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고천백 제2권/최해(崔瀣) 著
◇최해(崔瀣) 선생은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가까이 사귀며 당대의 문호
(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 평원군 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 묘지(墓誌).
최해(崔瀣) 撰
고려의 대신(大臣) 가운데 휘가 항(恒)인 분이 있어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의 재상을 지냈으니, 성은 박씨(朴氏)요 지위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아들 광정(光挺)이 처음으로 본국의 자제로 선발되어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고, 천자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소신교위(昭信校尉) 고려서경등처수수군부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졸하였다.
그 아들 정윤(正尹) 거실(居實)과 손자 독만(禿滿)이 능히 그 직책을 세습하여 품계가 모두 소신교위가 되었으니, 고(故)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원씨(元氏)는 바로 정윤공(正尹公)의 아내이자 독만에게는 어머니가 된다.
11대조 휘 극유(克猷)는 개국 초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으며, 이후로 훌륭한 자손이 계속 이어져 세월이 갈수록 더욱 현달하고 번성하였다.
조부 휘 부(傅)는 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부친 휘 관(瓘)은 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모친 김씨(金氏)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의 따님이다.
자식으로는 아들 2명과 딸 5명을 두었다. 맏아들은 독만(禿滿)이고 다음은 장명(長命)인데 장명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맏딸은 중정원 장사(中政院長史) 심양(瀋陽) 홍의손(洪義孫)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흥위위 낭장(興威尉郞將) 김지경(金之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대광(重大匡)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에게 시집가서 나라의 종친(宗親)이 되었고, 다음은 선수(宣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광정대부(匡靖大夫)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훌륭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부드러우면서도 지혜로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나이 열세 살 때 남편을 택하여 박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 들어와서는 시부모 봉양하기를 마치 친정 부모를 사랑하듯이 하면서도 예는 그보다 더 극진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광정공(匡靖公)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정씨(鄭氏)만 살아 계셨는데, 정윤공(正尹公)이 부친을 대신하여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러 연경(燕京)에 가 있었으나 부인이 정씨의 좌우에서 수발을 들며 한 치도 어김없이 봉양하여 잘 모시는 가운데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었다.
그 후 정윤공이 또 세상을 떠나고 아들딸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자식이 다섯 명 있었는데, 부인이 집안을 주관한 지 9년도 되지 않아 모두 짝을 찾아 혼인을 시켰다.
원씨(元氏) 집안의 동생들이 모두 부귀 현달하고 태부인(太夫人)도 아직 무고하며 집안 친척들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는데, 부인이 일찍 홀몸이 되어 그 사이에서 처신하면서도 시댁 식구들을 받들고 대우함에 공손함을 다하고 예법으로 자신을 지켰으므로 온 집안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집안에 본디 재물이 풍족하였으나, 정윤공은 이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부인이 법도에 맞게 처리하였다. 거느리는 비복(婢僕)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거역하거나 원망하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원통(元統) 2년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 12월 갑술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47세이다. 아, 부인께서는 어질면서도 오래 살지 못한 분이로다. 아들과 사위가 상을 치르면서 이듬해인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2월 기미일로 날을 잡아 아무 곳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기로 정하고는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맏사위 홍 장사(洪長史)와는 동년(同年)의 벗이고 또 막내 사위 이 광정(李匡靖)과도 매우 잘 아는 사이이니, 명(銘)을 써달라는 부탁을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딸로서는 부모를 잘 받들고 / 女承而親。
아내로서는 자신을 잘 지켰으며 / 婦信而身。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사랑했으니 / 母慈而子。
때에 맞고 고르도다 / 維時維均。
어질면서 오래 살지 못하니 / 賢不克壽。
슬프도다 부인이여 / 嗟嗟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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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平原郡夫人元氏墓誌
최해(崔瀣) 撰
高麗有大臣諱恒者。在世祖皇帝時。相太師忠烈王。姓朴氏。位僉議贊成事。謚曰文懿。有子曰光挺。始以本國子弟被選。宿衛闕庭。受天子之命。帶金符爲昭信校尉。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万戶兼匡靖大夫平壤府尹而卒。其子正尹居實。孫禿滿能世襲其職。階皆昭信。故平原郡夫人元氏。實正尹公之妻。於禿滿爲母。其十一代祖諱克猷。仕國初爲正議大夫。華胄蟬聯。益顯以大。祖諱傅。故僉議中贊謚文純。父諱瓘。故僉議贊成事。母金氏。封樂浪郡大夫人。故密直承旨諱信之女也。其子男二人。女五人。男長卽禿滿。次長命。未仕。女適中政院長史瀋陽洪義孫。先歿。次適興威衛郞將金之庚。次適重大匡樂浪君王琇。與國同宗。次適宣授王府斷事官匡靖大夫前政堂文學李齊賢。夫人生有淑質。性柔且慧。父母愛之。年十三。擇所從配朴氏。入門承舅姑。愛如其父母而禮待過之。未幾。匡靖公下世。姑鄭氏在堂。正尹公替父充宿衛住輦下。而夫人左右鄭氏。奉養無違。以善事得其終焉。後正尹公又逝。男女未冠笄者有五人。夫人主家未九年。俱選其對以昏嫁之。元家弟妹皆貴顯。太夫人尙無恙。宗婣日盛而夫人早寡。處於其間。所以奉承接遇。盡其恭順。而以禮自守。一門多稱之。家故足貲。正尹公不以爲問。夫人制之有法度。撫御婢僕且數百。不聞有人出一言以負且怨者。元統二年甲戌十二月甲戌。以疾卒。年四十又七。嗚呼。夫人其賢而不壽者乎。子壻治喪。卜以明年乙亥二月己未。葬于某地之原。問銘於予。予於洪長史。爲同年友。又受知李匡靖爲不淺。銘其敢拒而已耶。銘曰。
女承而親。婦信而身。母慈而子。維時維均。賢不克壽。嗟嗟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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