휴전 회담에 사용되었던 UN기.

 

↑ 판문점에 근무중인 조선인민군 모습            .

                              

↑개성의 영통사  스님모습.

 

↑ 영통사 정문,/2005년에 나머지 사찰이 콘크리트로 다시 지어졌다.

   

↑영통사의 지붕모습

 

↑영통사의 스님모습 .

 

↑영통사 보광원 비로자나 불상.  3.2m 높이의 불상은 금박을 입힌 석고로 되어있다.

 

↑개성에 있는  해선중학교

 

↑ 개성의 선전벽보출처 : 인터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