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제146호] 20091227 입력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조선 후기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승자인 노론과 패자인 여타 당파에 관한 기록이 그런 것처럼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와 라이벌 희빈 장씨 이야기도 시종 승자인 최씨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 노론은 최씨를 우호적으로 묘사했지만 영조의 모친 추숭 작업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①숙빈 최씨의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숙종 당시 묻힐 때는 소령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령원으로
격상 되었다.
②육상궁 현판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곁에 있다. 영조는 즉위 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 시켰는데 현판
은 아직도 육상묘인 것이 이채롭다. 이곳은 주로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사당이다.
③이문정의 수문록 들은 대로 썼다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다. 이문정은 종제 이진유가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리자
절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노론 정체성이 강했고, 이 책도 그런 관점에서 서술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영조
⑤숙빈 최씨 추숭
영조는 평생 경종 독살설과 모친 최씨의 미천한 신분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숙빈(淑嬪) 최씨는 희빈 장씨의 라이벌이었다. 여러 야사에 최씨는 선한 인물로, 장씨는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최씨가 인현왕후 및 노론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한 덕분이었다. 그런 야사의 하나가 조선 후기 이문정(李聞政)이 쓴 『수문록(隨聞錄)』으로서 숙종과 최씨의 만남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최씨가 궐내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숙종이 들어온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도 그리워졌고 옛 주인을 섬기는 최씨의 정성도 가상했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해 태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는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閔維重)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송씨(송준길의 딸)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 다리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나 거두어 길렀다고 전한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며 궁녀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숙빈 최씨의 신분에 대해 궁녀에게 세숫물을 떠다 주는 무수리(水賜)라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은 달리 전하고 있다.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는 ‘만 6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들어왔다(選入宮甫七歲)’고 전하고 있다.
인현왕후가 만 14세에 숙종과 가례를 올릴 때 최씨는 만 11세였다. 최씨가 6세 때 궁녀로 들어왔다면 인현왕후가 데려갈 수는 없게 된다. 또한 6세 때 궁녀로 들어갔다면 무수리 출신도 아니다. 남인 계열 장씨의 미인계에 일격을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 서인(노론)에게 최씨는 좋은 반격의 재료였다.
실제 서인(노론)은 고비마다 최씨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숙종 20년(1694) 서인들이 하룻밤 사이의 대반전으로 정권을 잡는 갑술환국도 마찬가지였다. 민유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奉保夫人: 숙종의 유모)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명문 거족 출신의 거대 정파 노론에 맞섰던 천인 출신 희빈 장씨에 대한 노론의 적대감은 상상 이상이어서 여러 전설을 만들어냈다.『수문록』은 왕비 장씨와 최씨의 다툼을 시종 최씨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데, 숙종이 조는 사이 신룡(神龍)이 땅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숙종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숙종이 장씨 방에 가서 살피니 담장 밑에 큰 독이 엎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 임신한 최씨가 결박당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왕비 민씨가 희빈 장씨의 종아리를 때린 것처럼 왕비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는 최씨를 질투하고 박해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임금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고 시도할 수는 없다.
아들이 귀했던 숙종 때 왕의 혈육을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던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갑술환국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그날로 쫓겨나 사형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아이(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護産廳)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차자를 올려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반발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야사는 대부분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장씨를 죽음으로 몬 여인은 최씨였다.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가 병사한 후 장씨는 민씨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숙종실록』은 “숙빈 최씨가 평일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숙종실록』 27년 9월 23일)”고 기록해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몬 인물이 최씨라고 전하고 있다.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최씨의 장지(葬地)를 선정한 인물이 목호룡이다. 당초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간심한 숙빈의 장지는 경기도 광주의 명선(明善)·명혜공주(明惠公主)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 터였다.
법금을 무시한 장지 선택이라고 질책당한 후 연잉군이 목호룡을 데리고 직접 간심해 결정한 장지가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의 소령묘(昭寧墓: 현 소령원)였다.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家奴)였던 목호룡은 이 공으로 속신(贖身)되는데 삼급수 사건을 고변했다가 영조 즉위 초 죽임을 당했으니 기막힌 인생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 즉위 직후 숙빈에 대한 추숭 작업을 추진한 것은 소론 정권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9월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이 “선조 때 덕흥군을 높여서 대원군이라고 하고, 군부인(郡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높였다”면서 추숭을 건의하자 영조는 우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숙종이 내린 작호에 ‘대(大)’자를 첨가하자고 찬성하자 영조는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고 선유(先儒)가 말했다”고 동의했다. 그러면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했다”며 선왕이 내린 작호를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숙빈의 사우(祠宇)를 따로 짓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두 달 전의 사양이 본심이 아님을 드러냈다. 영조는 숙빈 최씨에게 시호를 올리고 묘(廟)를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승격함으로써 생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한편 모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으려고 했다.
재위 17년의 신유대훈으로 목호룡의 옥사를 모두 무효화시킨 영조는 이를 기반으로 재위 20년(1744)부터 본격적인 숙빈 추숭에 나섰다. 이때 영조는 “사서(士庶)도 동추(同樞: 종2품 동지중추부사) 이상은 3대를 추증하는데 하물며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라면서 3대를 추증하라고 명했다.
드디어 재위 29년(1753) 6월 25일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宮), 소령묘(昭寧墓)를 소령원(園)으로 격상시켰다. 영조는 “오늘 이후로는 한이 없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격했으나 의식 진행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해 7월 27일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시키는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을 설치했는데, 은인(銀印) 사용에 반대하고 나선 신하가 있었다. 격분한 영조는 왕위를 물러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면서 “내가 사친을 위해서 감히 옥인(玉印)을 바라지는 못해도 어찌 은인(銀印)까지 불가하겠는가?”라고 분개했다.
이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우리나라는 양반의 나라이니(兩班之國), 경 등이 스스로 다스리면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었다.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는 내용을 죽책문(竹冊文)으로 지어야 했으나 작문 당사자인 대제학 조관빈(趙觀彬)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죽책이 옥책(玉冊)에 비하면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국조(國朝)의 크고 작은 책문(冊文)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영조실록』 29년 7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왕비나 세자빈이 아니면 죽책문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영조는 “그 마음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대신들은 마땅히 토죄를 청해야 할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영조가 분노한 이유는 조관빈이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조태채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숙빈 덕분에 노론이 정권을 되찾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조는 소론의 불만을 무릅쓰며 재위 12년(1736) 조태채의 관작을 복구시켜주었는데 그 아들이 죽책문 작성을 거부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논란 끝에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廟)를 육상궁(宮)으로, 소령묘(墓)를 소령원(園)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왕비보다는 낮지만 후궁보다는 높은 새로운 궁원(宮園)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영조 50년(1774) 거창 유생 김중일(金重鎰) 등이 소령원을 릉(陵)으로 올리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구미에 맞춘 말이었으나 영조는 “엄중히 처단해야 하겠지만 기기(忌器)를 참작하여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기기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로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곁의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사헌부의 요청에 따라 김중일을 유배 보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양반 나라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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