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6호] 20081101 입력
■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② 헌정질서 파괴
명분은 때로 실용보다 중요하다.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힘이 명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수양은 명분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종 시절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으나 수양에게 살해됐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중략)...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는 시를 남겼다.
김종서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달(단종을 상징)을 향해 울부짖고 소나무(유학자 그룹)는 달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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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1년(1453)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 등을 집으로 불러 “김종서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그날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수양은 집 후원(後苑) 송정(松亭)으로 수십 명의 무사를 불러 활을 쏘게 하고 술을 먹였다.
저녁 무렵 수양은 무사들에게 “오늘은 충신열사가 대의(大義)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김종서)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깜짝 놀란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 등은 “마땅히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역적이니 죽여 달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양이 온갖 공을 들여 키운 무사들에게조차 수양의 ‘대의’는 ‘역심(逆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노산군일기’는 수양의 말을 듣고 ‘북문 쪽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아무런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다.
다급해진 수양이 한명회에게 “대다수 사람이 불가하게 여기니, 장차 어떤 계교가 좋겠는가”라고 묻자, 쿠데타에 인생을 건 한명회는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고, 홍윤성(洪允成)도 “군사를 쓰는 데 이럴까 저럴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해(害)입니다”라며 결행을 촉구했다.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수양은 가동 임어을운(林於乙云)과 무사 양정(楊汀) 등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김종서에게 “정승(政丞)의 사모(紗帽) 뿔을 빌립시다”라고 말해 경계를 느슨히 한 다음 청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보는 순간 수양의 재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내려쳤다.
아들 승규가 아비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덮자 양정이 칼로 찔렀다.
두만강 육진(六鎭) 개척의 원훈(元勳) 김종서가 이렇게 쓰러지면서 조선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시작된다. 수양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는 이때 “노산군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해 궁중의 술(內온)과 음식(內羞)으로 세조(수양) 이하 여러 재상을 먹였다”고 전하지만,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譜錄)’은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려워하는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부르는 명패(命牌)를 내리게 한 수양은 문(門)마다 역사들을 배치했다. ‘본조선원보록’은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生殺簿)’를 들고 문 곁에 앉아 있다가 ‘사부(死簿)’에 오른 대신들을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李穰),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명패를 받고 입궐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윤처공(尹處恭)·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은 집으로 쳐들어 온 역사(力士)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죽은 이현로(李賢老)는 단종 즉위년 윤9월 이미 수양에게 구타당했던 문신이었다. 감여(堪輿:풍수)에도 능했던 그는 “백악산(白嶽山)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종손)이 쇠하고 방룡(傍龍:지손)이 발(發)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의 말대로 백악산 뒤에 궁을 지으면 지손인 수양은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이다.
다음날 수양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가 되었다. 혼자서 의정부와 이·병조를 모두 차지했으니 ‘왕’이란 말만 빠진 사실상의 임금이었다.
살육전은 계속되어 수양의 친동생 안평대군,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 같은 왕족들과 허후(許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지정(池淨)·이보인(李保仁)·이의산(李義山)·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 등이 죽임을 당했다.
국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죽인 후 그 시신 위에서 축제를 열었다.
쿠데타 닷새 후인 단종 1년(1453) 10월 15일 수양대군·정인지·한확(韓確)·한명회·권남 등 14명을 1등공신, 신숙주 등 11명을 이등공신으로 하는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되었다.
태종 즉위년(140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후 52년 만의 공신 책봉이었다.
공신의 자손들은 범죄(犯罪)해도 영원히 용서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난신전(亂臣田)이란 명목으로 나누어 가졌고, 급기야 그 가족들까지 죽였다. 처음에 가족들은 ‘변군(邊郡)의 관노(官奴)’로 삼았으나 계유정난 10개월 후인 단종 2년(1454) 8월 15일, 추석제를 지내고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停所)에서 살해령을 내린 것이다.
단종의 명을 빙자했지만 “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았다”는 기록처럼 수양대군이 주도한 것이다. “이용(李瑢: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皇甫錫:황보인의 아들)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金木臺),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그리고 정분(鄭분)·이석정(李石貞)·조완규(趙完珪)·조순생(趙順生)·정효강(鄭孝康)·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노산군일기’ 2년 8월 15일)”
39명을 추석날 사형시킨 것이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고 아들 정진(鄭津)을 수군으로 삼았으나 재위 7년(1407) 판나주(判羅州) 목사로, 상왕 시절인 세종 1년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승진시켰다. 선 자리가 달랐기에 정도전은 제거했어도 자식은 종2품까지 승진시켰던 것이다.
단종은 재위 2년(1454) 수양에게 “숙부는 과인(寡人)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주공)으로 하여금 주(周)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끝까지 조카를 보좌함으로써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던 주공(周公)이 돼 달라는 애원이었다. 단종은 여러 차례 수양을 주공(周公)에 비유하는 글을 내렸으나 수양은 애당초 주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수양은 단종 3년(1455) 윤6월 친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세종의 서자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을 귀양보내 압박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단종은 그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고 전하지만 ‘육신록(六臣錄)’은 “밤에 수양대군이 철퇴(鐵槌:쇠몽치)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고 전한다.
‘육신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수양이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즉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위에 성공한 수양은 한명회·신숙주·한확·윤사로 등 7명을 1등공신으로 하는 총 47명의 좌익(左翼)공신을 다시 책봉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은 수양이 왕위를 빼앗을 때 ‘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양이 왕위까지 빼앗은 것은 시대가 용인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은 것이었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수양의 행위는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주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 때 집현전 등을 통해 성장한 유학자들이 이 명분 없는 쿠데타에 강력히 반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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