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후기- "삼불망"을 마치며--저자 우종철/2010. 08. 31. 12:08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생졸년 :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80평생을 원나라의 고려 지배라는 미증유의 민족수난기를 살면서 고난의 역사를 타고난 숙명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가 40여 년간의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강화도로부터 출륙환도(出陸還都)하여 원나라에 예속된 지 17년 후인 1287년(충렬왕 13)에 태어나 원이 망하기 1년 전인 1367년(공민왕 17)까지 살다간 역사의 증인이다.
그의 일생은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에 대한 원의 내정간섭과 그에 따른 인종(忍從)과 굴욕의 시대와 때를 같이 했다. 그는 7대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재상을 지낸 경륜의 정치인이자, 춘추필법으로 필봉(筆鋒)을 마음껏 휘둘렀던 위대한 문호이다.
정치인들은 흔히 정치적인 풍상(유배)을 다반사로 겪지만 이제현은 단 한 번의 유배를 가지 않은 다복다운(多福多運)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영예롭고 복된 삶을 살았으나, 결코 시류에 영합하고 처세에 능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다.
이제현은기울어져 가는 고려 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해 문필과 외교로 원나라의 조정을 움직였으며, 고려의 자존과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바쳤다. 이순신 장군이 칼로 조선을 지켰다면, 이제현은 붓으로 고려를 지킨 것이다.
고려의 대표 문인 이색은 이제현의 묘지(墓誌)에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다’ 라고 새겼고, 조선의 최고 재상 유성룡도 ‘이제현은 덕(德), 공(功), 언(言)의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 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적 인물이다’ 라고 평하였다.
1962년에 국보 제110호로 지정된 이제현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당대 원나라 최고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렸으며, 그 당시 가장 존경받던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고 찬(讚)을 썼다.
이제현은 ‘조선 3천년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역대의 수많은 시화집에 거론되었다.
『동문선』에 최다수의 작품이 실린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았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에는 이제현의 <국사>에 실린 사론이 종종 인용되고 있는데, 이 글들은 철저하게 객관적이면서 대의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필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현은 지조 높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단순히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힘썼다.
이제현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까지 7대를 내리 섬겼다. 충선․충혜왕이 간신배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단신으로 몸을 던져 구해냈고, 충숙왕때 입성책동(立省責動)을 붓 한 자루로 막았으며, 충목왕때 개혁정책을 펴서 고려 말기의 폐단을 성리학적 해법에 따라 해결하였으며, 공민왕 때 네 번에 걸친 수상을 역임하면서 반원운동을 성공시켜 마침내 100년 가까이 진행되어 온 ‘원간섭기(1259-1356)’를 종결시켰다.
원간섭기의 고려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입지가 매우 좁아 불행한 군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원나라와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며 고려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제현 같은 명재상의 공이라 할만하다. 원나라 부마국 100년을 함께 산 이제현. 나라가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그는 고려 백성들의 사표였으며, ‘절제와 예’라는 덕목이 군주를 모시는 신하의 품성이 되어야 함을 실천을 통해 보여줬다.
고려의 가을은 이제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제현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미리 막지 못한 환란 부끄럽도다. 나라 운명 붙드노라 머리만 세었어라” 라고 ‘황토점’에서 노래했듯이, 고려를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80평생 내내 부원배와 간신들의 농단에 고려의 존망을 걱정해야했던 이제현은 일평생 소인배들의 질시와 모함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그가 남긴 큰 족적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자취였다. 이제현은 신돈의 권력이 절정이던 1367년(공민왕 16),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일생 동안 꿈꿔왔던 개혁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어 그를 치고, 다시 신돈마저 딛고 굴러가 고려 말에 전제개혁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제현은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냈다.
그가 꽃피웠던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제자 이색이 정몽주를 배출하여 권근·김종직·변계량 등을 거쳐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그가 쓴 책들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용패설> 4권, 습유(拾遺: 빠진 글을 보충한 것) 1권이 있으며, 이것을 합쳐서 흔히 <익재집>이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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