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952호] 2009년 11월 10일(화) 17:46:54
뉴스 > 문화 > 종합|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종중 전원 모여 조상묘역 조성 등 단결력 자랑
경주이씨는 전체적으로 고양시에 9개 마을에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익재공파 화정화수회(회장 이상광) 후손들이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명지병원 일대 골모리 마을과 백석동 일대에서 생활해 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 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과 조상의 모습을 엿 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 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수ㄴ서에 따라 11월 6일 경주이씨 익재공파 화정화수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39) - 경주 이씨 익재공파 화정동 골모리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경주 이씨 익재공파 화정화수회
↑이상광 회장(사진 좌)과 이영찬 고양시 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사진 우)가 종중 자료를 살펴
보면서 가문의 내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30여 년 고양서 거주
경주 이씨 익재공파는 현재 41대까지 자손이 번창해 있다. 화정동이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전 경주 이씨 사람들은 지금의 명지병원 일대에 위치했던 골모리 마을에서 거주하며 평화롭게 살아왔다. 과거 골모리 마을에는 10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 이외에도 윤씨, 조씨, 김씨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경주 이씨가 70여 가구로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냈다. 화정 골모리 마을 이외에도 백석동(옛 중면 백석리 방턱골)에도 익재공파 자손들이 13가구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백석동 경주 이씨들은 시제 등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면 화정동을 찾아 함께 대소사를 치르면서 우애를 다져갔다.
경주 이씨는 27대 돈헌공의 5남중 4남인 충주부사공의 장손의 3남중 2남인 31대 익한공을 입향조로 모시고 있다. 익한공은 개성에서 5대까지 번창했고 묘소는 개성부 소남면 지금리에 안장돼 있다.익한공이 42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부인인 평산신씨는 아들을 데리고 화정동 골모리에 정착한다. 이 때부터 10대, 230여 년의 경주 이씨 익재공파의 고양 역사가 시작된다.
↑대자동에 조성된 31대 조상부터 35대 조상까지의 묘역
택지개발로 조상묘 이장
경주 이씨 익재공파는 화정동과 백석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지도면 화정리 산2번지에 조상들의 묘를 조성해 은덕을 기렸다. 그러나 1990년 정부가 택지개발 사업을 시행하면서 더 이상 조상들의 묘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1991년 11월 경주 이씨 익재공파는 종중회의를 열고 대자동 산55-1번지(까치골)에 새롭게 조상들의 묘역을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영종도에 안장된 익한공의 묘를 이장해 오면서 대자동에 함께 모시게 된다.
1992년 5월에 종중 전원이 모여 대자동 묘역 조성과 정비에 참여하는 등 구슬땀을 흘린 끝에 31대부터 34대까지의 조상들을 무사히 이장하게 된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이 곳에서 시향을 지내오고 있다.
한편 경주 이씨 익재공파 소종중 일부는 화정동 산 56번지 일대에 조상들의 묘소를 모시고 있었으나 이 역시 지하철 공사로 화정동 136-15번지로 이장해 가족묘를 조성해야 했다.
↑경주이씨 익재공파 화정화수회의 입향조인 이익한 공의 묘소. 대자동 경주이씨 조상 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벼농사보다 과수원에 주력
경주 이씨 익재공파 사람들은 주로 과수원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골모리 배 밭은 고양시는 물론 인근 지역에서는 알아줄 정도로 유명했다. 경주 이씨 집안 중에서는 이상극 어른의 과수원이 약 3만평 정도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이상극 어른은 당시로서는 몇 안 되는 2층집을 소유하고 있기도 했다.
이상춘 총무는 “당시 화정동 일대에 저수시설이 발달돼 있고, 토양도 좋아서 배가 풍작을 이루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과수원이 잘되자 경주 이씨 사람들은 벼농사보다는 과수원에 주력했다.
이렇게 생산된 골모리 배는 현지에서도 많이 소비됐지만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도 많이 팔려나갔다. 과수원 못지 않게 벼농사도 잘 돼서 인근 지역 사람들은 곡식이 떨어지거나 농사가 잘 안 되면 골모리에 양식을 구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고양사람 모두가 좋아하던 국사봉은 골모리에 거주하던 경주 이씨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자부심이었다. 경주 이씨 사람들은 이 곳 국사봉에서 어린 시절에 나무를 하러 가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연을 날리던 추억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 10월 초에는 골모리 사람들만 모여서 산신제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면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마을 축제가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화정동 일대가 개발이 되면서 사라져 지금은 그 명맥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상광 회장이 이홍우 어른이 강화도 묘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당시에 작성했던 기록을
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문중 발전 이끈 이홍우 어른
고양화수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홍우 어른은 경주 이씨 고양화수회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이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문중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해 경주 이씨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강화도에 조성됐던 조상들의 묘역이 1953년 경 관리 부실로 자칫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갈 위기에 처한 것을 살려낸 일은 아직까지도 문중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홍우 어른은 강화도 묘역을 지키기 위해 문중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금 활동을 펼쳤고 그의 노력에 문중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곡식을 보태면서 강화도 묘역을 꼭 지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이홍우 어른이 기록했던 모금 관련 기록과 묘역관련 서류를 종중에서는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태우 고문은 “한 번은 마을에 비가 많이 와서 논이 유실됐다. 그러자 이홍우 어른은 복구작업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 1천 여 평을 되살렸다.
그러자 논 주인은 감사의 뜻으로 그 땅을 문중에 희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경주 이씨 사람들은 이처럼 이홍우 어른의 지도력 때문에 오늘날 집안이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상광 회장은 “온화하면서도 성실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집안 일에 항상 솔선수범 하셨으며 장학사업과 위토 마련에도 적극적이셨다”고 말했다.
또한 집안의 이효영 어른은 지도면장을 지냈는데, 1909년 12월 이효영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는 지도면 사람들 전체가 모여서 통곡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고양군 시절 행정계장을 지냈던 이길환 어른은 항상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매달고 다닐 정도로 청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길환 어른은 훗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중 발전 이끈 이홍우 어른
고양화수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홍우 어른은 경주 이씨 고양화수회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이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문중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해 경주 이씨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강화도에 조성됐던 조상들의 묘역이 1953년 경 관리 부실로 자칫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갈 위기에 처한 것을 살려낸 일은 아직까지도 문중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홍우 어른은 강화도 묘역을 지키기 위해 문중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금 활동을 펼쳤고 그의 노력에 문중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곡식을 보태면서 강화도 묘역을 꼭 지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이홍우 어른이 기록했던 모금 관련 기록과 묘역관련 서류를 종중에서는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태우 고문은 “한 번은 마을에 비가 많이 와서 논이 유실됐다. 그러자 이홍우 어른은 복구작업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 1천 여 평을 되살렸다.
그러자 논 주인은 감사의 뜻으로 그 땅을 문중에 희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경주 이씨 사람들은 이처럼 이홍우 어른의 지도력 때문에 오늘날 집안이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상광 회장은 “온화하면서도 성실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집안 일에 항상 솔선수범 하셨으며 장학사업과 위토 마련에도 적극적이셨다”고 말했다.
또한 집안의 이효영 어른은 지도면장을 지냈는데, 1909년 12월 이효영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는 지도면 사람들 전체가 모여서 통곡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고양군 시절 행정계장을 지냈던 이길환 어른은 항상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매달고 다닐 정도로 청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길환 어른은 훗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양화수회 사람들이 올해 청원의 익재공 영정을 찾았다. 맨 뒷줄 왼쪽부터 이정우 부회장,
이상남, 이재우, 이재춘 경주 이씨 충북회장(가운뎃줄 맨 왼쪽), 이상인, 이상춘 총무, 이상기,
이상동, 이상웅(맨 앞줄 왼쪽), 이태우 고문, 이상광 회장
과거 가치 되살리기 위해 노력
경주 이씨 익재공파 사람들은 급속한 현대화와 택지 개발로 변해버린 고향을 보면 못내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럴수록 과거에 함께 어울려 제사도 지내고,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하며 화합했던 모습은 중요하게만 느껴진다.
이상광 회장 “마을에 같이 살아도 5촌·6촌들이 서로 얼굴도 모르고, 한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이웃 간의 인사도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이젠 어른이 먼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세상이다”라고 탄식했다.
그래서 고양화수회에서는 과거의 가치들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매년 전반기와 후반기에 걸쳐 만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2회에 걸쳐 경로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벌써 13년째 매년 5월이면 가정의 달을 맞아 어르신들을 모시고 1박 2일로 효도 관광을 진행하고 있다. 이 효도관광에는 만 65세 이상이면 경주 이씨의 며느리도 참석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시향 때면 참가자들에게 교통비를 지급하면서 참여를 독려하는 등 종인들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항상 고민하고 있다. 이상광 회장은 “가문의 뿌리에 대해 교육하고 4년 정도 시행하다 중단된 장학사업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런 활동들이 숭고한 돈족사랑과 효친 경로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씨족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고양의 입향조
위의 고양문중은 경주이씨 팔별집의 끝집인 24世 한당공(閑堂公) 휘(諱) 곤(鯤)의 7대손이요. 26世 서계공(西溪公) 휘(諱) 득윤(得胤)의 현손(玄孫)인 31世 휘(諱) 익한(益漢)공이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 위의 사진에 나오는 영당은 익재공 영정을 봉안한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24세 한당공(閑堂公) 산소 아래레 있는
수락영당(水落影堂) 이내요.
↑수락영당(水落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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