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세필(李世弼)

야촌(1) 2011. 1. 27. 00:39

■ 28世 구천공 이세필(李世弼)

    [생졸년]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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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군보(君輔), 호(號)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 제2차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 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으나, 개연히 선비들을 설득하여 상소,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는데,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퇴계집(退溪集)》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숙종 6)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1684년(숙종 10)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을 거쳐 용안현감(龍安縣監-從六品)이 되었다가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내고 삭녕군수(郡守-從四品)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으나, 개의하지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從四品)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正三品)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 을 지냈다. 그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從二品)·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숙종 43)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하여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권이 있으며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그외 《소주서(小朱書)》 《답문의례(答問疑禮)》《왕조례(王朝禮)》《동호예설(桐湖禮說)》등이다.


1722년(경종 2)에 아들인 호조판서(戶曹判書-正二品) 태좌(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從一品) 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 강원도 동해의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구천 이세필 선생 영정(龜川 李世弼先生影幀)

 

↑구천 이세필선생 묘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아곡리 축좌

 

↑구천 이세필선생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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