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통훈대부 군자감정 옥산선생 이공 묘갈문
(有明朝鮮國 通訓大夫 軍資監正 玉山先生 李公 墓碣文)
송시열 지음(宋時烈 述)
율곡선생께 아우님이 계시니 이름은 우(瑀)요. 자(字)를 계헌(季獻) 호(號)를 옥산(玉山)이라 하며, 일찍이 영남의 선산(善山)에 사셨는데, 선산(善山) 사람들이 사절(四絶)이라 칭찬했다. 거문고와 글씨와 시(詩)와 그림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서법(書法)이 더욱 묘하여 참께에다 거북구(龜)자를 쓰신적이 있었고, 또 콩을 두쪽으로 쪼개어 오언절구(五言絶句)를 그 한쪽에다 쓰셨는데, 그 결구(結構)와 적륵(趯勒)의 법(法)을 잃지 않았었다. 선조대왕(宣祖大王) 께서 사랑 하시어 상(賞)으로 초결(草結 : 초서 쓰는 비결), 백운(百韻)을 손수 쓰신 책액(冊額)을 내려주셨으며, 그 밖에도 내려주신 물건이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그 사절(四絶)로도 결국은 그사람의 인품을 전부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율곡(栗谷)선생도 그 재주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그 인품을 칭찬하시며「내 아우가 학문에 종사하였더라면 내가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처음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보임(補任) 되었으나 선생을 멀리 이별하기 싫어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에 빙고별좌(氷庫別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비안현감(比安縣監). 사허부감찰(司憲府監察).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괴산(槐山)과 고부(古阜)의 두 군수(郡守)를 지낸것이 모두 그 이력(履歷)이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생을 마쳤으니, 기유(己酉) 1609년 5월 27일 이었다. 68세를 사셨다.
공(公)은 군현(郡縣)에 있을때 함부로 형장(刑杖)을 쓰지 않아 이민(吏民)이 사랑하고 받들었다.
비안(比安) 사람들은 임기가 만료 되었는데도 유임을 원하여 모두 7년이나 비안에 계셨다.
전에 두번 정시[庭試 : 당시 대궐(大闕) 안마당에서 치뤘던 시험] 에 합격 하였는데, 모두 작은 허물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공(公)은「운명이로구나」하고 이로 부터는 다시 과거(科擧)에 나가지 않았다. 부모님 상(喪)을 만나 여묘(廬墓) 살이를 할때는 친히 척개(滌漑 : 제기를 씻고, 솥에 물붓는 일)를 하여 겨울에는 손이 얼어 터저서 피가 나왔다.
서모(庶母)가 자애롭지 못한 있었는데도 오히려 민망히 여겨 눈물을 흘렸다. 공(公)은 늘 손을 소매속에 움추려 보이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옷 소매가 빨갛게 물들었다. 선생이 해주의 석담(石潭)에 축실(築室)을 지어 한가한 날에는 선생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공(公)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고 시(詩)를 읊게하여 담담하게 즐기셨으니, 형제분 사이는 자연 지기(知己)라 하겠다.
선생께서 돌아 가시자 처자가 굶주리고 떨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공에게 현직(縣職 : 현령이나 현감직책)을 제수하여 그들을 보양(保養)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가업(家業)을 스스로 경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셋집에서 살았고, 일생을 마감한 장소인 매학정(梅鶴亭)이라는 곳도 역시 그의 아내집의 별장(別莊)이었다.
괴산(槐山)에 있을때 마침 임진왜란을 만나 장정(壯丁)을 모집하고 올가미를 설치하여 포로를 잡았는데, 늘 공(功)을 이졸(吏卒)에게 주었다. 또 적의 동향을 살피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기회를 틈타서 밭갈고 씨 뿌리게 하였다. 이렇게 한 때문에 이어 기근(饑饉)이 들었는데도 괴산 경내(境內)는 모두 온전할수가 있었다.
조정에서 그공을 녹훈(錄勳)하여 선무종훈(宣武從勳)의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다.
묘(墓)는 선산(善山) 무래산(舞來山) 부임(負壬-壬坐)의 언덕에 있으며, 숙인(淑人) 황씨(黃氏)와 합장(合葬) 하였다. 황씨는 아버지를 대단히 위(爲)하여 기로(耆老 : 노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씨(李氏) 댁으로 시집을 가고 나서도 칭찬들을 하였다.
아들 경절(景節)은 벼슬이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 : 노예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 5품의 벼슬)이며, 두 딸의 사위는 정유성(鄭維城)과 권상정(權尙正)이다. 상정(尙正)은 찰방[察訪 :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관] 이다. 사의(司議)가 군수 집()을 낳았고 다음은 교(穚). 곤(梱)을 낳았고, 딸은 이만겸(李萬兼)에게 시집갔다.
정유성(鄭維城)은 아들 현승(玄升). 덕승(德升). 원승(元升)을 낳았고, 딸은 부윤(府尹)인 박수홍(朴守弘)과 김택선(金擇善). 권흥문(權興文). 김시민(金時閔)에게 시집갔다. 권상정(權尙正)은 아들 혜(鏸)와 형(銄)을 낳았고, 딸은 김박(金泊). 찰방(察訪) 황립현(黃立顯). 심려(沈려). 부사(府使) 김하천(金厦梴)에게 시집갔다.
군수(郡守)의 아들은 동야(東野). 동명(東溟). 동유(東維). 동주(東柱). 동로(東魯)인데 동명(東溟)은 등제(登第)하여 시종관(侍從官)이 되었고, 딸은 이지(李지)의 아내가 되었다. 내외의 증손, 현손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할수 없다.
아아! 공(公)의 높은 재주와 훌륭한 인품에 대하여 사람들이 칭찬 하는것은 모두 공의 한쪽 일면(一面) 만을 말한 것이고, 그것도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하물며 가슴에 온축(蘊蓄)한 모든것과 일을 행한 모든것에 대하여는 더 말할것이겠는가.
아아! 노(魯) 나라에서 군자(君子)를 찾아 볼수가 없다면 여기서 그런 사람을 찾을수 있을 것이로다.
숭정 1671년 12월 일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 글을 짓고
6세손 조봉대부 승문원정자 익수(益洙)가 전자(篆字)를 쓰고,
7세손 택빈(宅彬)이 삼가 비문을 쓰다.
신해후(辛亥) 후(後) 111년 신축(辛丑-1781년) 10월 상순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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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通訓大夫軍資監正李公墓表
宋時烈 述
栗谷先生有弟。曰瑀字季獻。號玉山。嘗居嶺南之善山。善山人稱以四絶。謂其琴書詩畫也。其書法尤妙。嘗於胡麻子書作龜字。又劈豆爲兩片。書五言絶句於其一。而不失其結構趯勒之法。宣祖大王嘗加愛賞。以草訣百韻。手題冊額而賜之。其他錫賚甚多。然其四絶終不能掩其人。故先生亦不稱其才。而稱 其人曰。使吾弟從事學問。則吾所不及。中生員初試。補慶基殿參奉。不欲遠離先生。不就。其後氷庫別坐,司僕寺主簿,比安縣監,司憲府監察,尙衣院判官,槐山古阜二郡守。皆其履歷。而以軍資監正終焉。則萬曆己酉五月二十七日也。得年六十八。公在郡縣。不任刑杖。吏民愛戴。比安人秩滿而願借。故居比安凡七年矣。嘗再中庭試。皆以微眚見下。公曰命也。自是不復赴擧。丁憂廬墓。親執滌漑。冬月。手爲皴裂出血。庶母嘗不慈。而猶愍然出涕。公輒縮手袖間。不令見之。故袖爲染赤。先生築室于海州之石潭。暇日先 生必置酒。使公彈琴詠詩。日夕湛樂。兄弟間自謂知己。先生歿。妻子飢寒。朝廷爲授縣職以養之。公盡心撫育。俾不失所。然未嘗自營家業。故常僦屋以居。其所畢命梅鶴亭者。亦其婦家別業也。槐山時値倭變。募丁壯設機捕捉。而以功與吏卒。又偵賊向背。而使民乘便耕種。以故仍以饑饉。而闔境俱全。朝廷錄其功。賜宣武從勳。墓在善山舞萊山負壬原。淑人黃氏祔焉。黃氏甚爲其考耆老所愛。旣行李氏家稱之。男景節官司議。二壻鄭維城,權尙正。尙正察訪。司議生郡守。次穚,稇。女適李萬謙。鄭維城生玄升,德升,元 升。女適府尹朴守弘,金擇善,權興文,金時閔。權尙正生鏸,銄。女適金泊. 察訪黃立顯,沈,府使金廈梴。郡守男東野,東溟,東維,東柱,東魯。東溟登科爲侍從官。女爲李墀妻。內外曾玄甚衆。不能盡錄。噫。以公之高才偉器。其見稱於人者。皆公之一偏而非其至者。然人猶不可及。況其蘊諸中而行諸事者乎。噫。魯無君子。斯焉取斯
출전 : 宋子大全卷一百九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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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傳 - 李端夏
玉山公。諱瑀。字季獻。栗谷先生之弟也。生于嘉靖壬寅。十歲。丁內憂。執喪如成人。辛酉。丁外憂。三年不脫衰絰。手備祭膳。冬月則手爲之凍裂。丁卯。陞上舍。己卯。除御容殿參奉。不赴。癸未。除氷庫別檢。時創修欽敬閣。以公曉星學。特兼敎授。甲申。遷司僕主簿。轉司憲府監察。除比安縣監。秩滿以民人借寇。留一年。己丑冬。除監察。轉尙衣判官。壬辰。除槐山郡守。言官論以驟陞四品。上答以有才行人。不可拘以常例。終不允。乙未。病遆。庚子。除古阜郡守。壬寅。以監司親嫌遆歸。乙巳。除軍資監正。病未赴。己酉五月。卒。壽六十八。公天資仁厚。才調出人。文詞高古。兼工書畫。天文地理星命卜筮之法。無不精通。嘗再中庭試。皆以字誤拔去。乃歎曰。此天也。更不赴擧。嘗隨栗谷先生。京鄕進退。必與之偕。未嘗暫離。栗谷嘗曰。吾季才器過我。而恨不着工於學問。見得不如我也。公善彈琴。栗谷每閑居。必與命酒聽琴。公按古作琴譜。古調之行於世者。皆公所定云。外舅黃孤山嘗曰。李君書法。壯過於吾而麗有不及。稍加工程。非吾所及云。宣廟愛玩公書畫。大加稱賞。頻賜御筆書畫以寵之。歷典三邑。吏民莫不愛戴。其守槐山。値倭變。公率吏民入保郡北山谷。選丁壯防守賊路。偵賊往來。設械置伏。捕獲甚多。使老弱女子作農。一境賴之。他邑避賊者皆歸焉。歸功部下。至蒙超擢。而公不與焉。止錄宣武從勳。晩年歸一善婦家庄。修孤山梅鶴亭。漁釣自娛。號玉山主人。有遺稿二卷藏于家。崔監司俔。著一善志。於公別立傳。錄所著詩篇。題曰一善三絶。配德山黃氏。孤山處士耆老之女。親戚鄕黨。推其賢德。有一男二女。男景節。側室有四女。崇禎紀元後乙卯月日。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李端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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