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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사람들의 주거지

야촌(1) 2011. 1. 15. 03:39

개경 사람들의 주거지

고려시대에 주거의 위치와 관련하여 신분적인 차별을 규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향[소]부곡의 주민과 일반 군현의 주민 사이에 낳은 자식은 향[소]부곡 지역으로 그 주거가 제약되었다.

 

그러나 일반 군현 지역 내에서 그 주민의 신분에 따라 주거의 위치를 규제한 법률은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로 주민의 주거 위치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개경의 경우를 보더라도 신분에 따른 주거 위치의 차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개경은 크게 동.서. 남. 북. 중부의 5개부로 나뉘고, 각 부 안에 다시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며, 방은 다시 여러 개의 리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실제 기록들에 나타나는 주거 사례를 보면, 최고 관료 신분의 주택이나 일반 민의 주택이 같은 방은 물론, 같은 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본다.

 

즉 최소 행정구획인 리에서조차 서로 다른 신분의 주민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니, 신분에 따라 주거 위치를 달리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무당과 같은 특수 신분에게 도성 밖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강제하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또 왕실이나 무인집권자들이 무리하게 남의 주거를 탈취하거나 실제 계약가보다 낮게 지불하는 경우들은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주택의 위치 선정과 매매는 신분 관계가 아닌 경제적인 거래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려도 매우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적어도 개경의 경우 주민들의 주거 위치 선택은 개인의 의사와 경제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졌고, 신분에 따른 제한은 없었다.

개경 도성에서는 같은 직업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들이 있었다. 남대가를 중심으로 한 시장 거리에는 시전 상인들과 그들을 도와 살아가는 붙이들이 모여 살았다. 상인들과 함께 개경 상공업을 이끌던 장인들도 업종에 따라 한 동네를 이루며 사는 경우가 있었다.

 

십자가에서 보정문(장패문)으로 가는 관도의 남쪽 지대에 철동(鐵洞), 혹은 수철동(水鐵洞)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이 마을은 그 이름에서 쇠를 재료로 하여 여러 제품을 만드는 철 가공업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철장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한 화장품을 생산하는 마을도 있었다. 풍교 옆에는 소활동(小闊洞)ㆍ동화정리(冬花井里)로 불리는 동네가 있는데 이 곳의 연지정이라는 우물의 물은 고려시대에 연지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오관산 아래 면주동(綿紬洞)과 영통동(靈通洞)은 각각 면주와 마포의 생산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의류의 기본 소재가 마포였던 만큼 그 수요가 컸음은 말할 것도 없고, 면주 역시 견직물 중에서도 중저가 품목으로서 금수능라(錦繡綾羅)와 같은 고급 견직물에 비해 개경 주민들의 수요가 많았다. 면주동과 영통동은 바로 그러한 직물류를 많이 생산하던 곳이었던 만큼 역시 주민의 다수는 직포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경 시민들이 신분 차별 없이 자기 살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주거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 같은 것은 있었다. 상인들도 그러하지만, 다른 직업의 주민들 역시 기본적으로 직장 가까운 곳에 주거를 정하려 하였다.

 

예컨대 나이든 정승들은 가능하면 출근길이 멀지 않은 곳에 살려 했을 것이다. 자가용 가마를 타고 다닌다 해도 피곤한 일임은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대신급 관료들 중 일부는 아예 궁궐 바로 동남쪽에 모여 살았다. 오죽하면 동네 이름마저 정승동이라 하였을까?


좋은 주변 환경이나 전망도 선택 기준의 하나였다. 해동공자 최충의 경우를 보자. 그는 뒷날 구재동이라 불리게 된 동네에서 구재학당이라는 일종의 사립 교육기관을 세워 후진을 길렀다.

 

또 고려 후기 재상 채홍철은, 자하 동에 새로 집을 지어 이마에 주름진 은퇴 관료들과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자하동과 구재동은 서로 이웃한 동네로서, 모두 만월대 동북쪽 조용하고 산과 물이 아름다운 곳에 있었다.


양반들의 주거 분포는 위에서처럼 환경적인 요소나 직장과의 거리 등이 고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대가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통과 동서 대로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사실 시장통 가까운 곳의 주거 혹은 건물지 확보는 그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여가고 있었다. 

 

특히 권력층에서는 거대 농장을 키우며 고리대 놀이를 하는 한편으로, 개경 시장통에서 상업에 직간접으로 종사하면서 재산을 불려갔다. 4대 동안의 무인집권기를 열었던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남대가 시전 행랑을 확충하는 한편, 십자가에 인접한 활동이라는 동네의 개인 집 백여 채를 헐어내고 자신의 저택을 지었다. 시전은 어용성이 강하므로 권력의 개입 여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최충헌이 시전 행랑을 확충하고 또 시장통 코앞에 무리하게 저택을 건설하였던 것은 권력을 바탕으로 시장통에 적극 개입하여 상업 이익을 축적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